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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59)화 (159/257)

159화

“……이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물을 알 법한 인물이 공교롭게도 지금 하오문의 울타리 안에 있다.”

“예? 누구입니까?”

“천혜지봉 제갈설린이 여기까지 왔더구나. 너희 둘 다 초면은 아니겠지.”

“제갈 소저가 하오문에 와 있습니까?”

아예 모르고 있었는지 모용서가 입을 떡 벌렸다. 모용단 역시 뜻밖의 일인 듯 내리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신비한 고수 흉내를 내기로 한 초윤은 이제 숨기려는 시늉도 하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꺼냈다.

“그 아이는 몇 년 전 네가 섬서성에 닥칠 중독 사태를 미리 언질 해 주었던 일로 상당히 언짢아했다. 네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내가 개입했을 뿐이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만난 적이 있다만.”

“아, 그때…….”

모용서가 인상을 쓰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때, 주천…… 서문 소협을 마주친 뒤로는 형님께 제 비밀에 관해 말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섬서성을 다시 가지도 못했고요. 당시 만난 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뭐? 제갈설린을 아예 못 만났다고?

그럼 원작 러브라인은 진짜 끝난 거야?

초윤은 조금 아연해졌다. 이를 알 리 없는 모용단은 동생의 부실한 설명을 대신해 말을 이었다.

“저도 그때 잠시 인사를 나눈 이후로는 제갈 소저를 뵌 적이 없습니다. 십여 년 전 약왕산에 잠시 머물며 진법을 배울 당시 제갈 소저는 다섯 살 남짓한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한참 몸이 약해 외부인을 잘 만나지 못할 시기기도 하였고요. 진법에 특출한 재능을 지녔다는 소문을 들어 한 번쯤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습니다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생판 남이 가보에 대해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해 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용서는 회귀 전 어렴풋이 떠돌던 소문을 주워들었을 뿐이었고, 모용단은 십여 년 전 취객이 지껄이는 말을 기억해 뒀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뜸 찾아가서 대대로 지켜 온 기물의 약점을 캐낼 수 있을까. 초윤은 익숙한 난처함을 느꼈다.

“……내가 가서 묻겠다. 너희들은 이만 복귀해서 할 일을 하거라.”

그래, 나는 절맥증까지 고쳐 줬으니 우겨 볼 자격 정도는 있겠지. 빚을 달기 위해 치료해 준 건 아니었지만 어쩌겠어. 사현이를 찾는 데 염치가 걸림돌이라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초윤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곧장 걸음을 옮겼다. 대문을 다시 나가기 전 문득 오른손을 들자, 방의 문이 열리며 면사 달린 죽립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날아든 죽립을 착 붙잡은 초윤은 대충 머리카락을 쥐고 틀어 올렸다. 얼굴을 가려야 하는 면사가 서툴게 날리며 반쯤 뒤집혔다.

초윤은 무딘 손길로 매무새를 정리하고 땅을 접듯 성큼성큼 나아갔다. 초대받아 들어와선 차도 한 잔 대접받지 못한 형제 둘과는 인사도 없이 멀어졌다. 그러나 초윤의 닳아빠진 신경은 이미 그들에게서 완전히 떠나 있었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키운 아이들. 첫 학생, 어쩌면 자식과도 같은 내 새끼들. 아니, 이제는 정말 자식이라고 해야 맞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괴로울 리 없다. 앞으로 몇 년이 더 지난다 해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또 실성할 게 분명하다. 애 손 놓친 부모가 으레 그렇듯 사실은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는다. 발밑에 차이는 그 어떤 것도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머릿속이 이미 스스로를 갉아 먹는 걱정과 후회로 가득해 다른 게 들어설 틈조차 없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아까까지 천오가 서 있던 빈자리뿐.

그래도 사영이 옆에 잘 가 있겠지. 이제껏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말 하나는 들어주던 아이니까. 둘이 함께 있다면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 없어.

미련 가득한 시선을 애써 돌리고 걸어가는 초윤의 발끝은 하오문에서 가장 큰 건물, 주륜각(紂倫閣)을 향하고 있었다.

하오문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갈설린은 꽤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된 업무 탓은 아니었다. 근무처는 하오문주 속하 주륜각 별정부, 직위는 고문(顧問). 허드렛일이나 도맡아 할 것 같았고 이마저도 각오했지만 환경 자체는 생각 이상으로 좋았다. 자그마했지만 개인 사무실도 있었으며, 시비인 수영이와 호위도 곁에서 일을 도와주었다.

평생 남과 협업한 적 없는 금지옥엽에 온실 속 화초인 스스로를 알다 보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영리한 제갈설린은 첫 출근날 자신에게 닥칠 만한 고난을 차곡차곡 목록으로 뽑아 머릿속에 새기며 꿋꿋하게 이겨 내리라 다짐했었다.

개중에는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철저히 무시당하기’도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제갈설린의 예측은 철저히 빗나갔다. 예상한 것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가끔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설 고문님 말씀이 맞았어요! 이쪽의 양의(兩儀)를 잘못 잡은 게 맞더라고요. 그래서 여기를 바로잡아 주고, 이걸 덧대서 그리니 바로 이렇게 따악! 고문님은 정말 천재 같아요!”

넓은 책상 위에 깔아 둔 진법도를 가리키며 열변을 토하는 진법가를 보던 제갈설린은 그린 듯 조용한 미소를 지었다. 속은 이를 득득 갈고 있었지만 겉모습은 어쨌든 얌전하고 담담했다. 이에 신이 난 초보 진법가는 입문자나 할 법한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제갈설린은 세필붓을 들고 십연(十然)과 무리, 수리의 기초에 기반해 차근차근 설명을 쌓아 갔다.

근무 첫날, 하오문에 깔린 진법을 먼저 손보게 된 제갈설린은 전달받은 기밀문서에 빼곡하게 그려진 진법도를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수준이 낮아.’

진법은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지식을 갖춘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술법이었다. 구사할 수 있는 자는 한참 적다 못해 평생 한 번 보기도 어려웠고, 당연하게도 그만큼 단가가 비쌌다.

하지만 이곳은 황금의 바다를 항해한다는 하오문이었다. 섬서성에 자리 잡은 문파 중 가장 부유한 제갈세가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제갈설린마저도 처음 보는 사치품과 기술, 지식들이 넘쳐나는 집단이었다. 이런 곳에서 본거지를 지키는 데 쓴 돈이 적을 리 없었고, 여기저기 찾아보니 이 진법을 설치하는 데에만 금이 궤짝으로 들어갔다는 증거까지 나왔다.

하지만 제갈설린의 눈에는 자꾸만 무언가 거슬렸다. 어설프달까, 조잡하달까,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설린은 이 느낌을 정확한 언어와 까닭으로 정립하기 위해 하오문에 비치된 모든 진법서를 다 가져와 읽었다. 어렴풋이 느낀 불온한 기운을 확신한 지는 오늘로 채 이틀이 되지 않았다.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게 확실해. 교묘하게 포장해서 이게 전부인 것처럼 해 놨어.’

하나하나 뜯어보니 구태여 자질구레하게, 고의로 모순되게 만들어 전체적인 효율을 떨어트린 부분이 드러났다. 그나마도 거금을 받고 만든 하오문의 진법이기에 이 정도지, 진법서는 더욱 가관이었다. 멀쩡히 직진할 수 있는 길을 부러 돌아가라 말해 둔 책을 보고 기가 차다 못해 화가 날 정도였다.

‘그리고 이건 아마…… 우리 세가의 죄악이겠지.’

그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진법가’ 중 대부분은 제갈세가 아니면 소림사 소속이었다. 하지만 소림사는 기문진법보다는 인술진(人術陳)에 주력한 문파였고, 이렇게 적당한 입문서를 엮어 찍어 낼 만한 곳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갈세가뿐이었다.

이 교과서를 통해 배우고 자란 이들이 제갈세가의 정통 진법가는 절대 상대하지 못하도록 수를 써 둔 것마저도 정말 제갈설린의 집안다웠다.

여기까지 파악한 설린은 그제야 자신의 어머니 제갈소서가 왜 그렇게 세가의 어른들을 싫어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오만하고 재수 없는 집단이라 그런가 보다 싶었지만, 당장 ‘책을 낸다.’는 말에 달려 있는 수많은 이권만 생각해도 강직한 제갈소서가 사람을 안 죽인 게 기적인 듯했다. 이 진법서에 찍혀 있는 금시초문의 인장은 또 어디에 설립한 가짜 장원의 문양이며, 이 책을 만든 종이와 장인들은 또 어떻게 구했는가. 도대체 무슨 길로 유통을 하고, 누구에게 이걸 팔아먹어 이득을 취했는가.

백 보 양보해서 세가의 지식을 더러운 방식으로 이용하는 건 넘어간다 쳐도, 눈앞의 진법도는 정말 용서할 수 없었다.

‘돈을 이만큼이나 받아먹었으면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냐…….’

정확히는, 그 금액을 받고 이따위 진법을 설치해 둔 제갈세가의 인물들을 봐줄 수가 없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대량으로 받아들인 하오문은 모든 거래를 서면으로 기록해 남겼다. 종잇값과 보존료로 굉장한 양의 고정적 지출을 감당해야 했지만 희의 주장은 꺾이지 않았다. 덕분에 이 거짓말 같은 진법의 출처를 파헤치던 제갈설린은 ‘금 궤짝’을 지불한 계약서를 찾을 수 있었고, 그곳에 찍힌 선명한 사과꽃 인장을 보게 되었다.

즉 이 난리를 쳐둔 장본인이 자신의 친인척이란 뜻이었다.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 뒤, 설린은 자신에게 진법 관련 도움을 구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을 마냥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없었다. 이들이 평생에 걸쳐 답 없는 문제를 헤매도록 만든 원흉이, 무림의 지식을 독식한 채 기만에 불과한 이익을 취해 온 작자들이 자신의 혈족이라고 생각하니 푹신한 공단좌구가 바늘방석 같았다.

스스로가 나름 현실을 직시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더 깊은 진실을 직면할 때가 온 듯했다. 희는 이를 의도했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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