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무슨 연유로 그리 말씀하셨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세가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고 확신하기도 어렵사옵니다. 이에 관해선 하오문주님께서 알아봐 주시기로 하였으나 며칠째 다망하시다고 들어 기다리는 중이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하오문주는 천보도 임사현의 실종으로 광동성을 탈탈 터느라 바쁜 듯했다. 하오문은 아무래도 약선 대협과 개인적인 친분을 다진 것 같았고, 그렇다면 초윤의 사정을 무시하기 어려울 게 뻔했다. 이만한 위광을 지닌 자와 좋은 연을 이어 가기 위해선 약간의 손해 정도는 감수해야만 했다. 하물며 천보도 임사현은 하오문도가 아니던가.
그 손해가 자신과 가족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지만 제갈설린은 애써 유감을 삼켰다. 어쩌면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을 수도 있었고, 며칠 만에 다른 방향의 실마리를 얻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사건은 약선 초윤의 고심과 자신의 걱정을 일거에 돌파할 변환점이 될 수도 있을 듯했다.
일찍부터 밑천을 다 쓰기로 다짐한 제갈설린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하지만, 약선 대협. 만일 제갈세가의 기물이 비밀리에 빠져나갔다면 당장 조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사옵니다. 최소한 대협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제갈의 물건인지 아닌지는 판별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방법이 있다?”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늘 무슨 일이든 3할을 숨기고 내어 주지 말라는 교육을 받사옵니다.”
세간에 유통시킨 진법서에 함정을 섞어 놓고, 의뢰를 받아 그린 하오문의 방어진에도 본인들만이 알아챌 허점을 넣어둔 점이 그러했다. 지성으로는 인정을 받아도 무력으로는 등한시 당해 온 제갈세가는 타인의 약점을 일찍부터 잡아 두는 일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머리로는 세 걸음 앞을 보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 세가의 어른들이 되뇌는 말을 들으며, 제갈설린은 그들의 신념이 참 저열하게 변질되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제갈세가의 사람들은 혈족에 집착하고, 폐쇄적이며, 기고만장한 경향이 있사옵니다. 그렇기에 무엇을 만들든 친족만은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새겨 두곤 하옵니다.”
“……표식이라.”
“예, 하지만 꼭 두 눈으로 보아야만 분간할 수 있는 문장은 아니옵니다. 도리어 세가의 적통만이 익히는 특수한 진법이 아니고서야 보이지 않고 찾을 수도 없기에 여태껏 기밀을 온존할 수 있었사옵니다.”
그렇게 말한 제갈설린은 품에서 조그만 화리장도를 꺼내 들었다. 언젠가 섬서성에 찾아온 해동의 무역상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구한 물건이었다.
설린은 소매를 걷은 팔 한쪽을 벼루 위에 올렸다. 그리고 화리장도의 칼집을 뽑은 뒤 망설임 없이 팔뚝 안쪽 피부에 날을 세웠다. 그대로 내리긋지 못한 이유는 어느새 자신의 팔을 감싸 쥔 약선 초윤의 한 손 때문이었다.
초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제갈설린을 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적통의 혈액이 있어야 행할 수 있는 진법이더냐.”
“예, 대협. 절맥증을 앓느라 한 톨의 내공도 없었던 때에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미약하게나마 쌓아 둔 내력이 있으니 가능하옵니다. 피를 보는 일이 저어되신다면 다른 방에서 채비를 하고 나오겠사옵니다.”
“아니, 두 번째 문제를 듣고 난 뒤에 하여도 늦지 않을 것 같아 막았다.”
다소 다급히 대답한 초윤은 설린의 옷소매를 고이 내려 준 뒤 다시 붓을 잡았다. 그리고 일찍이 써 둔 글씨 옆에 다른 정리 글을 간결히 적어 내려갔다.
“둘, ‘구형 반경 안 생물체의 인기척을 완전히 지우는’ 기능은 오히려 걸림돌이다. 말했지만, 나는 제자를 찾기 위해 이 도시의 미물까지도 샅샅이 감지해 냈으며 개중 수상쩍을 정도로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장소는 없었다. 시전자 개인이나 동료 한두 명 정도의 좁은 범위만을 숨겼다면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사현까지 감추는 일은 불가능하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사옵니다. 천보도 소협의 바로 곁에서 며칠 내내 꼼짝 않고 버틴 게 아니고서야 힘들겠지요.”
“단서가 있을까 싶어 찾아왔건만 가정부터 틀렸었구나. 괜히 무거운 비밀만 토설하게 만들어 미안하다.”
“아니요, 대협. 그럼에도 시도할 가치는 있사옵니다.”
설린은 어렴풋이 약선 초윤의 주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감히 예상컨대 이는 자신을 우려하는 다정한 심성에서 비롯된 듯했다. 황급하게 설린의 행동을 막으신 것도, 나름의 확신을 갖고 찾아오신 일을 본인의 착각으로 넘기시려는 것도 그리 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꾸준히 은혜를 입어 온 설린으로선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능동적으로 도와야 했다. 설린은 화리장도를 여전히 손에 쥔 채 또박또박 말했다.
“교만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약선 대협께선 진법과 기관에 능숙하시기에 가장 먼저 제갈세가의 기물을 떠올리신 듯하옵니다. 그러나 대협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람의 기척을 감추는 데에는 수많은 방도가 있사옵니다. 무궁무진하지만 금기시되어 온 금술부터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무공까지, 단순히 앉아 생각만으로 넘겨짚자면 끝도 없을 것이옵니다. 하물며 약선 대협을 상대하기로 마음먹은 자들인데, 어쩌면 정말 천보도 소협의 곁에서 꼼짝 않고 버티며 대협께서 광동성을 벗어나시기만을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네 말이 옳다.”
“이런 상황에 ‘제갈세가의 기물’이라는 가능성을 하나 줄이는 것만으로도 제가 진법을 시전할 까닭은 충분하다고 사료되옵니다. 소녀가 대협께 조금이나마 빚을 갚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소녀에게 정 무안하시다면, 곧 생길 생채기를 돌봐 주셨음 하옵니다. 약선 대협께 한 번 더 진맥을 받을 수 있다니 일생에 이만한 영광이 또 없을 것이옵니다.”
부러 장난스럽게 마지막 말을 맺자, 고심이 깊어 보이던 초윤은 이윽고 탈력감 짙은 탄식을 흘렸다. 짤막한 행동에서 묻어나는 허가를 감지한 설린이 활짝 웃고 다시 한번 피부에 칼날을 세웠다.
사실 제갈설린은 이 진법을 쓸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굉장히 감격스러웠다. 절맥증을 타고나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병을 고쳐 주신 은인을 위해 이전에는 시도조차 못하던 진법을 그리게 되다니 마냥 설렜다. 약선 대협이 아시면 철없다 꾸짖으실지도 모르겠지만 뛰는 가슴을 억누를 순 없었다.
자신의 피를 벼루 위에 충분히 떨어트린 설린은 먹을 들었다. 그리고 먹의 모서리를 연당으로 둥글게 문지르며 갈아 냈다. 채 멈추지 않은 피가 팔뚝을 타고 흘러 옷을 적셨으나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제갈설린은 곧 열의 어린 눈으로 애용하는 붓을 들었다. 물 대신 피를 이용하는 진법이니 한 번 시전하고 나면 문방사우를 죄다 버려야 했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벼루 속 액체를 붓 끝에 충분히 머금은 설린은 새로운 종이를 탁자 위에 깔았다. 무림인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절강성의 객잔에서 깨어난 그날 아침부터 부단히 단련해 왔다. 아니, 아주 어렸을 적부터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그저 그동안은 가장 중요한 조각이 빠져 있었을 뿐이고, 이를 채워 넣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뿐이다.
제갈설린은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머릿속 진법 중 하나를 꺼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배고,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는 이유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진법을 완성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제갈세가의 비전심법으로는 현원전단신공, 대천선신공, 소천성공 세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설린이 익힌 내공심법은 그중 어떠한 것도 아니었다.
무공으로 대성을 하기엔 출발선부터 한참 뒤처졌으니, 이제껏 들이파던 분야를 더욱 잘 이용할 궁리를 해야 했다. 내공을 불어넣어 작동시키는 진법과 기물이 많은 만큼, 제갈설린은 빠르게 축기(築氣)를 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선택한 무공은 바로 사공(邪功)이었다. 짧은 시간에 효율적인 성취를 보일 수 있으나 누구도 쉬이 선택하지 않는, 한계가 명확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의지와 양심이 나약하다면 금세 비탈길로 떨어지고 말 간사한 무공. 제갈설린은 이를 열심히 뜯어고쳤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시비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익혔다. 두려움이 없을 리 만무했지만 결과는 명백히 드러났다.
설린은 단전에 자리 잡은 팥알만 한 내공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초윤과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일반인에 불과했던 설린은 이미 내력을 감지하고 받아들이며 유형의 기운으로 압축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직 타통되지 않은 혈맥이 많았지만, 한 올씩 풀어낸 힘을 손가락 너머 붓과 피로 전달할 순 있었다.
제갈설린의 정수가 백지 위 형상으로 나타났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우아한 글씨는 저마다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마땅히 나야만 하는 피비린내 대신 사과꽃의 풋풋한 향이 공기 중을 맴돌았다. 가로 5척, 세로 2척에 달하는 거대한 지면이 일정한 간격과 도형을 그리는 문자로 빽빽이 채워졌다. 비단에 쓸 걸 그랬나. 제갈설린의 유일한 여념은 이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도 알 수 없었다. 한순간인 것 같기도 했고, 꽤 오래 걸린 듯하기도 했다. 마침내 머릿속의 모든 설계도를 쏟아 낸 제갈설린은 멍한 기분으로 허리를 펴 자세를 바로 했다. 덥석 손목이 잡히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곁으로 다가온 약선 초윤이 제 다친 팔뚝에 희고 긴 천을 감아 주고 있었다. 살짝 짧아진 약선의 소매로 미루어 보아 직접 옷깃을 찢어 처치를 해 주시는 듯했다. 벌써부터 낫는 듯한 느낌이 들어, 제갈설린은 반사적으로 웃었다.
그때 희미하게 종이 타는 냄새가 코끝에 닿아 왔다. 설린은 화들짝 놀라 탁자를 돌아보았다. 예술작품에 가까울 정도로 정돈된 글의 나열 사이, 중앙에서 살짝 빗겨나간 공간이 아무런 불씨도 없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약선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제갈설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것은…… 특정한 표식을 인식해서, 시전자의 주위에 제갈세가의 결실이 있다면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진법이옵니다.”
설린의 눈이 빠르게 진법을 훑었다. 하지만 귀신 같은 속독기술과 암기력으로도 오류는 무엇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설린은 차라리 이 현실이 자신의 실수이길 간절히 바라며 말했다.
“약선 대협, 아무래도 제갈세가의 기물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그러니까…… 어쩌면 이 하오문의 담장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