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하지만 그 이후를 모르겠어. 이제부터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세가가 위험에 처한 것 같아서 왔다고 말씀드렸잖아. 그런데 갑자기 이런 가족애 떨어지는 정보를 알려 주시면…….’
설마 다 구제하지는 못할 수 있으니 꼭 살리고 싶은 몇 명만 생각해 놓으라는 뜻인가? 미리 정을 떼어 놓으라는 의미인가?
제갈설린의 상념이 마구 앞서 나갔다. 그러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기 좋게, 설린의 앞에 앉아 있던 진법가가 불쑥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요, 설 고문님. 고문님은…… 급여를 얼마나 받으세요?”
“네?”
넉살 좋은 여인이 과장된 동작으로 은밀하게 주위를 살폈다. 설린의 개인실이니 둘 이외에는 아무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분히 연극적인 몸짓이었다. 그리고 입 옆에 손바닥을 댄 채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제가 일 년에 은을 스무 냥 받거든요. 이것도 굉장한 금액인데, 설 고문님은 훨씬 더 받으실 거 아녜요. 열심히 배워서 노력하면 그만큼의 연봉이 따라온다 생각해야 의욕이 더 불탈 것 같아서요.”
“아, 아하하!”
불시에 기습당한 제갈설린이 배를 잡고 명랑하게 웃었다. 그러다 곧 정신을 차리고 찔끔 나온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 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버릇없었지요.”
“어휴, 아녜요. 웃으니까 더 근사하신데요.”
“확실히 말씀을 드릴 수 없어서 아쉽네요. 저는 문주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해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라서요. 제게 딸린 식구들을 함께 받아 주신 것으로도 모자라 귀빈관까지 제공해 주셔서 오히려 송구스러울 정도예요.”
“에이, 고문님께서 처음 여기 오셨을 때 문주님이 똑똑히 말씀하셨는걸요. ‘특별히 모셔 온 분이니 각별히 대해 달라.’고요. 그리고 우리 문주님은 연봉 계산에는 확실한 분이에요. 제 평생 문주님만큼 성과금이며 야근 수당까지 착실히 챙겨 주시는 분은 또 없었다니까요.”
“그렇지만…….”
제갈설린은 정중하고 예의 바른 겸양을 내보이기 위해 우아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문득 떠오른 의문에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이 방을 소개해 주셨을 때 조만간 정식 계약서를 들고 오겠다 하셨는데 말이에요. 조금 늦으시는 것 같기도 하네요.”
“아, 그건 문주님이 지금 바쁘셔서 그럴 거예요. 고문님께서 서고에 들어가 계실 때 좀 큰일이 터졌거든요. 주륜각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렇지, 명신각(明辰閣)이나 칠비각(七非閣)은 아주 난리가 났어요. 그쪽 애들은 아예 숙소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다던데.”
“난리요?”
근래 며칠은 세가의 일로 몸과 머리가 고단해 주변을 살필 여유 따위 없었다. 쫓아왔던 약선 대협조차도 찾으러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상하다 느낄 수도 없었고, 그저 당연한 풍경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하오문에서 가장 인원이 많다는 명신각과 가장 비밀스럽다는 칠비각이 동날 정도면 심각한 일 아닌가. 거기에 하오문주까지 바쁘게 굴리는 사태라고 하니 제갈설린의 표정도 덩달아 흐려졌다.
설린이 흥미를 보이자 진법가가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여 앉았다. 그리고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한층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제 동기가 칠비각에 배정돼서 일하고 있거든요. 걔가 나간 지 한 나흘 만에 녹초가 된 채로 돌아왔는데, 세상에나 글쎄…….”
[제갈설린.]
“아악!”
“아이고!”
난데없이 고막을 파고드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제갈설린이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 긴장감을 조성하며 다가오던 진법가도 덩달아 놀라선 곡소리를 내며 의자째로 나동그라졌다. 당황한 제갈설린은 허둥지둥 말을 더듬어 가며 책상을 돌아가 여인을 부축했다.
“죄, 죄송해요. 그게 갑자기.”
[대답하려 애쓰지 않아도 좋다.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야, 약선 대협?”
“설 고문님? 약선 대협이라니요? 약선 초윤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입 밖으로 튀어나간 경악을 들은 진법가가 어리둥절하게 설린을 쳐다보았다. 제갈설린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한 진법가의 반응과 공공연히 쓰이는 무공 기술인 전음을 어렵지 않게 연결해 냈다.
하지만 납득을 했다고 해서 당황이 사그라지진 않았다. 설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진법가의 옷을 털어 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요. 그, 세, 세간에 널리 퍼진 소문에 따르면 약선 대협도 굉장한 진법가라고 하잖아요.”
“헉, 설마 약선 초윤이 광동성 시내를 배회한다는 그 소식을 이미 들으신 건가요?”
“예? 아, 마, 맞아요!”
뭐라고? 제갈설린은 속으로 기절초풍을 했지만 애써 아닌 척 수긍했다. 어설픈 끄덕임에도 상대는 이상한 오해를 한 듯 너스레를 떨며 제 입을 때렸다.
“제가 이렇게 주둥이가 가벼워서 큰일이라니까요. 이번에도 문제 될 일 하기 전에 막아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 그럴 리가요.”
“아니긴요. 제가 또 칠칠맞게 입을 놀리다가 걸려서 징계를 먹을까 봐 배려해 주신 거죠? 유능하신 줄은 진즉 알았는데 속까지 깊고 고우시네.”
“그…… 그런 건 아니에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다. 급한 일이 있어 만나러 왔다만, 이전처럼 무작정 네 사적인 공간을 침범하고 싶진 않아 먼저 말을 걸었다. 선객이 가실 때까지 기다릴 테니 천천히 용건을 다하거라.]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제 거의 다 끝났사옵니다……. 제갈설린은 차마 말로 꺼내지도 못한 채 입 모양으로만 약선의 전음에 대답했다. 기다리겠다는 발언을 지키려는 듯 더 이상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자, 설린은 서둘러 여인에게 진법의 검토를 들먹였다.
하오문 소속답게 사회성이 뛰어나고 눈치가 빠른 진법가는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제갈설린은 깍듯이 인사하고 나가는 여인을 뒤에서 공손히 배웅한 뒤, 문이 닫히자마자 뒤로 휙 돌아섰다. 마음 같아선 곧장 약선 대협을 부르고 싶었지만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지길 기다려야 했다. 설린은 눈을 꼭 감고 주먹을 쥐어 가며 속으로 20을 센 뒤 후다닥 창문가로 달려갔다. 격자로 된 창호를 활짝 열어젖히고 기대감에 상기된 얼굴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높이 솟은 주륜각의 중간층 방에서 아래를 보자, 주먹만 한 사람들이 바쁘게 지상을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는 활엽수 나뭇가지 사이로 연한 죽립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약……!”
약선 대협! 손을 내밀고 소리치려 했지만 이성이 뒤늦게 입을 막았다. 문 앞에 찾아오신 것도 아니고 창 밑에서 전음을 주셨을 정도면 분명 숨겨야 하는 방문일 터였다. 설린은 합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닫고 바람 같은 소리로 초윤을 불렀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그 작은 부름에 약선 초윤이 고개를 들어 설린을 올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호박색 광채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고매한 경지의 약선 초윤이 머리 위 속삭임을 듣지 못할 리는 없었겠지만, 그가 정말 한숨보다도 작은 자신의 소리를 알아채고 반응해 주었다 생각하니 대책 없이 가슴이 설렜다. 발뒤꿈치가 가볍게 들리고, 어쩐지 동동 뛰고 싶어졌다. 설린은 창틀을 꼭 잡은 채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올라오십시오! 들어오셔도 좋사옵니다.”
제갈설린은 자신의 희미한 허락이 공중에 흩어져 사라질까 살짝 고민했다. 하지만 초윤은 곧 고개를 숙이더니, 어떠한 인기척도 없이 설린의 창문 밑에 있는 아래층 지붕까지 훌쩍 솟아올랐다. 순간 펄럭이는 흰 옷자락과 얇은 면사가 제갈설린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활엽수를 헤치고 올라왔는데도 사람의 주목은 무엇 하나 딸려 오지 않았다. 설린 혼자 약선 초윤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잠시 고민이 될 정도였다.
초윤은 안으로 들어서기 전, 설린의 손 바깥쪽 창틀을 쥔 채 첫 마디를 꺼냈다.
“거듭해 말하지만, 미안하구나.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야 마땅하건만 괜한 이목을 받아 봤자 좋을 게 없어 이런 무도한 법을 택했다.”
“아니요! 아니옵니다. 소녀를 다시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아니, 약선 대협을 다시 뵐 수 있게 되어 그저 영광일 뿐이옵니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흰 옷자락에서 오래 달인 탕약 냄새가 묻어 나왔다. 몇 년 전 처음 보았을 적과, 그리고 얼마 전 다시 재회했을 적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정말 늘 한결같으시구나. 제갈설린은 책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약선을 정신없이 바라보다 서둘러 창문을 걸어 잠갔다. 그런 뒤 옷매무새를 빠르게 고치곤 상석을 가리키며 권했다. 사양하는 듯싶었던 초윤은 생각을 돌린 듯 자리에 앉았고, 설린은 그 맞은편 의자를 가까이 끌어 좌정했다.
초윤은 천천히 손을 올려 죽립을 벗었다. 하얀 머리카락 타래가 낭창하게 풀어지며 등과 뺨을 덮었다. 드러난 얼굴에 어쩐지 수심이 깊어 보여, 설린의 심장은 벌써부터 뻐근해졌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도와드릴 수 있다면 온 힘을 다하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다잡은 초윤이 꺼낸 말은 제갈설린에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