소설리스트

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44)화 (144/257)

144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강서단 내부에서 회의를 거친 뒤, 스승님과 상의를 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말했지만 어떤 지원이든 해 줄 테니 부담 갖지 말고 만반의 준비를 요청하세요.”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지 마십시오. 아직 정해진 건 아닙니다.”

사영이 샐쭉하게 대답하자, 마냥 귀엽다는 듯 웃어 보이던 희가 은근슬쩍 제안했다.

“이렇게 된 김에 임 소협까지 함께 가는 건 어때요? 오랜만에 합동 임무도 좋잖아요. 임 소협이라면 흔쾌히 따라가서 도울 것 같은데.”

“현아는 절대 데려가지 않을 겁니다. 잠행은커녕 조용히 걷지도 못하는 놈이라 방해만 될 게 뻔합니다.”

“대신 무력도 출중하고 눈에 띄잖아요. 왕정의 시선을 잡아 끌기엔 딱 좋지 않나요? 더군다나 모용세가에 빚을 지우기까지 했으니, 모용 공자에게 부탁해서 함께 가기라도 한다면 딱 좋은 미끼가 되어 줄 거예요.”

“아니요, 적군이 아군 시늉을 하고 있는 곳에 동반할 순 없습니다. 이번에 모용서 그 자식한테 껌뻑 속아 넘어간 것만 봐도 아시지 않습니까. 분명 위험해질 겁니다.”

“그런 위험한 곳에 누나를 보내는 소협은 괜찮을까요?”

“…….”

사영은 입을 다물고 인상을 쓴 채 정말 그럴 거냐는 듯 희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얄미운 상사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았고, 결국 이번에도 납득하는 건 사영이었다.

“……데려갈 일은 없겠지만, 얘기는 해 두겠습니다.”

“따라가겠다고 하면 말리지 말기예요. 소협도 이제 다 컸잖아요.”

“정신머리가 안 컸습니다.”

“어쩌면 당신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요. 아무튼, 정말 말리지 말기.”

“…….”

정말 끝까지 그럴 거냐는 듯 입을 다물고 희를 응시하던 사영이 휙 고개를 돌렸다. 한마디 말도 없이 초윤의 서신과 가지고 왔던 자료를 챙겨 나가 버리는 모습은 일종의 항의였고, 투정이었다. 저렇게 심기 불편한 티를 내는 것도 자신이 상대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희는 닫히는 문을 흐뭇하게 보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수신호를 알아들은 여와가 재깍 다가와 옆에 앉자 그의 팔과 어깨에 폭 기댔다.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하나. 말주변이 없어 고민하던 여와가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여 희의 얼굴을 쫓았다. 아까부터 걱정하던 것이 있었다.

“노여움은…… 가라앉히셨습니까.”

“응? 아아, 괜찮아요. 이런 일도 한 번씩은 겪어야지요.”

여와의 금빛 눈이 곱게 모은 희의 양손과 손톱자국이 새겨진 책상을 오갔다. 불쾌함을 드러내는 건 여러 번 보았지만 이토록 선명한 형태의 분노는 처음 보았다. 태연한 목소리와 평온한 낯을 가장하고 있지만 배신자를 잡는다면 기상천외한 형벌을 내리고도 남을 터였다.

무엇이 이 사람을 기쁘게 할까. 여와는 고심 끝에 말했다.

“필요하시다면 저와 암위대가 비밀리에 뒤를 쫓겠습니다. 모습을 아예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려하시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아니, 당신은 여기 있어야 해요.”

단호하게 즉답한 희가 여와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검은색 무복에 주름이 지고, 흰 손등에는 뼈대가 섰다. 절박하다 싶을 정도로 들어간 힘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여와가 침묵을 유지하자, 희는 곧 한숨을 쉬며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임 소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얘기하지 못했는데, 광동성에 예기치 못한 손님이 더 도착했어요. 아무래도 약선 대협께선 사람을 불러 모으는 능력도 타고나신 것 같아요.”

“위험한 인물입니까?”

“굉장히요.”

간결히 말한 희는 이마를 짚으며 여와의 어깨에 조금 더 기댔다. 여와는 희가 짊어진 무게를 단단히 받쳐 주며 그의 생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사이의 공백을 채우고, 희는 지친 듯 토로했다.

“……사실 당신에게 말하는 것도 불안하지만 믿어 볼게요. 맹주가 직계 남성 둘을 데리고 왔어요.”

“……맹주라면, 백협맹주 말입니까?”

“네, 백협맹주 남궁영이요. 당신이 오래전부터 보고 싶어 하던 그 사람이 어느새 들어와 있었어요.”

“…….”

닳아빠진 기억의 파편이 여와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빗물에 척척히 젖어 달라붙던 단복, 꿇어앉은 무릎에 고인 핏물, 바닥을 나뒹구는 단원들의 머리와 진흙으로 더럽혀진 시신.

여와의 목울대가 세차게 꿀렁였다. 입술이 떨리고, 손끝이 굳었다. 희는 여와의 반응을 물끄러미 관찰하다 작게 물었다.

“갈 거예요?”

“……가서는 아니 되기에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네, 지금 가면 당신은 죽어요. 당신이 지켜야 할 나도 죽고, 어쩌면 당신이 바라던 대로 모조리 끝날 수 있어요. 그리되고 싶나요?”

“……아니요.”

“그래요. 고마워요. 그럼 계속할게요.”

희는 기대고 있던 여와의 팔을 안고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안휘성의 남궁세가가 봉문한 뒤 남궁영의 행적을 알 수 없었는데, 그동안 조용히 강서성을 종단한 것 같아요. 규모는 최소한이고 속도보단 기밀에 치중했어요. 그리고 마차 두 대를 끌고 왔는데…… 하나에 무엇을 실어 왔는지 도무지 짐작가지 않아요.”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아니요, 그러지 말아요. 당신은 그냥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줘요.”

희는 이성적인 인간이었고, 충동으로 보이는 행위 또한 계산을 거친 모략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 본능적인 두려움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인간이 지닌 감이란 결국 무의식적인 예측의 결과물. 희는 그곳에 소중한 이를 보내면 영영 후회할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동행한 두 명의 신원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으나 이립을 넘은 용모라고 했어요. 만약 이들이 옥리와 호관이라면 사영에게 얘기해야 할까요?”

“남궁옥리와 남궁호관은 와병한 지 이십 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요. 설령 살아 있고, 정신이 들었다고 해도 장거리의 여정을 소화할 체력은 없을 겁니다.”

“백협맹을 장악한 이들에게 아무런 대책도 없었을까요?”

“강산이 두 번은 바뀌고도 남을 시간 동안 찾지 못한 방법이라면 그 후로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상식을 벗어나는 힘이 지금 우리 마당 뒤편에도 있잖아요.”

“…….”

이렇게 말한다면 또 받아칠 방법이 없었다. 사고의 범위와 언어 구사력에서 밀린 여와는 가볍게 승복했다.

“만약 그들이 맞다면, 사영에게 마땅히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영은 자기 울타리 안의 사람에게 굉장히 맹목적이잖아요. 어쩌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을 죽이려 들 수 있어서 걱정이에요.”

“그래서 사영을 섬서성에 보내시는 겁니까?”

“동생과 함께 맡은 책임이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할 틈을 만들어 주지 않을까 했어요. 역효과가 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요.”

설마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겠어, 싶다가도 인간만큼 물불 안 가리는 짐승이 없다는 진리를 상기할 때마다 불안해졌다. 그러나 사영의 역린을 빤히 알면서도 입을 다문 일이 들통난다면 그동안 쌓아 온 신뢰가 박살 나리란 것 또한 자명했다. 비수 같은 복수심을 품고 있는 여와는 내게 조언을 줄 수 있을까. 희는 여와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여와는 사영의 자리에 자신을 끼워 넣어 신중하게 고찰한 뒤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그동안 보아 온 사영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몇 년 전까지는 길들여지지 않은 느낌이 강했으나, 지금은 문주님께 많은 것을 배운 상태입니다. 잘 설명하고 타이르신다면 나중을 위해서라도 참아 낼 겁니다.”

“……나중이요?”

“비탈길에서 정성스레 눈덩이를 굴리듯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없는 말재간을 그러모아 어색하게 농을 건네자, 가만히 듣고 있던 희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제 주인의 숨통이 그제야 트인 듯해 가슴이 놓였다. 맞아요, 그러네요, 자잘한 동조가 참새처럼 이어졌다. 복면으로 가려진 여와의 입꼬리가 희미한 곡선을 그리는 순간, 아래층에서 커다란 발소리가 들려왔다.

예민한 귀 끝이 반사적으로 쫑긋 움직였다. 여와는 즉각 고개를 쳐들어 장지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풀려 있던 근육이 딱딱하게 조여들고, 한 손은 허리춤의 검집을 향했다. 보폭과 기운이 익숙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 뒤에야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의아한 듯 여와를 올려다보던 희 또한 가까워지는 걸음을 느꼈는지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곧 직접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이는,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임사영이었다.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상기된 얼굴로 숨도 고르지 못한 사영이 말했다.

“문주님, 현아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임 소협이요? 아니요, 따로 알아보진 않았는데요. 거처에 없던가요?”

문틀을 부술 듯 꽉 쥔 사영은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희의 앞으로 다가갔다. 서안에 양손을 짚고 절박하게 들이미는 낯엔 편집증적인 공포가 여과 없이 어려 있었다. 파란의 개시를 고하는 종에 걸맞는 형상이었다.

“거처에도, 귀빈관에도, 연무장에도, 급식소에도, 해무당에도 없습니다. 어제부로 현아의 종적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