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제자가 이곳에서 실종되었다. 칠 일 밤낮을 찾아보았지만 흔적 하나 없더구나. 이에 염치없이 네게 도움을 청하고 싶다.”
“염치가 없다니요! 대협께 구명을 받은 몸이오니 당치도 않사옵니다. 하온데 제 도움이라니…….”
이 또한 방자한 생각이지만 기껏해야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진법, 혹은 달달 외우고 있는 무공 이론에 관한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을 찾는 일이라니, 눈앞에 있는 현경의 고수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을 리 없었다. 하물며 추적과 탐색에 통달한 하오문에서 굳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부탁받은 일을 완수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과 함께, 문득 사건의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설마 약선 초윤이 광동성 시내를 배회한다는 그 소식을 이미 들으신 건가요?
제자를 찾기 위해 도시를 헤매셨구나. 행적이 밝혀지는 일을 꺼리시는 분이, 소문은 신경조차 쓰지 못하실 정도로 절박하게.
초윤의 한마디에 부담감과 안타까움이 한꺼번에 뒤섞인 채 치밀어 올랐다. 설린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뒤, 혼란을 뒤로하고 생산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사라지셨다는 제자분은 얼마 전에 절강성에서 뵈었던 서문 소협이옵니까?”
“아니, 천오의 사형인 임사현이다. 천보도라는 별호로 불렸다더구나. 첫 삼보대회에서 우승한 전적이 있고, 그 뒤로 쭉 하북에서 가르침을 받다가 최근 광동성에 발을 들였다.”
“천보도 소협이라면 익히 들어 왔사옵니다. 설마 그분도 약선 대협의 문하에 계실 줄은…….”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의 걸출한 무공과 양순한 심성에 관한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어 왔다. 약선 대협이 아니고서야 지금 이 무림에 그만한 인재를 키워 낼 자가 있을까. 어쩌면 설마보단 역시나가 어울리는 사실 같았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여전했다. 설린은 급박한 상황에 울컥하는 질투심도 잊고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송구스럽지만, 소녀가 우둔한 탓에 약선 대협의 저의를 아직껏 깨우치지 못하였사옵니다. 소녀는 절맥증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 면구스럽게도 내공을 퍼뜨려 기감을 떨치는 것조차 능숙지 않사옵니다. 부끄럽게도 약선 대협을 돕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리라 사료되옵니다만, 소녀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옵니까?”
“……쾌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에게 고단한 일을 부탁할 생각은 없다. 그저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을 뿐이다만, 네게 큰 실례가 될 수 있어 입에 담기 저어되는구나.”
“심려치 마십시오, 약선 대협.”
설린은 초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꼬리를 잡아채듯 대답했다. 초윤을 직시하는 두 눈에는 굳건한 결단이, 상기된 양 뺨에는 기묘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제갈설린은 탁자 밑으로 떨리는 손을 쥐었다 펴며 계속해 말했다.
“동관의 대지주인 제갈세가 적통으로서, 그리고 대협의 은공으로 인생이 바뀐 개인으로서 결초보은할 의무가 있사옵니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대협께 보탬이 될 수 있어 기쁠 따름이옵고, 혹여 제대로 된 답을 드리지 못하면 어찌해야 할지 걱정될 뿐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서슴지 말아 주십시오.”
“…….”
설린을 지그시 바라보던 초윤은 곧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린은 그가 망설임을 버렸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직감하고 부러 환히 웃었다. 망설이지 않기로 마음먹은 초윤은 곧 입을 열었다. 흘러나오는 말들은 이미 몇 번을 곱씹었는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수도를 나다니는 쥐의 머릿수까지 파악할 정도로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기이할 정도로 흔적이 없더구나. 하오문이 말하길, 도시를 나간 이들 중 짚이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흉수가 이목을 피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겠지만 아직까진 이곳에서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음이다.”
“예, 대협.”
“그렇기에 묻겠다. 너는 네 집안에서 보존하는 기물에 대해 알고 있느냐?”
“제갈세가의 기물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그중에서도 제작법이 소실되었고, 하나밖에 남지 않는 소중한 물건에 대해 아는 게 있더냐.”
초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제갈설린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제갈세가가 수많은 기물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그렇기에 세가는 내부 부지로도 모자라 담장 바깥의 반경 수십 장에 빽빽하게 진으로 채워 두었고, 혈족 사이에도 차등을 두어 접근할 수 있는 기물의 등급을 철저히 관리했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제갈설린의 등급은 삼상(三上)에 불과했다. 제작법이 소실된 채 하나밖에 남지 않은 물건 중에서도 쓸모가 크다고는 할 수 없는 것까지가 제갈설린의 소관이자 한계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현재 제갈세가는 제갈소서가 실권을 잡은 채였고, 제갈설린은 불세출의 천재였다.
아득바득 제자리를 찾기 위해, 무시당하고 업신여김받지 않기 위해 익혀 왔던 것들이 이제야 제 빛을 발하는 기분이었다. 설린은 슬쩍 비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열다섯이 되던 해의 선물로 심침서고(深沈書庫)와 천기고(天機庫)를 요구했사옵니다. 안휘성으로 여정을 떠날 때까지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으니, 다행스럽게도 대협을 실망시켜 드릴 일은 없을 듯하옵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 고맙구나.”
“제갈세가는 많은 기물을 비밀리에 물색하여 지니고 있사옵니다. 대협께선 무엇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것이옵니까?”
가문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소중한 비밀을 판다는 자각은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해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제갈설린은 어머니를 제외한 혈족에게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고, 반항기를 미뤄 온 열일곱 살이었다. 세가의 오만한 작태는 진작부터 신물이 났으며 도울 땐 돕더라도 한 번쯤은 혼쭐이 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설린은 약선 초윤을 전적으로 믿었다. 이 고매한 인물에게 자신은 그저 병아리만도 못한 약자일 텐데도 매번 배려를 받아 왔다. 물음 하나에도 수많은 고민을 담는 자가 세가의 기밀을 여기저기 팔고 다니진 않으리라 확신했다.
이 모든 이유를 넘어, 역시 설린은 약선 초윤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설린의 말을 들은 초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 손을 들어 둥근 잔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사용자의 기척을 은폐하는 기능을 가진 기물이 있는지 묻고 싶다.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로 아담하고, 검은색이며, 달려 있는 바늘로 시간과 반경을 설정할 수 있는 기물을 떠올렸으나 비슷한 구실을 한다면 다른 것이어도 상관없다.”
“성침월구(星針月晷) 말씀이시옵니까? 제갈세가가 지닌 은폐기물 중 가장 특출한 성능을 보이는 물건이옵니다.”
제갈설린은 기쁜 기색으로 새 종이를 가져와 탁자 위에 펼치고 붓을 들었다. 그런 뒤 막힘없이 해시계 모양의 둥그런 기물을 그려 나갔다. 초윤이 어떻게 이 기물을 알고 있는지는 부러 묻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오래 사신 분이니 접하실 기회가 있었겠지. 그나저나 약선 대협을 처음 뵈었을 땐 반대 구도였는데. 가끔 즐거운 마음으로 되짚어 보던 예전의 기억을 생각하자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다른 은폐기물은 사용자 본인만을 감추거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당분간 쓰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성침월구는 불어넣는 내공만 충분하다면 소유자를 중심으로 설정한 구형(球刑) 반경 내의 인원을 전부 세상에서 지워 버린 듯 숨겨 줄 수 있사옵니다.”
“……만일 사현을 숨겨 두고 이것을 발동하였다면, 내가 내 제자를 찾지 못한 이유로 합당하리라 생각하느냐?”
“성침월구는 제갈세가가 오래도록 해명하지 못한 신비이옵니다. 저 역시도 이것을 연구한 적이 있사오나, 설계의 복잡도와 묘리의 난해함이 도저히 손대기 힘들 정도인지라 차마 해체하지 못하고 미뤄 두었사옵니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두 가지 있다.”
설린이 그린 기물 그림에 시선을 고정한 초윤이 붓을 빌려 들었다. 그리고 종이의 한구석에 고상한 필체로 간단한 글을 적어 내려갔다.
“하나, 네가 말한 바에 따르면 성침월구는 제갈세가 내에서도 엄중히 보관되어야 마땅하다. 제갈세가가 기물을 잃어버리고 들썩인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으니 다른 은폐기물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싶다만.”
마교 역시도 온갖 흉악한 기물은 모조리 갖고 있기로 악명이 높지 않더냐. 초윤이 진중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초윤의 말을 듣고 최악의 가설을 떠올린 제갈설린은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순간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아득해졌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설린은 초윤의 의아한 눈빛을 받고서야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그것이…… 소녀가 하오문까지 오게 된 까닭이 따로 있사옵니다. 대협을 다시 한번 만나 뵙고 싶다는 어린 마음도 있었사오나, 실은…….”
“…….”
“실은, 어머니께서 비밀리에 서신을 보내셨사옵니다. ‘세가에 돌아오지 말라’고요.”
만약 제갈세가의 기물이 바꿔치기를 당했거나 유출되어 사라졌다면?
그리고 제갈소서가 이를 뒤늦게 알아챘다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떠 있던 설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직 근거 하나 없는 추측에 불과했지만, 너무나도 아귀가 들어맞는 가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