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책임 여부가 명확지 않다는 이유로 인지한 문제를 외면하면 결국 막대한 피해밖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알게 된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찾아 해야지. 이곳은 남의 손을 빌려 쓰기 좋으니 다방면으로 빠르게 행동하기 적합하다.”
천오의 물음에 차근차근 대답하자 어지럽던 머릿속도 서서히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한탄할 시간에 뭐라도 하나 더 찾아봐야 했다. 희가 거주하는 하오문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제격인 장소였으며, 모용 형제가 가까이 있는 것 또한 다른 의미에선 행운이었다.
이대로 천오를 데리고 다시 불귀산맥으로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하지만 본래의 주민이 아닌 정하윤은 몰라도 천오에겐 조만간 발을 들일 세상이며, 쭉 살아갈 세계 아닌가. 정해져 있던 천오의 인생에 개입한 만큼의 수습은 해야 했다.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았지만 당장은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애 키우는 게 힘들단 소리는 많이 들었고, 고달픈 상황도 여러 번 겪었지만 이만한 스케일이 될 줄은 몰랐는데. 천오가 국가적 수준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약간 자랑스러운 한숨을 삼킨 초윤은 양해를 구하듯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용무는 늦어도 백로(白露)전에 끝내도록 하겠다. 조금 기다려 줄 수 있겠느냐.”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필요하게 된다면 기탄없이 맡기겠다.”
필요할 일이 생겨도 웬만해선 끌어들일 생각은 없지만 말이지. 어느 정도 정신력을 회복한 초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신물이 사라진 이후의 변화를 어떻게 조사할지 궁리하느라 마주 앉은 천오의 시선이 끝내 떨어지지 않는 것마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하룻밤이 더 얼렁뚱땅 지나가고, 다음날 아침 뒤뜰로 나와 진검을 손에 익히는 천오의 기척을 느끼고 나서야 초윤은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을 퍼뜩 떠올렸다.
‘근데…… 신물이고 나발이고 천오를 독립시키려고 나왔던 것 아니었나?’
생각해 보니 애초부터 이번 여행은 천오의 홀로서기를 응원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언제부터 까먹고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또 새로운 문제가 생겨 버렸다.
‘집 가고 싶어 하는 애한테 내 개인 사정이 있으니 좀 봐 달라고 했잖아. 이래 놓고서 갑자기 너는 여기서 네 인생을 살아라, 나는 혼자 돌아가겠다. 이러면 안 되지 않아?’
종이 몇 장에 상황을 정리하던 초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붓 끝에서 똑 떨어진 먹물이 흘러 쓴 글씨 위에 얼룩을 만들었다. 초윤은 벼루 위에 붓을 내려놓고 담담한 얼굴로 생각했다. 첩첩산중도 이런 첩첩산중이 따로 없었다.
‘어차피 신물과 모용서 일을 해결하려면 희한테 도움을 받기도 해야 하니까……. 천오의 서문세가와 관련된 정보도 자세히 물어볼까? 그때 가담한 사람들이 지금은 뭘 하고 사는지 알아야 복수도 준비할 거 아냐. 근데 지금 문제는 이게 아니잖아. 이 상황에 갑자기 독립을 시켜도 괜찮은 거야? 천오는 지금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그렇지만 이번에 다시 무심서로 돌아가면 적어도 내년 봄가을에나 나오겠지? 엄동설한에 애를 내보낼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예정을 몇 달 늦출까? 아니면…….’
같이 나온 김에 천오의 복수도 확 그냥 도와줘서 빨리 끝내 버려? 아니야, 이건 내가 관여할 게 아니지. 도와준다 해도 천오 몰래 쫓아다니는 정도로…… 그것도 절대 들키지 않게 끝내야 해.
초윤의 사고가 엉뚱하고 과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초윤 본인도 이를 아는지 곧 짧은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을 접었다. 친족의 복수에 간섭한다니 가능할 리 없었고, 천오의 뒤를 미행하면서 들키지 않게 돕는다니 더욱 이상했다.
‘역시 천오의 의견이 중요해. 일단 희한테 관련자의 정보를 알아 와서…… 이것도 어쩌면 과한 참견일 수 있어. 내가 복수를 사주하는 건 아니니까 도와 달라고 하기 전까진 나서지 말자. 그러면 천오한테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물어보는 게 최선일 것 같네. 원래 이번 여행을 마지막으로 하산을 시키려 했다고 말하고…….’
-언제쯤 무심서로 돌아가실 요량이십니까?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다면 무심서에 조금 더 있어도 된다고 하자. 서둘러서 좋을 건 없으니까.’
성인이 됐다고 곧장 분가시킬 이유도 없고. 이번 겨울에는 장래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해 보자고 해야지. 초윤은 간만에 희망적인 커리큘럼을 짜며 안정을 되찾았다. 초윤이 모든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마음을 다잡은 순간이었다.
경라 비단처럼 얇고 가벼우면서도 멀리까지 펼쳐 둔 기감에 들이박듯 발을 들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운, 친숙한 무게감이었지만 이토록 조급한 거동은 처음이었다. 동작에서부터 느껴지는 위태로움에 살짝 몸을 굳힌 것도 잠시, 초윤은 서둘러 의자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한낮의 햇빛이 직격으로 내리꽂혔지만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해무당의 대문으로 향했다. 마침 비슷한 걸음을 감지했는지 뒤뜰에 있던 천오 또한 들고 있던 백홍을 갈무리하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천오를 바라보며 입을 떼려는 찰나 대문이 밀치듯 양쪽으로 벌컥 열렸다. 그 사이로 들어온 사람은 역시나 사영이었다.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리던 사영은 마중 나온 초윤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스승님, 현아를 보셨습니까?”
“……아니, 엊그제 너와 함께 돌아가고 난 뒤로는 본 적 없다. 무슨 일이더냐.”
“아…… 안, 안 되는데.”
스승의 답을 들은 사영이 덜덜 떨리는 엄지손톱을 씹으며 불안정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낯이 익어 초윤의 등줄기에 소름이 달렸다. 심장 가운데에 얼음이 박힌 듯 싸 해지고, 어금니가 저절로 악물렸다. 가끔씩 이렇게 고개를 들이미는 과거의 편린은 기껏 다잡은 정신머리를 너무도 쉽게 틀어쥐고 뒤흔들었다.
하지만 충격에서 허우적거릴 여유는 없었다. 일순의 섬뜩함을 이겨 낸 초윤이 성큼성큼 걸어 사영의 어깨를 붙잡았다. 갈 곳을 잃고 헤매던 고동색 눈이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초윤은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사현이 사라진 것이냐?”
“네, 네, 스승님. 지금 하오문에서 그 아이가 있을 법한 곳은 전부 살피고 온 참입니다.”
“언제부터?”
“어제 아침 급식소에서 조반을 받고, 귀빈관에서 모용서와 대화를 나눈 이후로 행적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사현의 연치가 올해로 스물한 살이다. 제 앞가림 하나만큼은 잘할 아이라 보는데, 사라졌다고 단정하는 이유가 있더냐?”
“……아…… 아무런 흔적도 없었습니다.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외박을 할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지. 하지만 네가 이리 황망하게 굴어서야 될 일도 안 된다. 만일 사라졌다고 해도 이곳은 네 근거지나 다름없는 광동성이고, 너를 도울 사람도 수없이 많다. 그들을 주동할 자가 이렇게 정신을 놓으면 되겠느냐.”
“……아니요, 안 됩니다.”
“알면 됐다. 볼썽사납게 손톱여물이나 썰지 말고 네 할 일을 하거라.”
현대 한국에서는 핸드폰을 꺼내 182로 신고하면 위치 추적이든 뭐든 신속한 대처가 이루어졌지만, 무협지에서는 직접 찾아다니거나 내 사람을 풀어 찾는 수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이런 와중 사영이가 중원의 대표적인 정보기관 소속인 건 굉장한 행운에 속했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설핏 비쳤다가 꾹 참아 낸 사영이 꾸벅 묵례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천오가 말했다.
“어제 모용서를 만나고 온 사형이라면 제가 만났습니다. 미시 끝자락에 잠시 해무당에 들렸는데, 스승님이 잠시 출타하셨다고 하니 시내에 다녀온다 하며 나갔습니다.”
“뭐?”
사영이 홱 몸을 틀어 천오를 보았다. 어제 모용단을 만나느라 자리를 비운 틈에 사현이 왔었다는 말을 처음 듣는 초윤 역시 천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어쩌면 천오는 말했으나 자신이 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초윤은 소매 밑으로 빈손을 꾹 주먹 쥐었다.
“시내에 다녀온다 했다고?”
“예, 사저도 바쁜 것 같으니 당과라도 사 와야겠다며 곧장 나갔습니다. 그 이후로 별다른 기별은 없었습니다만.”
주춤주춤 뒷걸음치던 사영이 문주님께 가서 여쭙겠단 중얼거림만 흐리게 남긴 채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초윤은 사영의 멀어지는 뒷모습과 닫히는 대문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성인이 된 아이가 시내로 나갔다가 하룻밤 꼬박 연락이 없고 귀가하지 않는다.
사현은 하오문의 상징인 모란 매듭을 항상 달고 다녔고, 자신이 무림임인을 숨기지도 않았다. 실력 또한 후기지수 중 손꼽힐 정도로 뛰어나니 일반적인 범죄에 휘말릴 위험도 적었다. 그러니 낙관적으로 생각한다면 음주일 가능성이 높았다. 충격이 되었을 일도 겪었고, 사현의 어물어물한 성격도 있으니 어딘가의 주루에 얼떨결에 끌려 들어가 여태 깨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초윤이 키워 낸 아이들은 고작 술독에 쓰러질 몸이 아니기도 했다.
생각이 자꾸만 부정적으로 기울었다. 괜찮으리라 주장하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이기적인 자기 위안처럼 느껴졌다.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여도 북방의 타지에서 홀로 몇 년을 살아왔을 정도로 강인한 아이니 큰일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별일 아닐 것이다 되뇌어도 각인된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어느새 초윤은 겅중겅중 두루미걸음으로 죽립을 챙겨 문틀을 넘고 있었다. 앞뒤 보지 않고 점점 빨라지는 초윤의 뒤로 묵직한 신형이 까마귀 날 듯 단박에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