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63)화 (163/257)

163화

발단은 반 시진 전, 초윤이 제갈설린을 찾아갔을 시점으로 돌아간다.

임사영은 일주일 만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대로라면 될 일도 안 된다는 친우의 나직한 충고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멀쩡히 씻고 얌전히 누워 깊은 잠을 자라는 말인가. 무슨 일이든 해결해 주실 것만 같던 스승님마저도 방도를 찾지 못하셨는데, 지금 내 동생이 무슨 꼴에 처했는지도 알 수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일상을 영위하고 나 자신을 돌보라는 말인가. 하다못해 임사현이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던 사건조차 최소한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사영은 아주 오랜만에 무지의 공포를 체감했다. 아주 조그만 실마리라도 얻는다면 이토록 무섭진 않을 텐데. 지난 며칠간 똑같은 생각의 고리만을 맴돌았다.

이에 처음에는 거부했다. 그러면 이 상황에 나보고 욕간이나 하라는 말이냐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점차 무뎌지는 신경은 부정할 수 없었고, 이윽고 도심을 자유롭게 누비는 기본적인 경공조차 흐트러질 지경이 되자 휴식의 필요성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뜨겁게 데운 목욕물은 삼도천의 산수탄(山水灘)이고 푹신하게 깐 이부자리는 철상지옥의 못 침상인데 안정이 가능할 리 없었다. 생산적인 사고를 할 기력마저 남지 않은 임사영은 폐인의 몰골로 천장만을 바라보다 결국 요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사영은 곧장 방에서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을 뒤져 묵직한 자개함을 꺼냈다. 전복의 색패로 조형한 난초와 나비가 화려하게 번쩍거렸다. 소득과 지위에 비해 소박한 개인실에서 유일하게 사치스럽고 엄중한 물건이었다. 굳건히 다물린 자물쇠를 복잡한 순서로 조심스럽게 열고 뚜껑을 젖히자 한순간 머리를 맑게 비워 주는 향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사영은 살짝 숨통이 트인 듯 깊은 한숨을 토하고, 서둘러 상자를 헤집었다. 차곡차곡 쌓인 서신 아래 오랫동안 쟁여 놓은 사영의 보물이 드러났다.

사실 사영에게만 소중한 보배도 아니었다. 당장 한 알만 갖고 나가 경매에 부쳐도 십 년은 먹고살 돈이 들어오는 약선 초윤의 처방약이었다. 이게 이제 와서야 기억나다니 확실히 대가리가 둔해지긴 했구나, 사영은 자조하며 목표한 약을 찾아냈다. 활력을 돋우고 피로는 지우는 선도장원환이었다.

빈속에 먹지 말고 미음이라도 삼켜라 이르셨지만 사영에겐 여유가 없었다. 환약이 들어 있는 죽통을 손바닥에 쏟은 사영은 그대로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 알알이 정성스럽게 싼 얇은 금박과 녹두알만 한 크기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귀한 약을 무작스럽게 어금니로 씹자 약간의 달큼한 맛이 배어 나왔다. 설마 이름처럼 정말 선도(仙桃)라도 다져 넣으신 걸까.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약의 효과는 어김없이 좋은 듯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이기는 약은 없다고, 잠시 가신 줄로만 알았던 조급증이 다시금 허파에 번지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보다, 장위에게 변명을 하려면 수자(水煮)해서 복용하는 탕약도 준비하는 게 좋겠지. 사영은 장위에게 나눠 줄 생각까지 하며 자개함의 구석에서 약첩을 하나 꺼내 쥐었다. 곱게 접힌 첩지에는 단아한 필체로 ‘인왕귀비탕’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사영은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대낮인 탓인지 숙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를 마주쳐도 신경질을 내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대로 지상층의 부엌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하루 종일 운영하는 식당이 따로 있어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옹기에 담겨 있는 물은 말갛기 그지없었다. 약재를 불려 놓고, 찬장에서 먼지 쌓인 약탕기를 꺼내 깨끗이 닦았다. 내내 손이 떨려 혹여나 전부 놓치고 깨트리진 않을까 불안했다. 화로에 불을 올렸을 땐 한 시진이나 약탕을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또 애가 탔고, 달이기 시작했을 땐 그제야 생강 다섯 알과 대추 두 알을 넣는 제재법이 떠올라 이마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스승의 처방인데 그거 몇 알 넣지 못했다고 심히 다를까 싶기도 했다. 하물며 인왕삼(人王蔘)이 들어간 귀비탕 아닌가. 이젠 약탕기를 덮고 있는 첩지 한 귀퉁이만 뜯어 줘도 망극하다며 씹어 먹을 인간들이 쌔고 쌨다.

약탕기의 주둥이에서 실낱같은 김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영은 햇빛 한 줄기가 간신히 들어오는 부엌에 우두커니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정신을 놓았다. 사념이 너무나 많아 도리어 떠오르지 않았다. 적어도 사현의 형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기 전까진 자신이 절대 누워 자지 못하리란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등 뒤로 닫아 두었던 부엌의 문이 열렸다. 틈새로 들어온 대낮의 환한 빛이 어둑한 내부를 길게 비췄다. 사영은 돌아보지 않은 채 뭉툭한 감각으로 간신히 한 마디만을 뱉었다.

“나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고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기껏해야 이 대낮에 속이 출출해 내려온 하오문도겠지, 그렇다면 나를 알겠지, 내가 처한 상황도 알겠지, 재깍 나가 주겠지. 장소와 시기에 기반을 두어 당연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일상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산산이 깨어졌다. 협소한 찬간에 새어 들던 빛이 좁아지며, 동시에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의 동생을 찾아왔는데, 정말 나가?”

누구냐, 하고 일갈할 만큼 사영은 아둔하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기민하게 뒤돌며 어깨를 비틀고 팔꿈치를 올렸다. 손날로 베어 낼 듯 팔을 휘두르자 동여맨 옷소매 안쪽에서 날 선 묵색의 비도들이 튀어나왔다. 으앗, 상대의 긴장감 없는 비명과 함께 날아간 칼날이 줄줄이 문에 박혔다. 여기까지 기척도 없이 들어온 인간에게 먹히리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영은 별다른 경악 없이 다른 손으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으며 한 걸음 성큼 진각을 내딛었다.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깔끔한 일직선을 그었으나 와 닿는 느낌은 없었다. 가볍게 몸을 숙여 피하는 남자의 얼굴을 향해 오른발을 차 올렸다.

“내가 죽으면!”

그 짧은 찰나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그가 냉큼 외치지 않았다면, 사영이 가진 모든 무기가 쉴 틈 없이 쇄도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다음 이어질 말을 예감한 사영은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특하고 대견하다는 듯 웃은 남자가 허리를 펴고 사영의 발목을 잡아 살포시 내려 주었다. 사영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냉랭한 반응도 상관없는지, 남자는 활발한 손짓을 곁들이며 친근하게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약속한 시간 내에 돌아가지 못하면’이지만 어쨌든 그게 그거니까.”

“…….”

“근데 정말 망설이질 않네. 내가 하오문도면 어쩌려고 이렇게 무작정 칼부터 던져? 이거 부하들이 무서워서 단장한테 말 걸 수 있겠어?”

“너처럼 싸가지 없는 새끼는 하오문에 못 들어와.”

“거짓말. 문주부터가 재수 없다는 소문이 신강까지 쫙 퍼져 있는데.”

남자가 낄낄 웃으며 손을 들어 얼굴 옆에 박혀 있는 비도를 뽑았다. 한가로워 보이는 불청객과는 별개로, 사영의 머릿속은 먹물을 끼얹은 것처럼 아득해졌다.

신강?

십만대산, 마교가 있는 곳이 아니던가?

그 많고 많은 곳 중에 하필이면 마교가 사현을 데리고 있다고?

어째서?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호흡이 가빠지고 뇌가 멍해졌다. 사영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 중에 짙게 퍼진 약재 냄새만이 그나마 이성을 붙들어 주었다.

사영은 매서운 눈으로 대낮의 그림자를 꿰뚫고 앞에 선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키가 컸고, 목 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덮인 얇은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상체는 그 위로 별다른 의복을 걸치지 않아 근육의 형상이 전부 드러났지만 하체에는 품이 큰 하의 한 겹을 겹쳐 입고 있었다. 신발은 밑창이 바닥에 분산되어 닿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며, 머리는 짧게 잘라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입술을 내리그은 선명한 흠집과 이질적인 차림. 하오문주 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사영 역시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얼추 파악할 순 있었다.

한 손에 들고 있는 붉은 공단 손가방을 제외한다면 활동성 위주로 입은 것을 보아하니 요직은 아니었다. 하물며 위험부담이 큰 하오문에 단신으로 들어와 사영을 꾀어내고 있으니 심부름꾼, 잘 쳐줘 봤자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공을 배운 적은 없으니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는 알 수 없었고, 겉으로 보이는 무기도 없었다. 정말 그저 사영을 유인하는 역할을 떠맡고 겁도 없이 발을 들인 머저리 같았다.

그러나 납덩어리 같은 경각심이 사영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무지 안심할 수 없었고, 이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남자가 눈앞에 똑똑히 보이고 들리지 않았다면 귀신이라고 치부했을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림인일 게 당연한데도 내공이 감지되지 않았고, 숨을 쉴 게 당연한데도 호흡이 들리지 않았다. 자세를 바꾸는데 옷깃 스치는 바스락 소리마저 나지 않았으며 생명으로서 마땅히 지녀야만 하는 선천지기조차 한 톨도 없었다.

그는 점토로 빚어 가마에 구워 낸 인형처럼 텅 비어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