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얼마 지나지 않아 녹슨 경첩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문틀 너머로 들어오는 빛은 없었다. 사현의 눈이 들어온 이의 발에서 다리를 타고 올라가 얼굴에 꽂혔다.
그리고 곧장 고개를 틀어 시선을 돌렸다.
“깨어났니? 누추한 곳에 둬서 미안해. 우리도 쥐 소굴이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지내느라 어쩔 수 없었단다.”
역할 정도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현은 그가 자신의 앞으로 걸어올 때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반사적으로 벌벌 떨리는 손끝과 발끝에 힘을 준 사현이 더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말했다.
“나……나를 왜…… 이곳에.”
“아, 정말 곰팡이 냄새 때문에 숨도 못 쉬겠다니까. 이러니 내가 등 붙이고 잠을 자질 못하지. 이런 곳에서 어떻게 버텨.”
첫 번째 시도는 보기 좋게 무산당했다. 옥리는 대놓고 투덜거리며 짜증스럽게 사현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래전의 허상에 겁을 집어먹은 사현은 덜컥 입을 다물었다가, 꿋꿋하게 다시 물었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등은 축축했지만 이전처럼 쉬이 무너질 생각은 없었다.
“……누구지?”
“내가 묻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였어. 갑자기 사람 얼굴을 보고 기절하다니 상처가 따로 없었단다. 그래서 네가 정신을 잃은 동안 이 당혹감을 해소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보았는데…….”
남궁옥리는 바닥에 옷자락이 닿지 않도록 움켜쥔 뒤 허리를 숙였다. 고집스럽게 시선을 피하는 사현의 얼굴을 쥐고 억지로 돌려 눈을 마주쳤다. 화낼 줄 모르는 이의 적개심이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여다보며 가볍게 웃었다.
“천보도 임사현, 임 소협 맞지?”
“…….”
“체격이 크고, 광동성에 와 있고, 직계 제자급의 모란 매듭에 도를 찬 약관의 사내. 소문이 자자해서 어렵지도 않았단다. 다들 너를 참 좋아하던걸. 이렇게 비범하고 정의로운 강호의 젊은 기둥에게 푸대접을 하게 되다니 가슴이 아파.”
“그런 건 구……궁금하지 않아. 왜 나를…… 이곳에 둔 거지?”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소년과 당신은 도대체 누구고, 왜 이십 년을 건너서 또다시 나를 괴롭히는 거지?
길을 가다 난데없는 칼을 맞아도 이보다 의문스럽진 않을 듯했다. 사현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이를 본 옥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허리를 펴고 팔짱을 낀 뒤 제 할 말만을 이어 갔다.
“난 오랫동안 병을 앓아서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어. 현 무림의 후기지수는커녕 아버님의 얼굴도 보지 못한 지 장장 이십 년이란다. 그래서 아주, 아주…… 궁금했거든. 도대체 네가 어째서 날 보고 그렇게 동요했는지.”
“…….”
“‘아프기 전에 만난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텐데, 너는 그 당시에 고작해야 다섯 살 꼬맹이밖에 되지 않았을 테고 말이야. 그렇지?”
“……난 당신이 누군지 모, 몰라.”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공교롭게도 내가 앓아눕기 전에 만났던 ‘다섯 살 꼬맹이’가 딱 있었지 뭐니.”
심장이 뱃속까지 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도 지금보단 덜 소름 끼칠 것 같았다.
사현은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트리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남궁옥리는 그런 그의 반응을 꼼꼼히 눈에 담고 쐐기를 박듯 말을 계속했다.
“바로 이 광동성에서 벌어진 사단이었어. 난 형님과 함께 제법 괜찮다는 객잔에 머무르고 있었고,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밤이었단다. 그런데…….”
“…….”
“세상에, 쥐새끼가 나온 거야. 깨끗하다고 자부했던 곳에서 이만한 쥐새끼가. 엄청 크지 않니? 못 믿겠지?”
옥리가 손바닥으로 제 허리 언저리를 가리켰다.
“얼마나 커다랗고 조심성 없는 쥐인지, 광과 복도를 바스락거리며 돌아다는 소리가 다 들렸지만 일단 참았어. 길거리를 누비며 썩은 생선이나 뜯어먹는 더러운 놈을 내 손으로 잡을 순 없잖아. 그냥 적당히 나가면 눈감아 주려고 했는데…….”
이 더러운 짐승이 내 방까지 넘보더라고. 남궁옥리가 코웃음을 쳤다.
사현은 어지럽게 뭉개지는 생각 속에서 ‘다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 어떻게 했을지’를 궁리했다. 하지만 자신의 스승은 애초에 이런 작자에게 잡히는 일 따위 없을 듯했고, 잡혀도 날숨 한 번으로 전부 눕힐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니 이길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자라 있던 사제는 언제나 그랬듯 알아서 잘할 게 분명했으며, 누나는…….
그때, 남궁옥리가 사현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고 뒤로 꺾었다. 사현은 속절없이 뒤로 고개를 젖히며 까드득 어금니를 맞물렸다. 옥리는 사현의 턱 밑으로 간사한 목소리를 속살거렸다.
“너지?”
“…….”
“네가 그 애새끼 맞지? 그 지저분하고 추접스러웠던, 벌레만도 못하던 도둑놈.”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살아난 거니? 분명 죽였는데. 목숨을 건진다 해도 인간 구실을 못하도록 해 두었는데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서는. 정말 깜짝 놀랐잖아.”
옥리의 눈이 사현의 건장하고 단단한 몸을 이리저리 훑었다.
“엄청난 기연을 얻었거나, ‘굉장한 영약’이라도 먹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 아니니? 말해 봐. 어느 쪽이야?”
“……모, 모른다고.”
“거짓말하지 마!”
사현이 고집스레 잡아떼자, 옥리의 신발 앞코가 거침없이 사현의 허리에 꽂혔다. 오랫동안 병상에서 지냈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커다란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뒤따르는 기억에 짓눌리는 것보단 차라리 아픈 게 나은 듯했다.
낯익은 얼굴의 인물이 자신을 억압하고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있었다. 현실은 뒤집히듯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과거가 겹쳐 보였다. 눅눅한 무력감으로 온몸이 무거웠다. 남궁옥리는 임사현의 상황을 짐작하지도 못한 채 본인의 화를 쏟아 내며 연신 발길질과 주먹질을 했다.
“말하라고, 말해! 기연도 아니야. 영약을 처먹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 지저분한 거지새끼가 어떻게 이런 몸을 하고, 어떻게 그 위명을 얻어! 나는, 내 인생은 자그마치 십육 년이 날아가 버렸는데 너 따위가! 내가 이뤄 둔 무공도 다 부질없이 변해 버렸는데 너 같은 게! 길거리에서 도둑질이나 일삼던 버러지가!”
그리고 퍼부어지는 폭력 속에서 임사현은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결국 먼저 지친 쪽은 옥리였다. 남궁옥리는 얼얼한 손을 털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의 어린 새끼였으면 이 정도로도 금방 죽어 버렸을 텐데. 너무나도 멀쩡한 사현의 모습을 보니 잔악스러운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제 몸뚱이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만 태도를 되돌릴 차례였다.
한참 뒤, 옥리는 사현을 달래듯 다시 나긋하게 말했다.
“……난 네가 먹은 영약을 알고 싶을 뿐이란다. 도대체 어떤 약이 다 죽어 가던 널 살리고 뼈와 살을 붙여 줬는지 궁금해서 말이지. 이것만 말해 준다면 놓아줄게. 난 더 이상 너를 어떻게 할 힘이 없어. 알잖아.”
“…….”
“그리고 다신 광동성에 들어오지도 않을게. 응? 그러니 말해 봐.”
누구한테 어떤 약을 받았니?
아니면, 어디서 무엇을 발견했니?
집요한 물음이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미동도 없던 사현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남궁옥리는 반색을 하며 재차 허리를 숙여 사현에게 귀를 가져다 댔다. 이 천한 빈민을 살린 약을 알아낸다면 아버지가 그리도 떠받드는 존제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어쩌면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다면 다시 세가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으며 먼지 슬은 무공 없이도 영화를 누릴 수 있다. 태운의 말에 따르면 생각보다 번듯한 후기지수인 듯했지만 어디까지나 좀도둑 출신. 시궁창보다 못한 하오문에 의탁하고 있는 꼴을 보면 뻔하지 않나.
세월을 거치며 바뀐 하오문의 인식을 알 리 없는 옥리는 자신의 미래와 사현의 생애를 제멋대로 넘겨짚으며 단꿈에 젖었다.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어떻게든 주워 담겠답시고 좀 더 가까이, 더 가까이 사현에게 밀착했다.
그러나 사현은 무차별적인 손찌검이 가해질 때부터 오로지 하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 누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둘 사이의 좁은 틈새에서 기묘한 소리가 울렸다. 연골이 으스러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비단이 찢어지는 소음 같기도 했다. 물에 젖은 솜 포대를 뭉개는 소리 같기도 했으며 껍질 얇은 과일이 터지는 소음처럼도 들렸다.
“아아아아악!!”
온 폐허가 다 울리도록 쩌렁쩌렁한 비명을 지른 옥리가 엉덩방아를 찧곤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뺨과 귀를 가린 손 틈새로 붉은 생피가 솟아올랐다. 남궁옥리는 단어도 되지 못하는 괴성을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무참한 고통이 느껴지는 환부를 만지지도 못하는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임사현은 그를 바라보며 입에 물고 있던 살점을 으적으적 씹은 뒤 먼지 쌓인 바닥에 뱉었다. 거북한 쇠 비린내가 구강을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쳐 턱을 적셨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맹세컨대 사현은 비밀스러운 살인을 저지른 적도 없고, 부당한 폭력을 행사한 적도 없으며, 이십 년 짧은 생애 내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궁리라고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순진해 빠졌다고 구박을 먹은 게 엊그제일 정도로 일평생을 수더분하게 살아왔으며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한 경험조차 없었다.
하지만 얼굴 한편이 움푹 팬 남궁옥리를 응시하는 두 눈은 어둠 속에서도 반질반질한 독기를 품고 있었다. 강하기로는 비견할 바 없는 제 스승과, 모질기로는 이길 자 없는 제 누이와, 냉랭하기로는 견줄 곳 없는 제 사제와 똑 닮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