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태운은 그에 그치지 않고 박수를 치던 손으로 제 눈을 가리며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자, 천보도 소협은 안타깝게도 시야를 잃었으나, 아직 목숨은 온존하고 계십니다.”
“…….”
“하지만 이를 어쩌나. 그것도 자기 손에 달리진 않았네. 뭐, 그래도 이런 위험천만한 시대에 눈 두 짝 없는 사람쯤이야 흔하잖아? 일단 사는 게 중요하지, 안 그래? 혹시 모르잖아.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더 근사한 무림인이 될 수 있을지도.”
뭐든 자기 누나가 마음을 곱게 먹어 줘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뱉는 말 하나하나가 사영의 머리와 가슴을 벅벅 긁어내렸다. 너무나도 맹렬한 격분이 치밀면 욕설도 독설도 나오지 않았다. 저자를 기둥에 묶어 놓고 한 땀씩 살을 발라내도 지금 느끼는 화를 다 삭일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칼부림을 하기엔 잡혀 있을 사현의 신변이 어찌 될까 두려웠다. 사영은 이미 닳을 대로 닳은 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눈물에 목구멍이 꽉 막혀 목소리를 내기도 어려웠다.
“……내 동생이 ‘족쳤다’는 작은 도련님은 누구지? 마교의 인물인가? 그래서 지금, 이렇게…….”
“천보도 소협이 본교에 피해를 입혀서 복수하는 거냐고? 으음……. 그건 딱히 아닌 것 같은데. 아니다, 맞나?”
턱을 매만지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 인내의 한계를 시험했다. 하지만 몇 차례 말을 나누자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앞머리 사이로 힐긋힐긋 이쪽을 관찰하는 눈에 번들거리는 기대감하며, 고양이가 탁자 모서리에 걸친 사기그릇을 톡톡 치듯 내뱉는 말하며. 지금 이 남자는 사영의 분노를 일부러 돋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것이 함정인지, 혹은 그의 독단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저의를 깨우치고 나니 도리어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사영은 한결 침잠한 목소리로 연이어 물었다.
“‘아닌 것 같은데 맞다.’는 말은, 사현이 간접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뜻인가?”
“피해라고 한다면 그렇기도 해. 근데 그리 중요한 건 아니고, 그보다는 다른 분의 목적에 얻어 탄 복수나 분풀이 같았는데……. 아니, 이런 젠장. 이게 말로만 듣던 하오문의 개수작인가? 심문당하는 것도 아닌데 줄줄 불고 있었잖아?”
일부러 사영의 머리꼭지를 돌릴 만한 소리만 골라서 한 주제에 대단한 유도 심문이라도 당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사영은 손안의 상자를 몇 번이고 고쳐 잡았다.
“사현이 입힌 피해가 너희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면 왜 나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 ‘다른 분’께 대단한 목적이라도 있나 보지? 무엇이든 나 같은 말단을 잡고 늘어지는 것보단 문주님께 가는 편이 훨씬 빠를 텐데.”
“아아, 뭐가 그렇게 궁금한가 했더니. 우리 단장님은 오해를 좀 하고 계신 것 같네.”
사영이 도발에 넘어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태운은 쯧 혀를 차더니 태도를 바꾸어 말했다.
“나야말로 이 험지에 진부한 악당 대사나 전하러 온 말단이야. 먼지 구덩이에 숨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볼 순 있지만 말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나한테서 뭔가를 캐내려고 한들 내 대답은 정해져 있어. ‘명령받은 대로 할 뿐,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정도로.”
“웃기지 마. 그런 새끼가 그 정도의 은폐술과 그 정도의 외공을 익혔다고?”
“높게 봐 줘서 고맙네. 그런데 정말이야. 뭐, 단장님이 조금만 덜 이성적인 사람이라서 앞뒤 안 재고 화끈하게 날 죽이려 들었다면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 이것도 혹시 모르잖아. 내가 당신한테 홀라당 반해서 내부 기밀이고 뭐고 다 갖다 바쳤을지도.”
아쉽다는 듯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저은 태운이 곧 사영에게 다가갔다. 녹슨 칼날처럼 극독을 담은 시선이 피부를 도려내도 별 상관없다는 듯 긴장감 없는 걸음이었다. 태운은 자신을 겨눈 검을 대수롭지 않게 손등으로 치워 내고, 빈손을 내밀며 말했다.
“조건은 두 가지야. 하나, 벌어진 일에 대해 함구할 것. 둘, 아까 얘기했듯 일정 시간 내에 나와 함께 ‘비밀스러운 목적지’까지 도달할 것. 일단 첫 번째를 위해 눈알은 이만 돌려주라. 어차피 갖고 있어 봤자 쓸모도 없잖아.”
이 남자가 길 안내를 해 줄 동료를 한 명만 더 데리고 왔어도 지금보단 나았을 텐데. 사영은 온 신경을 쏟아 충동을 참아야만 했다. 이놈이 그 목적지에 꼭 살아서 도착해야 한다는 말은 없지 않은가.
“……갖고 있어 봤자 아무것도 못 하는 건 네놈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첫 번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니까. 함구해야 하는 범위는 네가 가는 곳과 더불어 천보도 소협에게 벌어진 일까지 전부 포함해서야.”
“아, 어째서인지 알겠군.”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사영은 사나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비웃음을 흉내 냈다.
“나 하나는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오문의 인력이 쏠리는 일은 원치 않나 보지? 모든 문서와 기록이 네놈들을 두고 비열하다 한 이유가 있었어.”
“나는 명령받은 대로 할 뿐이지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이자들은 전력이 부족한 게 틀림없었다. 광동성에 잠입한 소수정예이되, 단체의 힘을 이겨낼 만큼의 저력은 아직 갖추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족을 해하며 겁박할 이유가 없고, 벌써부터 사영의 입을 막을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영은 어떻게든 단서를 남겨야 했다. 이들은 아직 자신과 사현의 진정한 스승이, 이곳에 와 계신 뜻밖의 인물이 누구인지 모를 터. 늦게라도 이곳의 상황을 알아채실 스승님을 위해, 혹시라도 자신이 보복을 마치지 못했을 만약을 위해 대비해야만 했다.
사영은 상자 안의 내용물을 목도하고 정신을 놓았던 사이 태운이 조작했단 물건을 기억해 냈다. 일정 반경 가까이 다가가야만 느껴졌던 태운의 존재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이자는 하오문의 눈을 가리기 위해 특별한 기물을 쓰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지난 며칠간 스승님께서 수색의 성과를 내지 못하신 것도 저것 때문일까.
내 비녀가 과연 저것의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스승님께 위치를 알려 드릴 수 있을까.
스승님께 알려야만 살 수 있다. 스승님께 전해 드려야만 헤쳐 나갈 수 있다. 가슴 속 화마에 뿌려야 할 기름을 머릿속 톱니바퀴에 치덕치덕 발랐다. 감정의 불순물로 삐걱거리던 두뇌가 조금이나마 제 기능을 찾기 시작했다. 동생의 두 눈을 손에 쥐고도 미친 척 화 한번 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오래전부터 믿을 것이라곤 제 알량한 머리밖에 없었는데.
사영은 죽고 싶은 마음으로 검을 검집에 되돌려 넣었다. 스르렁 쇳소리를 내며 다물리는 고동이 사영의 심장에 빗장을 걸었다.
“그래, 좋아. 입 다물고 따라가도록 하지.”
“이렇게 쉽게? 뭐, 떠날 테니 찾지 말라고 글을 남긴다거나 발끝으로 바닥에 몰래 행선지를 쓴다거나 하지 않고?”
“남기게 해 달라고 빌면 들어줄 텐가?”
“아니, 첫 번째 조항에 위배돼서 안 되는걸. 알아줘서 고마워. 납득했다면 이제 이쪽도 얼른 들어줬으면 하는데.”
쓸데없는 소리로 사영의 목숨 같은 시간을 빼앗은 남자는 다시금 생글생글 웃으며 빈손을 흔들었다. 무림인의 혼이라는 검은 놓을 수 있었지만 상자만큼은 정말이지 손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체될수록 괴로운 사람은 사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영은 함을 건네는 손에서 한참 동안 힘을 풀지 못했다. 떨리는 한숨을 마지막으로 계속해 흐르던 눈물이 그쳤다.
고마워. 가볍게 말한 남자가 그 빌어먹을 비단 손가방에 상자를 집어넣었다. 사영은 오래도록 붉은색이 싫어질 것만 같았다. 석죽은 낯으로 모습을 감추는 함을 응시하고 있자, 이제껏 들어온 것 중 가장 잔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렇게 고분고분한 걸 보니 단장님은 아주 똑똑하거나 아주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겠어. 내가 이제껏 봐 온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였는데, 단장님은 명성상 전자일 것 같긴 하단 말이지.”
“…….”
“뭐, 어느 쪽이든 그 겁도 생각도 없는 머저리는 죽을 것 같긴 한데…….”
입 닥치고 길이나 안내해, 사영은 저주하듯 말하려 했다. ‘다른 분’이든, 생각 없는 머저리든 이따위 말 많은 작자를 전령으로 쓰다니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비아냥거리려 했다. 여유 따위 진작부터 없었다. 결단을 내리고 상자도 돌려준 이상 더는 조금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둘을 둘러싸고 있던 세상이 느닷없이 무너졌다.
“단장님!”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울려왔다. 반구 모양의 하늘이 쩌억 갈라지고, 쇳덩어리가 찢어지듯 불쾌한 소음이 양쪽 고막을 거세게 때렸다. 고요하던 광경은 산산이 조각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영은 그제야 이상할 정도로 주위에 사람이 없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기이할 정도로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도,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난생처음 보는 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도 동시에 머리에 내리꽂혔다. 깨어지는 풍경 너머 평소처럼 바쁘게 오가는 하오문도들이 보였다. 갑작스레 나타난 사영과 불청객을 보며 경악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저 멀리서 무섭도록 빠르게 다가오는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구름과 바람인 듯, 안개와 이슬인 듯 어우러지던 기운이라곤 온데간데없었다.
대신에 벼락과 해일을 등에 업은 듯 흉흉한 이는 이제 와 하얀 재액이라 일컬어야 마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