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나를 갖고 놀아 주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네.”
그러고 보니 암존도 봉인했다고만 했지 죽였다고는 안 했던가. 태운이 흉 진 입술을 끌어 올리며 킬킬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여 초윤의 흔들림 없는 표정을 낱낱이 관찰했다.
“이상하단 말이지. 입과 눈이 따로 노는 거 같아. 입술은 나를 같잖아하는데, 눈동자는 나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내가 두려울 이유가 어디 있어?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버러지잖아.”
“사현은 어디에 있고, 사영에겐 무슨 일로 접근했지?”
“그런 걸 묻고 싶다면 내 사지 중 하나는 날려 놓고 시작해야 하지 않아? 아니면 엄청 고통스러운 독을 주입한다든가, 전신의 뼈를 다 부러트려 놓은 뒤에 치료해 주기를 반복한다든가. 이런 일을 할 줄 아니까 약선인 거잖아.”
끔찍한 이야기를 하며 입맛을 다시는 작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이 피폐해 보이지 않으니 낭탕근을 쓸 수도 없고, 멀쩡한 사람을 상대로 고문을 가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차라리 잡아다 희에게 넘겨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것 또한 상해 방조겠지만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않나. 이제껏 배워 온 도리와 정면으로 충돌한 초윤은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합리화했다. 이마저도 사영이 제 눈앞에서 팽개쳐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목소리를 내리깐 태운이 초윤의 머릿속을 고스란히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은밀하게 속살거렸다.
“이봐, 약선 대협. 당신 사람 죽여 본 적 없지?”
“…….”
“뭐, 이 바닥에 살면서 그럴 리는 없지만. 설마 정말 등선이라도 할 생각이야? 그걸 위해서 덕이라도 쌓고 있는 건가? 베풀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인내하다 보면 선계의 입장권이라도 받나?”
그럴 리가. 초윤은 그저 각인된 신념과 학습된 진리를 따를 뿐이었다. 본인의 도덕적 지향점이 높다는 생각도 딱히 한 적 없었다. 정하윤은 보편적인 윤리관을 가진 인간이었다. 정말 평범한 사실 아닌가.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화가 난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폭력을 가해선 안 된다. 특히나 애들 앞이라면 더욱이.
물론 이런 세계관에선 지극히 이루기 힘든 일이었지만 초윤에겐 현경의 육체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거뜬히 해내는 힘을 지닌 덕분에 여태까지 닥쳐온 모든 고난을 원만히 회피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 피도 흘린 적 없었으니, 아이들에게 똑같은 신조를 가르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 이제야 알겠어. 우리 약선 대협은 선량하고 고결하셨던 거야. 설마 제자들도 그렇게 가르쳤나? 아하! 그래서 천보도 임사현이 제대로 된 반격 하나 못하고 처맞기만 했던 거구나! 그러다 무심코 한 대 먹이게 되니까 애가 얼이 빠져선 멍청한 짓이나 해 댄 거고.”
맹세컨대 평온한 시절이 이런 식으로 독이 될 줄은 결코 몰랐다.
“하지만 약선 대협께는 기나긴 세월 중 잠깐 맡아 키우게 된 애새끼 몇이 죽어 나간들 절대 훼손할 수 없는 고상한 이념이 있으신 거잖아. 무식하고 야만적인 다른 무림인들과는 다르게 인의를 지킬 줄 아는 거지. 소신을 이어 나갈 실력도 있으니 별다른 걱정도 없고?”
내가 정말 틀린 건가. 애써 묻어 두었던 불신이 도화선이 되어 타올랐다.
“안타깝다, 이거. 천보도 소협만 불쌍하게 됐잖아. 애가 이것저것 다 뭉개지고선 정신이 나갔는지 스승님, 스승님 염불만 외우고 있던데, 정작 그 스승이란 사람은 자기 손 더러워지는 게 싫어서 칼질도 제대로 못 하고 있네.”
솔직히, 초윤은 이 뒤에 벌어진 일을 잘 기억할 수 없었다.
이 징그럽고 끔찍한 상대가 가증스럽게 울먹이며 조롱하던 것까진 어렴풋이 들려왔다. 내가 왜 이 위험천만한 일을 받아들였는지 알아? 그 어두침침한 곳에서 미친 애나 돌보고 있으려니 영 찝찝하더라고. 아, 혀랑 목은 아직 멀쩡해서 말은 잘하거든. 애가 버티기 어려우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같은 소리만 중얼거리던데 듣기만 하는 입장에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원. 스승님이 곧 오실 거야. 누나가 나를 찾아낼 거라고. 스승님이 나를 낫게 해 주실 거야. 스승님, 누나……. 대충 이런 소리 말야. 태연한 말을 끝으로 이지가 무너졌다. 고개를 내려 보니 쥐고 있던 검이 절반 이상 그의 뱃가죽을 뚫고 푹 파묻혀 있었다. 귓가에 울리는 이명은 갈피를 잡지 못한 숨이었고, 온몸을 전율시킨 한기는 내장에 파고든 감정이었다. 검신을 타고 울컥울컥 흐른 피가 코등이에 고인 뒤 손가락을 적셨다. 당혹인지 희열인지 모를 낯짝의 남자가 몸에 박힌 칼날을 더듬거렸다.
초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밀어 냈다. 저항 없이 날아간 남자가 바닥에 처박혔다. 내상을 입은 채 충격을 받자 피 섞인 기침을 터트렸다. 분명 두 눈으로 이 광경을 직접 바라보고 있는데도 현실감이 없었다. 기이한 부유감이 느껴졌다. 검병을 잡은 손의 미끈거리는 감촉도, 피비린내에 무뎌진 코끝과 한 걸음씩 다가가는 두 발도 분명히 내 몸인데 내 것 같지 않았다. 아, 애초부터 제 것이 아니었다. 초윤은 그제야 자신의 주제를 깨달았다. 이것은 제 몸이 아니고, 지금 이 육체를 움직이는 것 또한 자신이 아니었다. 힘없이 졸들은 귀신만도 못한 처지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였다.
아이의 환경에는 맞지 않는 이상을 주입하고, 그러고도 구김살 없이 자라 보기 좋다고 자만하며, 손꼽히게 뛰어난 육체를 얻고도 제대로 쓰지 못한, 자격 없고 우유부단한, 무능하고 오만한, 그리고 오래전부터 무엇 하나 바뀌지 못한…….
흙탕물 위 널브러진 남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붉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런 캐릭터가 있던가. 초윤은 상황과 유리된 채 습관적으로 원작을 생각했다. 검극이 그의 목에 닿았다. 잘 벼려진 명검은 조금 스친 살갗조차 예리하게 베어 냈다. 이런 반응과 전개를 바랐다는 듯 열락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런 등장인물은 없던 것 같았다. 아니, 이제 와선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제 의지를 벗어난 몸뚱이가 멋대로 검을 휘둘렀다. 첫 살인, 초윤은 오래도록 그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순간 발밑으로 주먹만 한 연막탄들이 도르르 굴러오지 않았다면 속절없이 그렇게 될 뻔했다.
“죄송해요, 스승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둥그런 구체의 연막탄들이 연달아 터지며 매캐한 연기를 한가득 피워 냈다. 사실 이 정도의 눈속임은 초윤의 시야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초윤의 발달한 감각은 연기 너머를 꿰뚫었고, 울음을 삼키고 사죄하는 목소리도 들었으며, 서슴없이 가까워진 제자의 맹랑한 행동을 목도했다. 스승과 태운의 사이로 파고든 임사영은 쓰러진 남자의 목덜미를 쥐고 빠르게 뒤돌아 달려 나갔다. 스승을 완벽히 따돌릴 수 있다고 확신하기보단, 스승이 자신을 구태여 막지 않으리라 믿는 듯 저돌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영의 예상대로 초윤은 사영을 쫓지 못했다. 상황의 전개를 낱낱이 알았기에 도리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경악과 당혹감에 굳어 버린 채 멀어지는 등을 잠시 동안 아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었으나 기회를 노리던 이들에겐 찰나로도 충분했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의 형체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빈사의 남자와 사영은 모습을 감추었다. 기척도, 기운도, 걸음마다 남아야 할 핏자국도 더 이상 없었다. 도심을 헤매고 다니던 지난 일주일처럼 아득한 단절이었다.
왜?
내민 손을 거두지도 못한 채 홀로 남은 초윤이 자문했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연막 너머로 우글대는 인파가 연신 비명을 질렀다.
어째서?
이토록 많은 일을 겪고 쉼 없이 노력했으나 초윤은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사영이 왜 이러는지, 그는 누구인지, 사현은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인공적으로 친 연막은 장대비에 녹아 금세 사그라들었다. 사방에 흩어진 혈흔은 빗방울에 뒤섞여 묽어졌다. 인기척이 즐비했으나 초윤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본 하나 전달받지 못한 연극 무대에 올라온 기분이었다. 전신에 따갑게 박히는 경외의 시선조차 화면 너머 영화처럼 느껴졌다. 극심한 박탈감과 괴리감 속에서 초윤은 생각했다.
천오는 어디에 있지?
◇
반항도, 가출도 해 본 사람이 하는 법. 계획도 예정도 없이 무작정 걸어 나온 천오는 본인이 스승님의 지시를 처음으로 어겼다는 사실만 떠올릴 뿐 이 뒤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별달리 궁리하지 않았다. 그저 제 분에 겨운 채 스승이 가리켰던 곳과는 반대로 걸어가며 타개책을 생각할 뿐이었다.
모든 문제는 스승님이 사형을 찾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럼 사형을 스승님 앞에 갖다 바쳐야만 전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이 도시에 머무르지 않아도 될 테고, 무심서로 돌아갈 시간이 지체될 일도 없다. 되찾은 사형이 멀쩡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리고 스승님은 분명 크게 상심하실 테지만 다망하신 분을 기약 없이 이곳에 묶어 두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은가.
스승님께서 그 뒤에 어떤 판단을 내리시든 끝내는 무심서로 돌아가게 될 터였다. 어쩌면 이 일로 더욱 인세에 염증을 느껴 하산을 저어하게 되실 수도 있었다.
사저는 사형을 해친 이들의 삼족을 멸하지 않고선 만족하지 못할 사람이니 두망산에 돌아올 리 없고, 그 산에는 다시 스승님과 나 둘만 남게 되겠지. 서문천오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희미한 이상향의 실현이었다.
무엇보다 스승님의 심기를 풀어 드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실수를 만회할 수도 있었고, 어쩌면 칭찬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애정과 표현에 각박한 삶을 살진 않았다만 좋은 건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 천오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여태까진 스승님이 중요히 여기시는 일이니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사형을 색출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스승님도 하지 못하셨던 일을 일개 제자가 어떻게 해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