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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55)화 (155/257)

155화

“계고를 주신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만 전해 주신다면 약선 대협께서도 배알을 허락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약왕산이라면, 제갈세가입니까. 제갈세가가 보호하고 있는 기물은 스승님께서도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섬서성의 기물이 비밀리에 이곳까지 들어왔으리란 가정은 쉬이 하기 어렵고, 제갈세가에서 나온 이야기 또한 없으니 제외해 두셨을 수 있습니다.”

“말마따나 마땅히 제외하고도 남을 가정을 어째서 기어코 고하려 하십니까. 하물며 ‘광동성에 들어왔을지도 모를 물건’이라면, 최소한 이곳에 근본을 둔 하오문을 통해서라도 낭설이 아니란 근거가 지니고 오셔야 순리에 맞습니다. 허나 소가주님과 공자님께선 아무리 보아도 빈손이시군요.”

안광 없이 창백한 눈동자가 모용단의 손에 머물렀다. 무안을 주듯 대놓고 훑어본 뒤 곁에 선 모용서까지 힐긋 곁눈질하고 다시 위로 올라갔다. 시선을 마주칠수록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직감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그 비밀을 스승님과 공유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승님을 뵙는 데에 이토록 거리낌 없을 리 없었고, 이유가 명확히 있는데 네게는 설명할 수 없다는 듯 곤란한 얼굴을 할 리 없었다.

사형이 실종되기 전, 스승님은 자신을 떼어 놓고 누군가를 만나고 왔다. 그리고 그 전날 밤에는 모용단이 갑작스럽고 무례하게 해무당을 찾아와 스승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을 뿐 대화를 주고받을 방법은 많지 않던가. 당장 자신마저도 육성과 전음을 다르게 내뱉을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비딱한 의심이 점차 구체적으로 조립되기 시작했다. 서문천오는 스승이 자신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려 버린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한 채였다. 이대로 모용단의 말을 전하면 이 둘과 스승님의 내밀한 이야기는 겉껍데기도 건드리지 못한 채 차음막 바깥에서 하릴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할 것 같았다. 스승님께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내게도 알려 달라고 빌어 봤자 내쳐질 것 같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정말…….

나는 정말 스승님께 무엇이라는 말인가. 천오는 살짝 울컥했다.

그리고 차마 길바닥에 우두커니 선 채 시간 회귀나 마교에 대한 말을 할 수 없는 형의 난처함을 보다 못한 모용서가 이곳에 기름을 부었다.

“대협과 상의해야 할 문제를 왜 너한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고 허락까지 받아야 해? 너한테는 말 못 하는 이유가 있으니 그냥 얘기나 전하고 꺼지지 그래. 제자가 대수야? 아무것도 모르는 게.”

그리고 이 발언은 방황하던 천오의 이성 끈을 태웠다.

‘천오’의 분노는 절대 요란하지 않았다. 이는 천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전의 시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천오는 누군가를 증오할 만큼 어딘가에 의미를 둘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염라군 주천오가 느낄 수 있는 부정적 감정이라곤 그저 미약한 거슬림과 번거로움, 이는 일을 꼬이게 만든 원인을 제거하고 사태를 수습하면 해결될 감정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 많은 게 뒤바뀐 서문천오 또한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서문천오는 그저 모용서에게 시선을 돌리고, 고요하게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경악과 경멸이 섞여 일그러지는 소년의 표정과 뒤로 피하려는 몸이 보였다. 그러나 천오는 자신이 이 소년보다 빠르리라 확신했다. 이미 한 번 죽이려던 인간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집중하면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지만 서문천오는 달랐다. 천오는 언제부턴가 모든 순간을 자신이 바라는 만큼 늘릴 수 있었으며 이를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스승의 머리카락이 뺨에 스치는 모습을 선명히 기억할 수 있어 편리하게 생각했다. 가만히 내리감기는 촘촘한 속눈썹이나,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때마침 비친 햇빛을 받던 눈동자를 두 눈에 자세히 담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곁에서 헛숨을 삼키며 몸으로 끼어들려 하는 모용단이나, 이를 악물고 검을 잡아 반쯤 뽑는 모용서를 선명하게 지켜보며 누가 먼저 목적을 달성할지 여유롭게 가늠할 수 있는 건 부차적인 기능이었다.

그리고 예상과 다를 바 없이 서문천오의 무덤덤한 악의가 모용서의 목을 붙잡으려는 찰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시야의 바깥에서 천오를 침범하듯 불쑥 밀려 들어오는 하얀 손이 있었다.

초윤은 한계까지 멈춰 둔 천오의 세계에서 홀로 시간을 지닌 것처럼 움직였다. 천오의 시야에 하얀 색채를 퍼트리고 어두운 뇌 내를 마구잡이로 누볐다. 천오는 스승이 이렇게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나타나 자신을 잡아 줄 때마다 매번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 모든 내장이 멈추고 추락하는 기분은 죽음에 가까울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사고가 정지한 와중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하고 외면했던 의문이 다시 한번 움텄다.

스승님이 나를 생각만큼 중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함께한 시간이 스승님에겐 스쳐 지나가는 인연 중 하나라면.

내가 스승님께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분의 다정함은 그저 몸에 밴 습관, 지니고 나온 천성에 불과한가?

나는 이분의 흔한 자선에 구원받고 조형당했는가?

의심하면 안 될 것에 자꾸만 불신이 싹텄다. 내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막으신 것이 아닌가. 내가 일선을 넘는 것을 저어하시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어린아이에게 마음을 쓰신 것이 아닌가.

이제 와 제 손을 쥐고 잡아 내리는 의도마저 다르게 여겨졌다. 언젠가 운해의 절경을 둘이서만 공유했던 일이나, 달밤에 약재 향을 풍기며 제 행복을 기원하던 스승은 형편 좋게 기억에서 물러나 있었다. 의혹에 사로잡힌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편협해지는 법이었다. 대상이 소중하고 마음이 무지근할수록 더욱이.

영리하고 객관적인 서문천오는, 스승이 자신에게 차별화된 뜻을 품었든 품지 않았든 일방적으로 도움과 영향을 받아 왔으니 그저 감사해야만 한다는 사실 정도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제껏 함께한 시간과 스승의 노력을 폄하할 권리 따위, 일방적으로 의존하기만 한 자신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아는 것과는 별개로 자꾸만 모든 게 막막해졌다. 여기까지 와서야 자신이 속에 품고 있었던 거대한 욕구를 자각하게 되었다. 천오는 스승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차라리 스승에게서 꾸중을 듣는다면 좀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제자의 살수(殺手)를 막은 초윤은 천오의 손을 여전히 꽉 잡은 채 아무런 말도 없었다. 다시 한번 간발의 차로 목숨을 건지고 모멸감에 숨이 거칠어진 모용서나, 눈앞에서 천오의 위험성을 목도하고 생각을 고르는 모용단을 앞에 두고 침묵했다. 발언과 전음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장담한 게 무색하게도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한 자락조차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당황스럽고 급박했던 상황의 여파가 한풀 꺾이고 난 뒤 나지막이 꺼낸 말의 첫머리마저 서문천오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남의 동생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죽일 뻔했던 천오는 다시 한번 유치하게 울컥했다가, 이어서 음울해졌다.

“……제자가 폐를 끼쳤구나. 가르침이 부족했던 내 탓이 크다.”

“……아닙니다, 대협. 다짜고짜 전령으로 쓰려 했으니 소협께서 불쾌하셨을 법도 합니다. 더불어 다시금 만나 뵐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말뿐인 사과를 들어 봤자 나아질 건 없겠지.”

초윤은 그제야 곁에 선 천오를 돌아보며 손을 놓았다. 손등으로 가볍게 천오의 팔을 밀며 다른 곳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는 할 얘기도 없다는 듯이, 차음막 바깥에서 기다릴 기회조차 줄 수 없다는 듯이.

“담화가 끝나면 내 쪽에서 찾아갈 테니 사영에게 가 있거라.”

그리고 서문천오는 무릎 꿇고 알려 달라 빌어 보기도 전에 다시 한번 내쳐졌다.

명을 남긴 초윤은 천오를 놓아둔 채 등을 돌렸다. 따라오거라, 동행을 허락하는 말은 천오의 것이 아니었다. 모용단이 미묘한 시선으로 천오를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모용서의 눈은 와 닿지도 않았다. 사박거리는 발소리조차 없이 멀어지는 약향이 느껴졌다. 천오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여전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서문천오에게 필요한 건 사저의 곁이 아니었다.

천오는 처음으로 스승의 분부를 어기기로 했다.

큰일 났다.

초윤은 오랜만에 생각했다.

진짜 정말, 아주 크게 큰일 났다.

여닫이문이 닫히며 문고리가 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집 나갔던 이성이 돌아왔다. 정하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을 숙였고, ‘초윤’의 몸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초윤’이 본의 아닌 사고를 치거나 아예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마다 큰일이 났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만큼은 다른 사람 탓을 할 수도 없이 명명백백 초윤의 잘못이었다. 스스로의 실수에서 비롯된 큰일이었다.

초윤은 마른세수를 하다가 얼굴을 감싸 쥔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힐난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예민해졌다고 해서 애한테 화풀이를 하면 어떡해!!’

아무래도 이건 큰일을 넘어 그냥 망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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