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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64)화 (164/257)

164화

존재감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약선 초윤도 유심히 집중하다 보면 살아 숨 쉬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팔을 움직이면 흰 소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고, 눈을 밟으면 신발 밑에서 작게 바드득 소리가 들려왔다. 작정하고 기척을 죽인다면야 또 모르겠지만 이 남자처럼 태연히 구는데 이렇게나 조용할 순 없었다. 공간을 도려낸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술수일까. 나는 이 자를 이길 수 있을까. 사영은 검을 쥔 손에 꽉 힘을 주며 한 어절씩 씹어뱉듯 말했다.

“용건이 있다면 쓸데없는 짓 집어치우고 할 일이나 해.”

“그게 사실…… 조금 무서워서 말이지.”

늘 나만 이런 곳에 보낸다니까. 직급 낮으면 서러워서 살겠어? 남자는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며 들고 있던 가방을 열고 내부를 뒤졌다. 작은 손가방에 무엇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 있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한참 들렸다. 어둑한 주방이었지만 붉은색 비단에 자수로 놓인 복(福) 자는 선명히 보였다. 흉한 예견으로 등줄기가 축축해졌다. 보글보글 탕약 끓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사영은 문득 스승을 생각했다. 자그마치 8년 전 밤하늘을 메우던 불길과 쫓아오던 복면인들, 양팔에 흉터를 남긴 상처와 절체절명의 상황에 기적처럼 나타난 초윤을 떠올렸다. 연이어 피멍으로 뒤덮였던 어린 동생과 자신을 죽이려 했던 추악한 자를 기억해 냈다.

이번에도 나와 현아를 구해 주시지 않을까. 스승님은 늘 위급한 순간 우리를 도와주셨으니까, 해결책을 내어 주시지 않을까.

하물며 먼 곳도 아니고 이 하오문의 울타리 안에 함께 계신데, 나는 몰라도 스승님께선 이 자의 기척을 잡아내지 않으셨을까.

남자를 죽이려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선고를 기다려야만 하는 사영은 속절없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한정된 내부를 들추는 일은 그리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찾았다는 남자의 경쾌한 혼잣말이 사영에게 날아와 박혔다. 이윽고 그는 가방 안에서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냈다. 가로로 반 자, 세로로 두 치 정도의 자그마한 호두나무 상자였다.

사영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이 닿기 직전, 남자가 상자를 쥔 손을 냉큼 뺐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고 폭력을 가하려 하자 돌아오는 건 끔찍한 능청뿐이었다.

“손 떠는 것 보니까 불안해서 안 되겠어. 생고생을 해 가며 구한 건데 떨어트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내가 열어 줄 테니까 이리 가까이 와 봐.”

“……알아 둬. 안의 내용물이 무엇이든 너는 내 손에 죽어.”

“광동성에 위명이 자자한 단장님이 죽여 주신다니 기대되네.”

남자, 태운은 정말 기대된다는 듯 밝게 웃었다. 발산할 곳 없는 분노로 온몸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영은 왈딱 뒤집힌 속을 애써 다독이며 그에게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한 자도 되지 않을 거리에 이르자, 태운은 사영에게 다시 상자를 내밀었다. 다른 손의 엄지와 검지로 살구꽃이 양각되어 있는 뚜껑을 살포시 집고 아주 천천히 열었다.

내용물이 다 드러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느껴진 건 희미한 비린내였다. 피 같기도 했고, 생선 같기도 했다. 사영은 상자 안에 있는 것이 생물의 일부분임을 직감하고 그 짧은 시간 동안 가능한 모든 최악의 상상을 했다. 손톱, 어쩌면 손가락, 혓바닥, 귀. 상자의 크기로 보아선 손발은 아니겠다. 자신이 보아 온 온갖 무림의 참사를 떠올리며 스스로의 정신을 억지로 담금질했다. 애초에 이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이 사현의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이 작은 함에 무슨 수로 사현이 잡혀 있음을 증빙하는 물품을 담을 것인가. 사영이 아무리 동생을 아끼고 있기로서니 동생의 손톱과 손가락과 혀와 귀 모양을 세세히 꿰고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영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세상에는 아직 사영이 목격한 적 없는 악의가 무수히 많았고 무한히 깊었다.

상자 안에는 갈색의 눈동자를 지닌 안구 한 쌍이 하얀 명주에 감싸인 채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아.”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사영은 단련된 무림인이었고, 이 정도의 야음을 헤치는 법 따위 일찍이 배워 두었다. 배운 것이 너무나도 많아 도리어 화가 되었다. 사영은 사람마다 홍채에 파인 홈이 다르다는 사실도 어렸을 적에 배웠으며, 동생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를 구분하는 법까지 익혔다. 암기력이 비상한 탓에 사현의 눈동자가 띠고 있던 사분사분한 참나무 껍질 색까지 역시 잊지 않았다.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기억들이 사영의 목을 틀어쥐고 통렬하게 조여 왔다. 사영은 자신이 숨을 헐떡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사시나무 떨듯 더듬더듬 들어 올린 손이 제 것 같지 않았다. 흙바닥에 딛고 선 두 발도, 이 현실을 목도한 눈과 머리도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상황에 처하면 땅으로 꺼지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시간에 박제된 양 지금의 장면에 못 박힌 채 일평생 벗어나지 못할 뿐이었다.

안구는 눈동자의 가장자리까지 핏줄이 돋은 채 충혈되어 있었다. 뒤에는 붉은색의 긴 꼬리가 붙어 있었고, 오래되지 않았는지 안구를 감싼 무명천에 다 마르지 않은 핏물이 비쳤다. 사영은 차마 상자를 받아 들지도 못하고 눈알을 집어 확인하지도 못한 채 신음도 흐느낌도 아닌 괴이쩍은 소리만 연신 흘렸다. 당연하고 간결하며 잔인한 명제가 사영의 뇌리에 문장이 되어 박혔다.

임사현은 더 이상 앞을 보지 못한다.

잃어버린 게 제 눈인 것처럼 시야가 흐려졌다. 토해 낼 곳 없는 감정이 눈물로 턱 밑에 고였다. 그때, 태운이 대뜸 사영의 손에 눈이 든 상자를 떠넘겼다. 발작 같은 경련이 어깨까지 내달렸지만 혼을 뒤흔드는 소름 속에서도 용케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직 최악은 아닐지도 모른다. 차마 포기하지 못한 어리석음이었다.

중요하다는 까닭에 손수 열어 주기까지 한 상자를 냉큼 내맡긴 태운은 손가방을 뒤적이더니 다른 물건을 꺼냈다. 해시계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기물이었다. 그는 여전히 상자 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영을 힐긋힐긋 바라보며 시계의 바늘을 돌렸다. 그런 뒤 내공을 불어넣자, 성침월구의 은폐 반경 안에 들어온 사영이 그의 내력을 감지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아아아악!”

정신을 차렸다기보단 광분의 고삐가 풀렸다는 말이 더욱 어울렸다. 사영의 발악이 비명처럼 울리며 닫혀 있던 주방의 문이 폭발하듯 부서졌다. 양팔을 방어하듯 올리고 몸을 웅크린 태운의 거체가 바깥으로 튕겨지듯 밀려 나왔다. 뒤이어 한 손에는 꽉 닫힌 호두나무 상자를, 다른 한 손에는 손등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검 손잡이를 틀어쥔 사영이 먼지구름 피어오르는 문턱을 넘어 모습을 드러냈다. 뺨은 눈물로 젖어 있었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떨리는 입술을 다물 순 없었다. 무작정 어깨로 남자를 들이받은 탓에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으며 휘몰아친 검풍으로 옷자락이 펄럭였다.

양발로 바닥을 딛고 제동을 걸어 충격을 완화한 흔적이 길게 이어졌다. 태운은 그 끝에서 교차해 들었던 팔을 내리며 기쁜 얼굴을 내보였다.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밝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깜짝 놀랐잖아! 와, 뼈마디가 다 저리네. 별 기대도 안 했는데 역시 약선의 제자인가?”

“……어떻게, 어떻게 이런.”

그러고 보니 스승님이 계셨다. 충격으로 혼미한 넋을 다잡지 못한 사영이 중얼거렸다. 스승님이라면 어떻게든 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이 눈을 잘 보관해 빠르게 갖다드리고, 사현도 어떻게든 찾아내어 함께 데려가면 다시 낫게 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 약으로 될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헛된 바람에 신경이 쏠렸다.

평생을 이성과 냉정으로 중무장하고 살아왔으나 이는 모두 제 유일하고 나약한 혈육을 보호하겠단 강박에서 비롯된 모래성이었다. 기반이 될 이유가 온전치 못하면 사영의 생애 또한 속절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사영을 지켜 주고 이끌어 주던 합리적인 추론과 약삭빠른 눈치 또한 기능을 멈추었다. 사영은 하오문 한복판에서 이토록 큰 소란이 일어났는데도 아무도 확인하러 오지 않고 있다는 이상함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변명을 하자면 네 동생이 우수해서 그래. 걔가 작은 도련님을 족칠 때 몰래 봤는데 정말 장난 아니더라고. 세간에 도는 소문만 들었을 때는 그럴 수 있는 애가 아닌 것 같았는데 말이지. 이래서 남 얘기만 듣고 속단하지 말라고 하는 건가?”

“…….”

“이런, 그렇게 보지 마. 내가 한 거 아니야! 난 전부 지켜만 봤을 뿐이지 직접 마주 보고 만난 적도 없어. 오히려 이상한 곳에 잘못 태어난 탓에 머저리들 명령이나 받고 사는 불쌍한 처지라고. 이번에도 봐. 진부한 대사나 전해 주러 왔다니까?”

사영은 상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행여 나무로 만든 함이 부서지고 안에 든 안구에 흠이라도 갈까 두려워 금세 손아귀를 풀 수밖에 없었다. 가시지 않은 발광과 풀리지 않은 격분을 어깨로 몰아쉬며 삐걱삐걱 사고를 돌렸다.

아직 캐낼 이야기가 많아.

감정에 휩쓸려 모든 걸 망칠 순 없다.

눈앞의 저것을 찢어 죽이지 않기 위해,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의지마저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심력을 다 기울여야만 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주저앉아 통곡할 여유 따윈 없었다. 사영은 저변을 긁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숨만이라도 살리고 싶다면 얌전히 따라오라는 말인가?”

“맞아, 그거야!”

역시 머리 좋네! 태운이 짝짝 박수를 쳤다. 사영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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