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초윤은 ‘초윤’의 몸을 빌려 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고, 넘지 못하는 한계는 무엇인지. 세상의 이치를 깨우친다는 ‘현경’이란 또 어떤 것이며 무협지와 현대의 차이는 명확히 어떤 게 다르다고 봐야 할지.
활자로만 접하고 상상만을 덧대던 세계가 발 딛는 현실이 되니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려를 할 수밖에 없는 사건도 연달아 벌어졌고, 평생 운 좋게 넘어가리라곤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몸은 분명 온갖 허황된 물리 속성 판타지로 점칠 된 세계관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일 텐데, 사실상 있을 수 없는 능력을 덕지덕지 붙여 태어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며 개연성을 만들어 내는 역할일 텐데.
어째서 스무 살 언저리의 애 하나 찾지 못하고 있는 거지?
숨 쉬는 공기가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삼십 리 밖의 네 살 아기가 넘어지며 생긴 땅울림이 발밑에 진동했다. 장장 8층 위에 있는 주루에서 술잔을 채우는 소리가 들렸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 바람 사이 생선의 비린내도 선명하게 분류할 수 있었다.
번화한 도시 속 모든 생물이 내재한 생명력과 자아내는 변화가 오감을 점령했다. 그럼에도 목표한 하나는 찾을 수 없었다.
술 취해서 뻗었거나 잠깐의 일탈이라면 이걸로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
현경이 생각보다 보잘것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초윤’의 능력을 끌어내지 못하는 건지. 이것도 아니라면 정말 하루 사이에 애가 도시 바깥으로 사라져 버린 건지. 초윤은 후자만은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통행량이 많은 큰길의 한복판에 우뚝 멈춰 서 있었지만 누구와도 어깨가 닿진 않았다. 온통 하얀 행색에 대놓고 칼을 찬 채 죽립까지 썼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감고 있던 눈을 뜬 초윤은 아무것도 없는 등 뒤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익숙한 기척이 인파를 헤치고 다가와 시기 좋게 손을 뻗었다.
“스승님, 이곳에 계셨습니까.”
새파래진 안색에 불안한 눈빛으로 초윤의 팔뚝을 붙드는 사영이었다.
사영은 기척이 희미한 스승을 꽉 잡자마자 갱신된 보고부터 읊었다. 시끌벅적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전음이었다.
[동산의 모든 주루와 기루에 연락을 넣어 보았지만 없다고 합니다. 객잔에 비슷한 인상착의의 사람은 없었는지 재차 연통을 보내고 왔습니다.]
[……천오는?]
[강서단과 함께 근방을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모용 형제도 돕겠다고 했습니다만, 눈에 띌수록 좋을 일은 없으니 일단 거절했습니다.]
정말 어딜 갔을까. 초윤은 면사 아래로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일탈을 하겠다고 멋대로 도시를 벗어나서 모습을 감출 애는 아닌데, 그렇다면 역시 나쁜 가능성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가 후기지수 중에서도 손꼽히는 천보도 임사현을 흔적도 없이 납치할 수 있겠는가. 그것도 정보 단체인 하오문의 코앞에서 대놓고.
[……모용단은 몰라도 모용서라면 독단적으로 행동하고도 남을 것이다. 괜한 일을 벌이지 않도록 조심하는 동시에 너무 배척하진 말거라. 하오문주는 무어라 하더냐.]
[……그것이.]
사영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일그러졌다. 납득 가지 않는 부조리함을 애써 눌러 참고 온 보람이 없었다. 이를 악문 사영이 스승의 면사 뒤 두 눈을 응시하며 짓씹듯 대답했다.
[숨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장은 사정이 있어 일을 크게 벌일 수 없다고, 최소한의 인원과 최저한의 행동만을 허락한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정말 실종인지도 아직 확신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현아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그 사정이 무엇인지는 알려 주겠다 하더냐.]
[그것마저도 당장은 불가능하다 했습니다. ……솔직히 스승님께서 가까이 계시지 않았다면 멱살잡이라도 했을 겁니다.]
[……연유가 명확해지기 전까진 섣불리 적대시하지 말거라.]
[…….]
몇백 화에 걸친 <귀환영웅>의 경험상 하오문주 희가 무언가를 숨기면 반드시 예상치도 못한 좋은 일로 되돌아오곤 했다. 이를 아는 초윤은 희의 비밀스럽고 의심스러운 언행에 별다른 적개심을 느끼진 못했지만, 알 리 없는 사영은 팔 년에 걸친 신뢰가 와르르 무너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타일러도 대답하지 않는 사영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쉰 초윤은 한 손을 들어 사영의 앞에 내밀었다. 이 아이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불현듯 떠오른 방법이 있었다. 무식하게 온 도시에 기감을 펼치는 것보단 나을 듯했다.
[비녀를 다오.]
[예?]
[네 품에 있는 은보요 말이다.]
스승의 말을 들은 사영이 퍼뜩 깨달았다는 듯 품에서 끝이 가느다란 은비녀를 꺼내 양손으로 건넸다. 어깻죽지 선에서 머리카락을 썩둑 자른 뒤로는 습관처럼 갖고만 다닌 지 오래였다.
[사현의 방에 은렴이 남아 있었느냐? 해무당에선 내도록 지니고 있는 듯했다만.]
[아니요,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 아이도 계속 갖고 다녔을 겁니다.]
[잘했다.]
초윤은 손바닥 위에 올라온 비녀를 가만히 쥐고 오돌토돌하게 세공된 문양을 엄지로 문질렀다. 금속 특유의 싸늘한 한기가 체온으로 미지근하게 뭉개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스름한 진동이 느껴졌다. 초윤은 비녀를 들고 내기를 주입하며 떨림이 강해지는 방향을 찾았다. 동굴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처럼 아주 작았던 희망이 점차 형태를 불렸다.
[내도록 지닌 덕을 볼 때가 되었구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오래전에 만들었던 물건이 이제야 쓸모를 보이고 있었다.
◇
아이 셋이 다 장성한 뒤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본래 불귀산맥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다. 실력 있는 무림인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가도 누구 하나 살아 나오지 못하고, 진법가를 데리고 가면 미쳐 죽으며, 각종 설화나 구전의 악랄한 악귀들이 태어난 곳. 태곳적의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그만큼 요괴와 요수의 손아귀에 틀어 잡혀 있는 곳. 산맥 자체가 지닌 힘도 장대해서 이지 없는 식물조차 움직일 수 있는 곳.
이런 데서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을 키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산 밑으로 내려가기엔 ‘초윤’이 너무 유명 인사였고, 다른 산으로 가기엔 불귀산맥의 풍부한 영약과 농도 짙은 영기를 버리기 아까웠다.
다행스럽게도 ‘초윤’은 데리고 온 남매를 방치했을지언정 죽일 마음은 없었던 듯했다. 불귀산맥을 마음껏 돌아다녀도 요괴의 눈에 띄지 않게 해 주는 부적을 남매에게 준 일만 보아도 그랬다.
초윤은 아이들이 갖고 있던 부적, 즉 장신구의 진법을 손봐서 여러 가지 능력을 더 집어넣었고 이를 본 따 천오의 장명쇄까지 만들었다. 천오를 한 번 잃어버린 직후라서 더욱 걱정을 자제할 수 없었다.
그 뒤로 불귀산맥은 세 아이의 앞마당이 되어 버렸다.
[너는 비녀를 받은 반면 사현의 부적은 왜 자연스럽게 쓸 수도 없는 방울인지 궁금하진 않았느냐.]
[그저 갖고 있으면 안전할 줄로만 알았을 뿐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습니다. 현아는 비환이라고 생각했고요.]
[팔찌라면 좀 더 커다란 알로 만들었겠지. 너희 둘의 장신구는 본디 하나다. 방울 달린 비녀를 쪼개어 나눠 준 것이다.]
도로의 인파를 빠져나온 초윤은 장터를 지나고, 주택가를 가로질러 점점 한적해지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반각을 내내 걷고 있었지만 사영은 스승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비녀의 진동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초윤의 뒤로 능숙하게 따라붙었다.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운 초윤은 막힌 길을 피하고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가며 점점 속도를 빨리 했다. 가까워질수록 손으로 전해지는 떨림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뿌리가 같으니 재질 또한 같고, 재질이 같으니 진동수가 같으며, 억지로 갈라 둔 만큼 하나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네 혈연을 중히 여기길 바라며 부러 그리 만들었다.]
[……다른 한쪽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알 수 있는 겁니까?]
[네가 동생을 감시할 것 같아 이르지 않았다.]
만들고서도 아차 싶었던 기능이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다행일 뿐이었다. 그러나 목적지를 향해 서두르는 초윤은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목표하는 곳에서 기척을 감지하지 못하는 자신의 오감이 틀리기만을 바랐다.
[그 외에 내력을 주입한 공격을 한 번 막을 수 있고 정신을 혼란케 하는 사술에도 대항할 수 있는 자질구레한 기능이 있다만…….]
가벼운 발돋움으로 낮은 담을 뛰어넘은 초윤이 모서리를 돌았다. 나비 날개처럼 멀어지는 흰 옷자락을 황급히 뒤쫓던 사영은 우뚝 멈춰 선 초윤의 등에 얼굴을 박을 뻔했다. 정신 사납게 움직이던 모습이 무색하게도 땅에 박힌 듯 굳은 초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사영은 초조함으로 바짝 말라 가는 입술을 축이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스승의 눈을 따라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저절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제는 제 짝을 찾을 줄만 알지, 갖고 있던 이의 행방을 알 순 없다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미향(迷香)이라도 묻혀 두라 할 걸 그랬구나.
나직하게 말을 맺는 초윤의 목소리는 폐가처럼 조용하고 참담하기만 했다.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낡은 집이 즐비한 골목, 나무 썩은 처마 밑에 우두커니 박힌 초윤의 발치에는 망치로 내리친 듯 와그작 우그러진 은제 방울이 버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