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겁이 없는 거야, 생각이 없는 거야?”
“둘 다 아닐까요.”
“형은 몰라도 동생 쪽 머리는 나쁘지 않은 것 같던데, 곱게 자란 놈들이라 그 밑의 노동자들이 무슨 고생을 할지는 염두에 안 두는 건가?”
“남궁세가잖습니까. 단장님이 무슨 부하라도 된 것처럼 명령질해 대는 꼬락서니 보면 답 나옵니다.”
수하와 시답잖은 어조로 불평을 주고받은 남자는 간신히 웃음소리를 내며 제 팔뚝을 주물렀다. 오소소 돋은 소름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채였고, 제멋대로 전투태세에 들어간 심장은 여전히 세차게 뛰었다. 광활한 시야 끝에 걸린 하얀 인영을 마지막으로 눈여겨본 남자는 결국 등을 돌려 기와지붕을 내려왔다. 계월은 그 밑에 일찍부터 웅크려 앉아 있었다.
“그래도 나 아니면 이거 수습 못 할 것 같지?”
“은폐 기물이 아니면 수습 못 하겠죠.”
“……그건 그래. 솔직히 진짜 무서웠다.”
남자는 결국 양손으로 팔을 마구 끌며 몸서리치듯 고개를 저었다.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몸과는 별개로 가려진 입꼬리는 기대감에 치솟았지만 이 열락을 알아채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느꼈냐? 저 인간 기감이 이렇게 쫘악 몸을 훑고 지나가는 거. 뼈고 살이고 내장이고 핏줄이고 할 것 없이 다 만지고 가는 것 같았다니까. 난 진짜 들킨 줄 알았다고. 모르긴 몰라도 반경 삼십 리 안의 무림인들은 다 긴장했을걸.”
“이 기물 덕을 여러모로 보는 것 같습니다. 저번에 짐조 일도 그렇고.”
“그래도 안심은 못 하게 생겼어, 지금. 저 인간까지 여기 있다면 꽤 큰일이야. 그것도 상당히 화난 것 같은데.”
“화가 난 겁니까?”
“제대로 열받은 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열성적으로 찾겠어? 다 큰 어른을 잡아 온 것치곤 수색을 시작한 시기도 너무 빨라. 좀 더 일찍 나와서 저 이상한 방울 쪼가리부터 회수할걸. ……아니다, 직선 경로로 찾아간 걸 봐선 위치를 색출해 낸 방법이 따로 있었겠지? 안 들고 있었던 게 오히려 다행인가?”
남자는 계월의 옆에 주저앉아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죽간과 필통을 꺼내 먹을 묻혔다. 얇은 대나무 쪽 위로 조그만 글씨가 유려하게 적혀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 애들만으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이거. 칠성검 모용단과 천혜지봉 제갈설린까진 몰라도 약선 초윤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계열이 아니야. 동시에 하오문주의 눈도 피해야 하고 남궁영이 숨기고 있는 것도 알아내야 해.”
“……그냥 남궁세가의 마차를 감시하는 임무 아니었습니까? 왜 이런 추가 근무를 해야 합니까?”
“어쨌든 남궁영은 본교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고, 그런 자가 빠른 도움을 요청했으며, 하필이면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기물까지 가진 우리니까.”
“…….”
몸에 딱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고 얼굴에는 거친 자루를 뒤집어쓴 채 목에 밧줄을 두른 차림의 계월이 고개를 푹 숙였다. 표정 하나 볼 수 없었지만 무기력하고 실망스러운 기색이 만연했다.
이를 본체만체하며 붓을 놀리는 남자는 어느새 저잣거리에서 들은 잡가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절벽 위 외줄타기를 좋아하는 천성, 위험천만할수록 흥분하는 본성 때문이었다.
그러다 노래를 뚝 멈춘 남자가 물었다.
“계월아, 그때 약선 초윤이 사천에 데리고 간 게 누구라고 했지?”
“예? 그거 거의 십 년 전 일 아닙니까? 기억 못합니다.”
“사 년 전에도 한 번 얘기 들었잖아. 큰누나 하나랑 남동생 둘이었지? 남자애 하나는 이미 봤고, 나머지 둘 남았으니까…… 약선이 저렇게 서두를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에 없지.”
제자(弟子). 죽간 위에 쓰인 두 글자를 보며 이죽거리던 남자는 곧 그 위로 붓을 눌러 먹칠을 했다. 이 재미난 일을 복지도 배려도 없는 윗선에 냅다 갖다 바칠 순 없었다.
“천보도 임사현의 출신 문파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 맞고?”
“하북팽가 아니었습니까? 결패도 팽치정의 제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결패도를 스승님이라고 안 부른대. 아직도 팽 대협이라 한다던데. 소속도 여전히 하오문이고.”
“예…… 뭐.”
남자가 홀로 무슨 궁리를 하든 초과 근무 생각으로 근심이 가득한 계월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대충 대답했다. 무성의한 응대로도 만족스러운지, 한동안 마구 손목을 놀리던 남자는 다 쓴 죽간을 후후 불어 말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우리 도련님이 부득불 고집을 부려서 잡아 온 천보도 대협을 숨기러 가 보자. 겸사겸사 지원도 좀 요청하고.”
“천보도를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인원이 많아지면 오히려 힘들 것 같은데요. 기절한 사이에 남령산맥으로 들어가면 추격을 따돌리기도 훨씬 쉬울 테고.”
“천보도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지에 따라 다르지. 혹시 모르잖아? 들을 얘기만 듣고 죽일 생각일지도.”
이러면 일이 좀 빨리 끝나려나? 남자가 가볍게 덧붙였다. 귀를 쫑긋 세운 계월이 허둥지둥 기척을 감춰 주는 기물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단장은 이미 저 앞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민간인이 오가는 시가지를 앞에 두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남자는 곧 머리에 뒤집어쓴 자루를 움켜쥐었다. 목에 두른 밧줄을 뜯어내고 탈피하듯 포대를 벗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뒤따라온 수하를 돌아보는 눈에 붉은 동공이 번들거렸고, 흉터가 가로지른 입술은 시원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에는 꼭 싸우다 죽게 됐으면 좋겠네, 계월아. 열심히 하자?”
마교의 별동대, 오운단의 단장 태운이 몰개성을 버리고 하늘 밑으로 자진해 나섰다.
◇
보통 정신을 잃은 사람을 깨워 주는 건 천장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이나, 혹은 뺨을 두드리는 손이었다. 희망적인 상황에선 얼굴에 쏟아지듯 내리쬐는 햇볕이기도 했으며 목소리나 새소리기도 했다.
하지만 임사현은 홀로 퍼드덕 몸을 떨며 발작하듯 일어났다. 등과 얼굴은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일어나는 순간 잊어버린 꿈 때문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경련하는 근육이 아팠으며 차갑게 식은 손발에는 감각이 없었다.
사현은 한동안 이성을 잡지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자신이 심상찮은 곳에 묶여 있단 사실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어?”
대들보에 걸쳐 매달리듯 구속된 양손을 당기자 잘그락, 쇠사슬 소리가 들렸다. 먼지로 텁텁한 공기와 고기 썩는 악취가 풍겨 왔다. 겁을 먹은 사현은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주위를 꼼꼼히 둘러보았지만 폐허 같은 내부 말고는 마땅한 게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누구의 기척도 들리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사현은 무릎을 꿇은 채 황망하게 얼어붙어 있다가, 이곳을 서둘러 나가야겠다 생각하곤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쇠로 된 수갑이나 사슬 따위는 지푸라기 자르듯 끊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호기로운 도전은 곧 더할 나위 없는 충격으로 닥쳐왔다. 사현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사슬을 다시금 당기며 뻣뻣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왜…….”
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 쌓아 온 것은 물론,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무리 없이 감지하고 흡수할 수 있었던 대기 중의 기운조차 막힌 듯 느껴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배워 온 사현에게 ‘세상을 채운 힘을 감지하는 감각’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지닌 오감처럼 익숙하고 당연한 지각능력이었다. 이를 단번에 상실하자 말로 다 할 수 없는 막막함과 당혹감에 숨부터 턱 막혔다. 설마 단전이 부서졌나.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겉보기에 다친 곳은 없었다. 어딘가 아프지도 않았으며 사지와 관절 전부 멀쩡히 움직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내공을 운용할 수 없냐는 말이다.
울컥하고 치미는 마음에 이를 악문 사현은 곧 한숨을 쉬고 다리를 풀어 편히 앉았다. 위로 매달린 손은 피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마음부터 진정시킨 사현은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천천히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누나가 아침이 되도록 일 때문에 바빠서 먼저 서하를 만나고…… 사과랑 약속을 제대로 받아 냈어. 그다음 스승님을 뵈러 갔더니 출타 중이시라고 천오가 알려 줬고, 금방 오실 것 같다 해서 바깥으로 나왔는데 마침 장이 섰어.’
스승님 드릴 광동성 별미와 사제 줄 당과, 누나 줄 주전부리까지 품에 가득 안고 있었던 건 기억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어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사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날아간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애초에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 일이 왜 이렇게 잘 떠오르지 않는지도 이상했다. 먹먹한 머릿속을 헤집는 찰나 하얀 잔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사현은 짧게 침음했다.
아, 그래. 아이를 만났다.
이 도시에 아이야 흔하다지만 눈길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애는 사현의 스승과 똑 닮은 백발을 하고 있었다.
피부와 눈동자를 보아하니 백색증을 타고 난 건 아니었다. 지저분하게 새어 버린 것도 아니었고, 스승님처럼 자연히 갖고 태어난 듯 속눈썹까지 깨끗한 첫눈의 색이었다. 누가 봐도 신기할 법한 광경이었지만 지나가는 이들 중 그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조차 어딘가 세상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가진 스승과 닮은 듯해 더욱 관심이 갔었다.
아이는 보호자도 없이 긴 머리 타래를 늘어트린 채 홀로 도로변에 서 있었다. 사현은 이끌리듯 다가가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