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난생처음 느끼는 끔찍한 통증으로 머리가 다 저렸다. 바람이 빠지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웅크리자 심장 박동에 맞추어 핏줄기가 솟았다. 남궁옥리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사현을 보았다. 사슬로 묶어 둔 그림자 진 거체, 아무리 걷어차고 때려도 꿈쩍 않던 무게에 이어 한 점의 동요도 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받고 있자니 저절로 심장이 경종을 울렸다. 그러나 이미 찌들어 돌이킬 수 없는 인간이 그러하듯, 옥리는 본능의 경고를 무시했다.
“비, 빌어먹을 버러지 새끼가 감히!!”
묶여 있는 건 저쪽, 비호를 받는 건 이쪽이었다. 마교에서 파견한 오운단마저 가까이 있었으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두렵다니. 이 남궁옥리가? 미친 거지새끼가 분수도 모르고 날뛴 일에 겁을 먹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세가의 의원과 마교의 비술을 동원하면 얼굴이야 어떻게든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박주시를 모조리 뒤져서라도 방도를 찾을 것이다. 대남궁세가의 정통한 일원인 내겐 그럴 권력과 자금력과 실행력이 있다.
아픔에 익숙해지자 남궁옥리의 머리가 팽팽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체로 저열한 궁리에 불과했지만 살얼음 같은 평정을 되찾기엔 충분했다. 남궁옥리는 제멋대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휘어잡으며 한 자락 위협조차 되지 못할 비웃음과 함께 말했다.
“내게 이런, 이런 짓을 하고도 네가 무사할 성싶으냐? 내 아버지께서 이를 아신다면 네 친우, 혈육, 동문 할 것 없이 모조리 잡아들일 것이다. 내 살점 한 번 물어뜯은 대가로 너와 친분을 다졌던 모든 이들의 뼈를 발라내게 생겼구나!”
“…….”
“네 알량한 무공과 별호 하나 믿고 이리 덤빈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아아, 그래. 후기지수! 대남궁세가의 앞에서 그따위 같잖은 말이 먹힐 것 같더냐? 말한 김에 물어보자꾸나. 네게 무공을 전수한 건 누구더냐? 어느 촌뜨기가, 무늬만 무림인인 머저리가 너같이 비천한 놈에게 스승이랍시고 별 돼먹지 않은 협잡질을 가르쳤더냐?”
“하하! 하핫, 으하핫!”
어느새 영약에 관한 의문도 잊은 채 모욕만을 퍼붓던 남궁옥리는 되돌아온 사현의 반응에 몸을 굳혔다. 움츠러든 옥리를 두고도 아랑곳 않고 폭소하던 사현은 곧 입 안에 남아 있던 핏물을 모아 퉤 뱉었다. 가시지 않은 웃음기가 입꼬리에 번들거렸다.
“내, 내 친우와 혈육…… 동문을 다 죽이다 못해 스승님까지 건드릴 거라고.”
“건드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전부 능지처참에 요참을 해서 죽일 것이다! 네놈처럼 미친 개새끼에게 나를 건드린 죗값을 받아 내려면 이것도 한참 모자라!”
“그게…… 누, 누군지는 알고?”
참지 못하고 이죽거리던 사현이 이윽고 낄낄 웃기 시작했다. 비아냥거리는 듯하지만 정말 유쾌해 보이기도 하는, 다른 이를 흉내 내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핏줄에 도사린 본성이기도 한 실소였다.
바로 전의 유약한 태도를 봐선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한 자락 불길함이 옥리의 심장을 옥죄었다. 하지만 비대한 자아는 늘 사람의 눈을 가렸고, 남궁옥리는 끝내 태연함을 가장하며 대꾸했다.
“어디 대단하신 연줄이라도 있나 보지? 그래 봤자 남이 먹다 버린 생선으로 연명하던 도둑놈 아니더냐. 네가 내게 저지른 무례를 들으면 다들 고두사죄를 하며 네놈을 버릴 것이다.”
“내 스승님께선 항상…… 자신의 근본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 난 이는, 노력 없이 타고난 배경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어 더 크게 짖는 것이라 하셨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것처럼, 켕기는 이가 언성을 높이는 것처럼…….”
“하! 근본이라 할 것도 없이 전전하는 비렁뱅이나 할 법한 위안이구나. 스승과 같이 빌어먹고 살기라도 했더냐?”
“하지만 당신은 그 출신과 연이 아니면 이야기를 듣지도 않는 것 같으니, 이번만 어울려 주겠어.”
속박된 채 앉아 있던 사현이 다리를 움직여 무릎을 세웠다. 족히 한 자는 될 법한 발이 묵직하게 흙바닥을 딛고 몸을 일으켰다. 옹송그렸던 어깨를 천천히 펴자 단단한 거구에 태산 같은 압박감이 도사렸다. 묶인 이에게 기세로 밀린 옥리가 주춤주춤 더욱 뒤로 물러났다.
“이런 무슨……. 사지 관절에 봉침(封針)을 박아 넣었으니 일어서기는커녕 힘을 주는 것조차 어려울…….”
“당신이 뼈를 발라내겠다고 말한 내 친우는…… 요녕성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야.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섭섭하게 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가 죽으면 가슴에 묻어 두고 집요하게 파헤치겠지.”
요녕성? 여기서 갑자기 저 위에 있는 요녕성이 왜 나와?
옥리는 얼굴을 대차게 일그러뜨렸다. 오운단의 단장 태운은 임사현을 보며 ‘하오문 소속의 주목받는 후기지수, 제1회 삼보대회의 우승자라서 귀찮아질 수 있다’고 했을 뿐 그 이상의 정보를 알려 주지 않았다. 남궁옥리 또한 딱히 궁금하지 않아 묻지 않았다.
요녕성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 하니 곧장 모용세가가 떠오르긴 했지만 하오문과 관계가 있을 리도 없었다. 사현의 말을 허장성세라고 파악한 옥리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질 낮은 조소를 지었다.
“내가 누워 있던 사이 요녕에 개걸왕이라도 생겼더냐? 하북에 있는 개방을 헷갈린 것은 아니고? 빈궁한 거지새끼의 연이라고 해 봤자…….”
“내 혈육은 이미 한 번 봤었지. 네가 오래전 영악하다고 했던 내 누이는 하오문주 직속 강서단(剛誓團)의 단장 임사영이다. 화탕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이들을 놓치지 않고 쌀 한 톨까지 털어 내는 모습이 삼도천 앞에서 죄인을 벗기는 초강대왕 같다 해서 암암리에 보명궁(普明弓)이라 불리는 사람이야. ……본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별호지만.”
“하오문 따위의 일개 무리가 무슨……!”
까드득, 난생처음 들어보는 굉음이 옥리와 사현의 사이를 쪼개고 지나갔다.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옥리는 덜컥 놀라 입을 다물고 사현을 올려다보았다. 임사현은 한 손으로 손목에 채워진 쇠고랑 한쪽을 꽉 쥐고 있었다. 딱딱한 것이 찌그러지듯, 단단한 것이 찢어지듯 귀를 아프게 하는 소음이 조금씩 이어졌다. 까닭을 어림짐작한 옥리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헐떡였다.
“이, 이럴 리가 없어. 금제는…… 단전에 걸어 둔 금제는, 어떻게 맨손으로…….”
“그리고 당신이 함부로 망발을 지껄인 내 스승님은, 감사하게도 내게 백초속단유(百草續斷油)를 발라 가며 키워 주셨는데……. 아, 이래서 내 단전을 부수진 못했구나. 스승님이라면 어떻게든 고쳐 주시겠지.”
속단유라면 터진 살과 근육을 잇는 비전의 영약 아닌가? 강제로 금강불괴(金剛不壞)의 육신을 만들 때 망가진 몸에 발라 낫게 한다는 그 약?
허풍도 작작 부려야지, 이제 와선 허무맹랑한 망상밖에 되지 않는 속설을 입에 담는 꼬락서니를 보자 하니 기가 찼다. 하지만 남궁옥리는 이전에 수준급의 무공을 익혔던 무림인이었고, 그 덕에 아직까지 오감은 일반인보다 예민했으며, 그렇기에 이 어둠 속에서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임사현을 구속했던 무쇠 수갑이 마치 찰흙이라도 된 것처럼 뭉그러지며 뜯겨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내공 하나 담지 않은 사현의 맨손에!
이대로 두면 안 돼. 더는 외면할 수 없는 공포가 엄습했다. 남궁옥리는 사현이 완전히 속박을 벗어나기 직전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그 순간만은 상처의 쓰라림도 잊고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이자를 죽이면 많은 게 귀찮아진다는 경고를 들었지만, 사실 잡아 온 것부터 이미 처지는 위험해졌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머릿속이 표백된 듯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로지 눈앞에 있는 목숨의 위협만을 제거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애검의 끝은 듣기 싫은 쇳소리만을 내며 너무도 쉽게 가로막혔다. 백옥색의 광채를 발하던 검에는 어느새 두꺼운 쇠사슬이 감겨 있었고, 임사현은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사슬을 붙잡아 당겼다. 그러자 검의 반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히 꺾이며 지저분한 흙바닥에 ‘챙강’ 하고 나뒹굴었다. 남궁옥리의 자존심마저 뎅겅 썰려 나갔다.
사현은 아연한 얼굴로 부러진 검을 바라보던 옥리에게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갔다. 얼굴에서 흐른 피가 채 굳지도 않은 남궁옥리는 발작하듯 소스라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임사현의 강인한 손이 옥리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고, 견고한 주먹이 옥리의 뺨 한쪽을 사정없이 연신 내리찍었다.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한 채 광대뼈가 내려앉은 남궁옥리는 꺽꺽거리며 입술 사이로 피와 어금니를 흘렸다. 눈이 뒤집히고 정신은 혼미한 것을 보아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감정에 찬 폭력을 행사한 사현은 천천히 차오르는 흥분을 느꼈다. 작은 알갱이처럼 부스러진 증오심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폐를 부풀렸다. 이대로 이자를 때려죽이면 자신은 더 이상 과거의 일로 고통받지 않을 것 같았다. 속박과 구타에 겁을 먹지도, 괜히 기억을 잊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거라. 나는 너희들이 타인의 고통에 익숙해지길 바라지 않는다.
임사현을 지금의 인물로 있게 해 준 이의 당부가 한 줄기 남은 이성을 붙들었다. 그러면 저는 누군가가 미워 죽이고 싶을 때도, 지독하게 당해 괴로울 때도 그저 참아야 할까요. 속으로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절대적인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 일선(一線)을 넘는 순간, 임사현은 돌이키지 못할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