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물론 사람인 이상 완전히 감정을 배제한 채 언제나 아이에게 공평하고 변함없는 태도를 보여 줄 순 없었다. 더군다나 보통 일도 아니고, 키워 낸 아이를 잃어버린 초유의 사태였으니 평상시와 똑같은 게 오히려 이상했다.
몸은 무협지 고수지만 정신은 한없이 일반인에 가까운 초윤은 근 일주일간 펼쳐진 상황에 휩쓸리며 속절없이 녹슬었다. 드라마에서 주워들었던 실종 골든타임은 이미 지난 지 오래였고, 은방울 이후로는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손을 빌린 모두가 점점 지쳐 가는 사이 자신은 철저히 무력하기만 했다. 이번만큼은 이제껏 의존했던 ‘초윤’의 몸도, 은연중에 자부했던 원작의 지식도 도무지 쓸모가 없었다. 더 멀리 파악하고 더 많이 알고 있음 뭐 하나. 공들여 펼친 기감에 걸려드는 기운은 전무하고 이 일의 배후로 추정되는 세력 역시 떠오르지 않는데.
‘보통 무협지는 주인공이 눈 감고 심법만 운용해도 쭉쭉 진행되지 않나.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렇다고 하기엔 모용서도 별다른 성과는 없던데.’
무엇이든 편리하게 흘러가던 소설과 하릴없이 시간만 흐르는 현실의 괴리는 맨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초윤’의 몸과 현경의 정신력이 어느 정도 받쳐 주지 않았다면 정신을 놓고 산발을 한 채 저잣거리를 배회하며 미친 듯이 사현을 찾아다녔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애가 없어진 뒤 사흘은 실성한 듯 살았다. 머릿속에 밀어 넣듯 갑작스럽게 재생된 타인의 기억만 아니었다면 실속 없는 방황을 여태껏 지속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얼굴과 행적을 보이면 안 된다고 경고라도 해 준 건가. 그 당시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 리도 없을 텐데.’
초윤의 제정신을 되찾아 준 것은 이 몸의 주인이 아주 오래전 겪은 듯한 일이었다.
‘사현을 찾는다.’는 목적에만 혈안이 되어 흐려진 정신을 내도록 두드리는 두통이 있었다. 망가진 은렴을 본 뒤로 이성을 잃어버린 초윤은 자신의 이상 증상을 모조리 무시하며 그저 정신없이 도시를 헤집었다. 그러나 세간의 관심에서 초윤을 지켜 주었던 무공은 이제 와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
초윤의 감정에 동화된 사람들이 생겨나며 모두가 연신 초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초윤은 머리카락과 뺨에 닿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곁을 지키던 천오가 흘러내린 흰 머리칼을 묶어 올려 주는 것도, 벗겨진 죽립을 다시 씌워 주는 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하지만 겉모습을 아무리 숨겨 봤자 예민한 이들은 초윤의 존재를 몇 장 밖에서부터 인지했다. 초윤의 불안에 덩달아 흔들리며 두려워했고, 갑자기 나타나 도심을 누비는 비현실적 인물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에 전전긍긍하는 건 천오와 사영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도심의 외곽을 전부 돌고 온 초윤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저잣거리 한복판을 가로지르려 했을 때.
미약한 편두통에 불과하던 통증이 단숨에 뇌를 쪼개듯 파고들었다. 고통에 무딘 몸으로도 버티기 어려워 이를 악물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스승님,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초윤의 눈과 귀에는 전혀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벌어진 사건이 비치고 있었다.
-다……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어요, 형님. 팔십이도, 육십오도 죽었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다들 멀쩡했는데,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생경했다. 어리고 가늘며 정처 없이 요동치는 것이 기껏해야 열다섯 살 남짓한 아이 같았다. 초윤은 차가운 곳에 주저앉아 자신보다 조금 더 큰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옷자락을 절박하게 붙잡은 채 숨어 있었다.
-형님은 갑자기 쓰러지시고, 모두, 그렇게…….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눈동자가 슬그머니 옆을 향했다. 보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시선을 주게 되는 광경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눈두덩이 푹 파인 채 전신의 모든 구멍에서 검은 고름을 줄줄 흘리는 시신 수십 구가 시야 끝에 걸리고, 초윤은 경기를 일으키며 다시금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벼락처럼 내달린 소름에 전신이 경련하듯 떨렸다.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초윤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던 손이 머리에 닿았다.
-아윤, 진정하렴. 무서워할 것 없어. 그나저나…….
그는 허리까지 기른 초윤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고 한 움큼 쥐어 올렸다. 상실감과 공포에 절어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하지 못하는 초윤과 다르게, 그의 목소리는 지독히 태연하다 못해 어딘가 만족스럽게 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황에 빠진 초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도 하얗게 변했구나. 눈이 내린 것 같아. 이래서야 어딜 가든 눈에 띄겠는걸.
초윤은 기겁하며 숨을 삼켰다. 몇 시진을 꼬박 고통에 몸부림치던 동기들의 새어 버린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는데 어째서? 두려운 의문이 엄습했다.
초윤은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급작스럽게 식도를 타고 올라온 액체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코가 꽉 막히는 듯싶더니 인중이 축축해지고, 눈앞 또한 침침하게 흐려졌다. 몇 번이고 깜빡인 뒤 손등으로 닦아내자 그제야 제게 닥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초윤은 죽은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검고 끈끈한 액체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어째서 이제야 죽어 가기 시작했는지. 수많은 물음을 제치고 직감했다.
내 내장이 모조리 녹아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건 아마 이곳에 들어오기 전 교관님이 모두에게 먹으라고 나눠 주신 이상한 단약 때문일 것이다.
아,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십 년을 동고동락했던 친우들이 끔찍한 절규를 내지르며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 가는 모습을, 같이 아파하지도 못한 채 그저 보기만 해야 했던 시간이 너무나 괴로웠다. 믿던 이는 죽은 듯이 혼절해선 미동도 없었고, 자부했던 능력으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모두가 요동치는 것조차 멈춘 방에서 홀로 멍하니 주저앉은 채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놓고 있었던가. 그가, 월량이 뒤늦게 일어나 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면 미쳐 죽었거나 자결하였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게 분명했다.
어쨌든 죽는 건 똑같으니 내 친우들이 느꼈을 통증을 체감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초윤은 불안에 떨었던 방금 전과는 다르게 오히려 안심하며 마음을 놓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증세의 발현이 남들보다 늦은 덕분에 월량과 마지막으로 대화도 나눌 수 있었으니 더 이상 남은 미련도 없었다.
그러나 월량은 여전히 용여했다. 친아우처럼 아끼고 돌보던 초윤이 돌연 이목구비에서 기이한 액을 쏟아 내도 도리어 기다렸다는 듯 흡족히 웃었다. 그는 힘없이 기대는 초윤을 안아 제 무릎에 얹고, 산재한 시체들을 대충 손으로 밀어 치운 뒤 벽에 기대앉았다. 점점 늘어지는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잘 끌어안은 채 말아 쥔 소매로 초윤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다.
점차 혼미해지는 정신 탓에 월량의 매몰찬 행각을 보지 못한 초윤은 그저 안심했다. 자신을 받쳐 주는 팔의 온기, 의지하는 가슴에서 뛰는 심장, 다정한 손길에서 전해지는 배려…….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안온했다.
눈을 감자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와 닿았다. 웃음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월량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침몰하는 의식에 한 글자씩 새기듯 박혔다.
-나는 너를 많이 애중하니 괜찮다만, 나를 제외한 이들은 네 어린 얼굴과 괴이쩍은 머리카락을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앞으로 바깥에 나갈 땐 꼭 가리고 다니렴. 답답하면 내 앞에서만 벗고.
이제부턴 많은 게 달라질 거야. 잘 자.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린 말은 그 뒤로 초윤의 교리가 되었다.
그리고 기억 속 의식이 점멸한 뒤에야 초윤은 제 것이 아닌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듯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우두커니 선 초윤의 감상은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는 건데?
지금 내 애가 없어졌는데 남들한테 머리카락 보여 주기 싫으니까 자중하라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어이가 없는 것과 별개로, 정신이 환기되자 이성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초윤에게 필요한 건 대책 없는 배회가 아니었다. 초윤은 서둘러 사현의 흔적을 찾아야 했고, 이는 냉철한 이성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천오는 길거리에 우두커니 선 스승의 고심이 끝나기만을 묵묵히 기다리며 조심스레 초윤의 면사를 고쳐주었다. 초윤은 그와 동시에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해무당으로 돌아가야겠다.
천오는 언제나와 같이 아무런 이의도 내놓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접근 방법을 달리하면 사현이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초윤은 무협지 속에선 거의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경지의 고수였고,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의 몸에 실망한 적 없었다. 그렇게 확신한 일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아무런 성과를 보이지 않자 애가 닳는 건 당연했다. 초윤은 해무당에 틀어박힌 채 점점 더 기감을 넓히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울었다. 조급증이 심장을 태우고 두려움은 가슴을 물들였다.
그러니 예리하고, 민감하고,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애한테 풀면 어떡하냐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자꾸만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