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천오는 어디에 있지?
초윤은 일찍부터 혼란스러웠다. 설린의 진법이 나타내는 곳을 확인하자마자 창문을 통해 뛰쳐 나왔고, 발아래 밟히는 기왓장과 나무가 부서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죽립은 이미 잊고 있었으며, 감정에 어우러진 자연이 제멋대로 기압을 낮추든 말든 상관없었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제갈세가의 기물이 가까이에 있을 뿐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답게, 사현이 이 근방에 잡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한 뒤 행동해도 늦지 않다고 머리로는 이성적인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초윤은 기물과 함께 느껴져서는 안 되는 기척을 감지했다. 하오문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임사영의 기운이 목표하는 방향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그저 악질적인 우연이기만을 바랐지만 초윤이 기대하는 앞날은 늘 좌절되었다. 이제 와선 모든 일이 제 소망과는 정반대로 되리라고 예견해도 될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초윤은 이곳만은 아니기만을 원했던 건물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발견했다. 하오문에 발을 들인 첫날 사영이 직접 소개해 주었던 단체 숙소였다. 미묘하게 풍경이 어긋나는 듯한 일렁임은 사천당가의 극독 보관소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했고, 그곳에 모습을 감춘 무언가가 있으리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남의 진법을 부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기물 또한 진법의 묘리를 새기고 엮어 언제든 쓸 수 있게 만든 물건일 뿐이었다. 설린의 별채에 들어갔던 것처럼 파훼하면 그만. 초윤은 닿으리라 직감한 반경에 들어서자마자 거슬리는 아지랑이를 향해 지강(指罡)을 날렸고, 다소 폭력적인 해결법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적나라하게 나타냈다.
지고한 내공을 결집하여 형태로 빚어낸 칼날이 선연한 이질감을 갈랐다. 작동하던 기물에 과부하를 걸어 사정없이 망가트리고 숨어 있던 광경을 끄집어냈다. 손끝이 찌릿했다. 초윤은 자신의 첫수가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직감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제 눈을 가리던 진법이 깨어지며 드러난 상황이었다.
찾던 이는 어렵지 않게 시야에 들어왔다. 극도로 발달된 시력은 멀리서도 사영의 표정을 선명히 잡아냈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초윤을 올려다보는 뺨에는 물기가 번들거렸고, 채 감추지 못한 그늘이 눈 밑에 고스란히 번져 있었다. 항상 당차고 방어적인 아이가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어 당황하는 찰나, 사영과 마주 보고 서 있던 자가 초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꽉 찬 희열의 웃음을 짓더니 손을 뻗어 사영을 거세게 밀쳤다.
불시에 얻어맞은 사영의 몸은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 숙소 건물의 외벽에 처박혔다. 이를 목격한 초윤이 헛숨을 삼켰다. 제 의지를 따르는 몸이었다면 상스러운 욕설을 외치고도 남을 뻔했다. 벽에 부딪친 사영이 속절없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사영을 공격한 자는 여전히 초윤을 응시하며 이리 오라는 듯 양팔을 벌렸다. 귓가에 울리는 천둥소리가 단순히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탓인지, 아니면 정말 자신이 등에 뇌성을 업고 있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저 내 아이를 공격한, 그리고 사라진 사현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작자가 손가락까지 까딱이는데 못 들어줄 이유도 없다는 난폭한 충동만이 뇌리를 점령했다.
초윤은 처음으로 사람을 해하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다. 무림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무공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것도 없었지만 이 순간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살심만큼은 누구보다도 격렬했다. 검 손잡이를 역수로 고쳐 잡은 초윤은 벼락처럼 남자의 목전에 내리꽂혔다. 취우를 둘러싼 검강이 사납게 휘몰아치며 사방에 흙먼지를 일으켰다.
남자는 육체를 극도로 단련하는 외공(外功)을 익혔는지 그저 양팔을 들어 막는 것만으로도 거세게 덮쳐 오는 검강의 여파를 견뎌 냈다. 살갗보단 쇠에 가까운 경도를 보아 겉에 입은 가죽옷, 혹은 무엇인지 모를 무술의 덕을 보는 듯했다.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렸지만 ‘초윤’은 육신의 감각이 의미를 잃은 경지의 무인이었다. 강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공격은 순전히 ‘초윤’의 몸에 밴 행동이었다.
초윤은 땅에 박힌 검을 부드럽게 뽑아내며 그를 향해 휘둘렀다. 검날에 서린 예리한 기운이 초승달 모양으로 날아가며 남자의 살을 베었다. 견고한 갑주가 벌어지며 피를 튀겼고, 질기고 물기 있는 덩어리를 가르는 감촉이 손끝에서 팔을 타고 머리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초윤의 사고가 멈추었다.
초윤은, 그 속에 있는 정하윤은 현대의 인간이었다. 정하윤의 기준과 가치관은 어디까지나 현대의 문명과 교육을 기초로 둔 결과물이었다. 하윤에게 ‘사람을 해쳐선 안 된다.’는 명제는 너무나도 당연했고, 이는 무림에 떨어져도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하윤은 산을 넘다 산적을 마주쳤을 때도 그들을 상처 입히지 않고 기절시켰다. 녹림왕 백호철을 고문해야만 했을 때도 최대한 고통 없는 방도를 도출해 냈다. 천오에게 검을 가르쳐 줄 때조차 적응을 이유로 외상을 입히진 않았으며, 무력 충돌을 늘 회피하고 경계해 왔다.
즉 정하윤은 이곳에 떨어지고서 십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제대로 된 격투를 벌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무림인의 몸을 빌어 산다고 기고만장해졌던 것일까.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선 안 된다는 윤리를 주입받고 자란 인간이 남 몸뚱이 가르는 감촉을 알게 되었으니 정신이 말짱할 리 없었다. 이 와중에도 이백 년간 무림인으로 살아온 육체는 이리저리 빠지는 남자를 쫓으며 깊은 상흔을 남겼다. 언제나처럼 제어하기 어려운 몸,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자극, 아직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상황. 이토록 지독한 삼위일체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죽이게 되는 것 아닐까. 어렴풋한 불안감이 점차 구체화되는 순간, 모래 먼지 틈새로 사영의 목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스승님!”
초윤은 어지럽게 흩어지던 상념을 잠시나마 붙잡아 누를 수 있었다.
그래, 당장 중요한 건 사영의 상태였다. 그다음으로는 이곳에서 기물의 기운이 느껴진 이유였고, 이 폭력범은 그 뒤에 잡아도 충분했다. 사영의 부상은 그리 큰 것 같진 않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엔 확신할 수 없었다. 결정을 내린 초윤은 검극으로 남자를 밀어 내듯 견제한 뒤 주위로 한 바퀴 가벼운 원을 그렸다. 의도를 따라 일어난 검풍이 부옇게 흐려진 공기를 먼 하늘로 날려 보냈다. 시야가 명확해지자 드러난 남자의 모습은 생각보다도 더욱 끔찍했다. 시뻘건 쇠 비린내가 비워 낸 대기를 금세 채웠다. 자신의 손으로 자아낸 광경을 목도한 초윤이 반사적으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한 줄기 빗방울이 뺨을 스쳤다.
“죽이시면 안 됩니다!”
다시 한번 들려온 사영의 목소리가 초윤의 혼란을 억눌렀지만 아까만큼 효과가 좋진 않았다. 당장 지혈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죽을 것만 같은 상처를 입은 남자가 맥없이 휘청이며 바닥을 짚었다. 그의 몸에서 투두둑 떨어진 핏방울이 바닥에 고였다. 섬뜩한 한기로 뒤늦게 어깨가 떨렸다. 맹세컨대 죽일 생각은 없었다. 죽이고 싶긴 해도, 지금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해도 사람을 상처 입힐 권리는 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은폐기물에 관한 것도 물어보아야 하지 않는가.
그래도 이 정도로 해 놓았으면 더는 쉽게 도발하거나 공격하려 들진 않겠지. 초윤은 경계심 어린 눈을 그에게서 떼지 않으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비틀거리던 남자의 입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웃음소리는, 그리고 이어진 예상치 못한 행동은 초윤의 이성을 잡고 재차 뒤흔들었다.
“흐하하! 제기랄, 진작 대가리 돌은 척 덤빌 걸 그랬지!”
진작, 이라는 말을 곱씹을 시간은 없었다. 남자는 바닥을 박차고 흉포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산적들을 쓰러트릴 때 했던 것처럼 마비독을 써서 멈추자니 언제부턴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공기를 적셨다. 호흡에 독기를 실어 날리는 방법을 쓰기엔 어려운 환경이었다.
초윤에게만 난처한 공방이 연달아 이어졌다. 날붙이만큼 흉악한 맨손보다, 찢어지게 웃으며 드러나는 송곳니보다 자기 자신이 두려웠다. 근육이 뭉개져도, 뼈가 조각나도 남자는 마냥 행복한 듯 즐거워하기만 했다. 그의 공격을 막고 쳐낼 때마다 검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이 몸서리 끼치게 낯설고 역했다. 아무리 나뒹굴어도 지독하게 달라붙어 오는 남자를 떨쳐 내기 위해 점점 강한 힘을 실어야만 했다. 그럴수록 초윤은 매번 자신이 정말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저돌적인 공격을 멈추었을 때, 초윤은 그의 양손을 검 한 자루로 틀어막고 있었다. 미적지근한 대치가 이어지자 점점 더 초조해졌다. 이제 그만할 생각이 든 걸까. 정말 이대로 죽기 전에 치료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사영이는 멀리 떨어지는 줄 알았더니 왜 저곳에 망연히 앉아 있을까. 사영에게 가라고 해 두었던 천오는 어디에 있을까. 조각난 상념들이 저마다의 비중을 지닌 채 수면 위로 연신 떠올랐다.
제 생각에 휘말려 미묘하게 변질되는 적을 즉각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새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초윤을 응시하는 태운의 시선은 지겨운 권태에 절어 있었다. 그는 상대에게 생사결전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무게중심을 초윤에게 자발적으로 기울였다. 모조리 받아 줄 생각도, 칼같이 밀쳐 낼 생각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얼굴이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