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스승이 나타나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긴 하였으나 이 남자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은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머리도 몸도 얼어붙는 찰나, 다가오는 이를 직감한 태운이 손바닥으로 사영의 가슴팍을 밀쳤다. 불시에 얻어맞은 사영은 뒤로 거칠게 날아가 건물의 외벽에 부딪쳤다. 흉곽을 뒤흔드는 충격으로 흐려지는 시야에 황급하게 돌아서는 태운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굉음이 울려 퍼지며 지축을 흔들었다. 거대한 먼지구름이 대번에 피어올라 눈앞을 가리고, 들이켠 헛숨에 저절로 기침이 터졌다. 난데없는 상황에 휘말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 속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쓰러졌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사영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스승님!”
죽이면 안 돼! 그자만이 실마리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태운에게 경고하듯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를 봐선, 기척을 감춘 채 자신과 저 남자를 지켜보던 이가 있는 듯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발설하는 기미가 보이면 그자는 냉큼 이 자리를 버리고 자취를 감춰 버리리라. 그렇게 된다면 사현을 찾아낼 방법은 정말 영영 사라져 버리리라. 감시자의 존재를 확신한 사영은 손속을 거둬야만 하는 이유조차 외칠 수 없었다. 그저 상대가 알아차려 주기만을 바라며 비명처럼 스승을 부르짖기만 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흙먼지 속에서 한 줄기 얇은 빛이 나타나 둥근 원을 그렸다. 그 궤적을 따라 일어난 돌개바람이 날카롭게 사영의 얼굴을 할퀴었다. 상처는 없었으나 곧 돌풍이 일었다. 바닥을 휘감으며 솟아오른 공기가 흐려진 대기를 거대한 손처럼 떠 내어 하늘 위로 날렸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은 사영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방에 흩뿌려진 핏자국이 그 짧은 사이 오간 수많은 공방(攻防)의 흔적이었다. 실력을 가늠할 수조차 없었던 적은 어느새 초윤에게서 삼 장은 떨어진 곳에 물러나 있었다. 양팔과 어깨는 깊게 베어 쩍 벌어져 있었고, 두터운 허벅지에서 뚝뚝 흐른 피가 바닥에 고였다.
다리를 벌리고 팔을 들어 올린 채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태운이 한순간 휘청였다. 무공이 일천한 하오문도들은 그제야 침입자의 존재를 소리치며 저마다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나름 실력이 있다고 자부하던 무인들은 인파를 헤치고 성큼성큼 걸어 나오다 공동의 한가운데 오연히 서 있는 초윤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얼이 빠진 사영의 콧잔등 위로 빗물이 한 방울 톡 떨어졌다. 어느새 머리 위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꺼내 든 검을 느슨하게 늘어트린 초윤이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좋은 검은 무엇이 묻든 매끄럽게 흘려보낸다고 했던가. 취우의 검신은 태운에게 가차 없는 칼집을 내어놓고도 그저 깨끗하기만 했다. 스승의 진검을 처음 마주한 사영은 초윤의 손날 언저리에서 흔들리는 백색 술을 보았다. 검풍에 감겨 한 차례 나부끼었다 느리게 가라앉는 머리칼을 보았고, 그늘진 눈가에서 깨트린 호박처럼 산란하는 안광을 보았다. 사영은 스승을 따라 태운에게 시선을 옮겼다. 태운은 여전히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맨손이었고, 엉망으로 구겨진 비단 손가방이 산재한 혈흔처럼 그 옆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헐거워진 입구에서 튀어나온 모서리를 보고 퍼뜩 정신을 차린 사영이 소리 높여 외쳤다.
“죽이시면 안 됩니다!”
“흐하하! 제기랄, 진작 대가리 돌은 척 덤빌 걸 그랬지!”
그러나 사영의 도박은 소용이 없었다. 자세를 다잡고 폭소하더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외친 태운이 그대로 초윤에게 달려들었다. 광분하는 네발짐승처럼 손으로 바닥을 짚고 땅을 박찼다. 시꺼먼 거구가 꼿꼿이 선 약선에게 충돌했다. 야만스러운 파동이 묵직하게 퍼지며 자리한 사람들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뒤로 날렸다. 충격파가 가라앉자, 한 손에 든 검으로 태운의 양손을 틀어막은 채 흔들림 없이 힘겨루기를 하는 초윤이 드러났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아연한 공기를 적시기 시작했다.
“미, 미친놈.”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함박웃음을 짓는 태운을 얼핏 본 사영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성, 논리, 합리와 효율로 무장한 사영으로선 지금 벌어지는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말단이면 말단답게 받은 명령이나 이행해야 할 것 아닌가. 당장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도 장담 못할 상황에 무작스럽게 달려드는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거쳐야만 나올 수 있는 판단인가. 벽에 처박힐 때 뒤통수까지 부딪쳤는지 쨍한 두통이 울렸다. 이 짧은 순간에도 태운은 바닥을 나뒹굴어 가며 야수처럼 초윤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초윤은 검의 날이 아닌 몸통으로 그의 팔다리나 허리를 타격하며 어떠한 접촉도 허용치 않았다. 가볍게 휘두르다 못해 그저 갖다 대는 듯 보이는 견제였으나, 태운의 살가죽이 얇은 검신에 닿을 때마다 물 든 항아리를 때리듯 묵직한 공명음이 울렸다. 초윤의 파랑이 내장을 뒤흔들고 뼈를 으스러트려도 아랑곳 않고 기뻐하는 별종인 듯했다.
스승이 사영의 말을 귀담아듣고 손에 사정을 두고 있는 건지, 아니면 치미는 노여움에 저자를 욕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후자는 스승보다는 사영에게 어울리는 이유니 아무래도 전자인 것 같았다. 사영은 이 난제를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며 허겁지겁 바닥에 버려진 비단 주머니로 달려갔다. 이러다간 어느새 몰려든 인파나 나동그라지는 태운의 몸에 눌려 찌그러질 것만 같았다.
초윤의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외곽을 헤치며, 사영은 거추장스럽게 앞길을 막는 이들을 사정없이 치우고 소리쳤다.
“같잖은 무기 들이밀지 말고 비켜! 너희들이 낀다고 해서 뭐라도 될 것 같아? 가서 주륜각에, 아니, 여와 대장이나 모용 자식들이나 불러 와! 아니지, 그냥 꺼져! 너희들은 방해밖에 안 된다고!”
강한 이가 이 자리에 오면 좋은 일인가? 스스로도 무슨 말을 내뱉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우악스럽게 밀려난 이들이 뒤로 넘어지고, 연신 불어오는 비바람에 엉망으로 엉겼다. 목표했던 손가방 앞까지 도달한 사영은 서둘러 주저앉아선 호두나무 상자부터 꺼내 품에 넣었다. 그리고 기물이 들어 있을 주머니를 집어 엉망으로 뒤엉키는 인파의 다리 사이로 던져 넣었다. 감시하고 있을 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고서야 약선 초윤이 우뚝 서 있는 지상으로 나와 저것을 주워가진 못할 터였다.
사현의 눈을 회수하고 은폐기물도 숨긴 사영은 하오문 한복판에 벌어진 전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억수처럼 쏟아붓는 장대비 사이로, 칼 한 자루에 모든 공방이 막힌 태운이 스승님께 얼굴을 들이민 채 무어라 속살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지간히도 무도한 소리였는지 초윤은 검을 든 손의 팔꿈치를 단숨에 뒤로 뺐다. 무게중심이 무너지며 가까워진 태운의 양 손목을 움켜쥐고 빠져나가지 못하게 옭아매었다. 약 냄새만 물씬 배어 있던 흰 손가락에 얼마나 큰 힘이 도사리고 있던 걸까. 미물처럼 틀어 잡힌 뼈대가 어긋나며 끔찍한 소리를 냈다. 곧 비스듬히 기울여 물렸던 칼날은 세로로 날을 세웠으며, 막는 것 없이 텅 빈 태운의 복부를 그대로 가르고 들어갔다. 사영의 눈에만 느리고 선명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아, 큰일 났다. 죽이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사영은 멍하니 생각했다. 태운을 관통하고 등으로 튀어나온 칼날이 곱게 빛났다. 저자가 죽으면 정말 끝나는데. 꿰뚫린 남자가 바르작거리며 손을 내려 환부를 더듬었다. 스승님께 이걸 어떻게 알려드리지. 초윤이 검을 뽑고 태운의 가슴팍을 밀쳤다. 그자가 죽으면 사현이도 죽어요. 저항 없이 날아가 바닥에 쓰러진 태운이 뻣뻣하게 몸을 뒤틀고 기침하며 피를 토했다. 전음을 날려야 할까. 쓰러진 자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는 초윤은 안개 속을 거닐 듯 스산하고 고요했다. 스승님이라면 한 마디로도 모든 전말을 파악해 주시지 않을까. 절명을 고하듯 칼끝이 겨누어지자 태운은 광폭한 웃음을 터트렸다.
[괜한 생각을 할 것 같아서 말해 두는데.]
어딘가 낯익은 여성의 목소리가 사영의 고막을 울렸다.
[‘네 스승님께’ 내공 한 자락이라도 뻗으면 난 내 단장이고 뭐고 곧장 일어나서 이 자리를 뜰 거야.]
이들은 약선 초윤이 임사영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조건은 기억하지? 하나라도 빼먹으면 거래는 파기되는 거야.]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해내라는 말인가?
[도망칠 걱정은 하지 마. 우리가 가진 기물은 네가 버린 저것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고. 봐, 네 스승님도 나는 아직 못 찾았잖아.]
정말 이대로 모든 기회가 무산되는가?
[근데 단장이 저 꼬락서니가 되어 버렸으니 이미 글렀네. 그러게 작작 좀 하지, 미친놈.]
무언가 노력하기도 전에 끝나 버리는가?
“기다려.”
임사영이 작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흙탕물에 젖은 무복이 척척하게 들러붙었다. 어쩌면 이보다 현명한 선택이 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사영이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내린 걸 수도 있었다.
“내가 신호하면 그 빌어먹을 기물인지 뭔지를 써서 어떻게든 해내.”
그러나 더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영은 지혜로운 스승이 제 뜻을 알아주시리라 맹신하기로 했다. 절박한 상황의 눈먼 믿음이 바로 앞에 펼쳐진 가장 간단한 길 주위로 차단막을 내렸다. 내리꽂히는 칼날을 향해 사영이 달려 나갔다. 제 행동이 초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는 애써 외면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