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가품이옵니다.”
손바닥만 한 해시계를 든 채 꼼꼼히 살펴보던 제갈설린이 말했다. 초윤은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가만히 경청했다. 설린은 진흙탕에 처박히고 사람 발에 짓밟힌 기물을 매만지며 확신을 쌓듯 재차 입을 열었다.
“성침월구를 본떠 만든 가품에 불과하옵니다. 하나, 기껏해야 둘 정도의 기척밖에 가리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것이 그, 대협에게 감히 공격을 가했다는 오만방자한 자가 쓰던 기물이 맞사옵니까?”
초윤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기억을 되짚었다. 지강을 날린 직후 수세를 취하던 남자의 손목에 걸려 있던 붉은 비단 가방, 공기 중 진동으로 미세하게 울리던 전음의 여파. 분노와 불안에 눈이 멀어 전음의 흔적을 듣고도 숨어 있는 이의 존재를 짐작하지 못했다. 자꾸만 자책에 빠져 버리는 정신을 다잡고, 초윤이 답했다.
“사영과 그자를 데려간 이가 단장이라고 외치는 전음을 희미하게나마 들은 듯하니, 아마도 소수로 움직이는 이들의 우두머리겠지. 흙먼지가 잦아들기 전만 해도 그자의 손에는 붉은색의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사영이 태운을 데리고 사라진 뒤, 바글바글하게 모여들었던 인파는 단장을 잃은 강서단의 인솔을 따라 어렵사리 해산되었다. 비가 멎어도 맑아질 여력조차 없는 자만이 우두커니 남아 흩어진 감정을 주워 모을 찰나, 늦게나마 초윤의 뒤를 따라 도착한 제갈설린이 흙탕물 한가운데 엉망이 된 비단 가방을 발견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감별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제갈설린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단장이라는 사람은 위험한 역할을 맡은 만큼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가품을 사용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동행한 다른 이가 진품 성침월구를 든 채 숨어 있었군요. 교만한 태도로 보아 사고력이 모자란 줄로만 알았사온데, 발칙한 것들이 으레 그렇듯 교활한 잔재주를 부릴 깜냥은 되는 듯하옵니다.”
“…….”
신랄해…….
초윤은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지금 제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허탈한지, 조급한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지만 유리되는 기분과 기이한 탈력감만큼은 선명했다.
부유하듯 현실에서 동떨어진 느낌은 초윤의 감정에 약간의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초윤은 자신이 땅에 제대로 발을 붙이면 속절없이 무너져 다신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다. 무서운 게 이렇게 많아서 어쩌나. 자조해도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반면, 숨이 턱 끝까지 찰 정도로 열심히 초윤을 쫓아 이곳까지 달려온 설린은 약선에게서 흘러나오는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곤 연신 그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폈다. 표정과 행동거지만 보자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물론 평상시를 따지기엔 약선 대협을 만나 뵌 경험이 많지 않다만. 그럼에도 굳이 분석해 보자면 목소리가 조금 잠긴 듯하기도 했고, 유난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계신 듯하기도 했다.
충분히 상심하셨을 만도 하지. 장위에게 전해 들은 자초지종을 떠올린 제갈설린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큰 제자 하나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망연하게 나를 찾아오셨는데, 연달아 하나가 더 사라졌으니 오죽하실까. 심지어 스승의 검을 막고 흉수를 구출하여 제 발로 도망을 쳤으니 낙심이 깊지 않으면 이상했다.
나라면 좀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뾰족한 질투가 이성을 뚫고 톡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제갈설린은 한숨을 폭 쉬며 가시 돋친 감정을 토닥인 뒤 차근차근 자신이 생각한 바를 아뢰었다.
“아무래도 제 가문에 닥친 위기가 이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옵니다. 명명백백 약왕산의 제갈세가가 보존하고 수호하는 기물을 훔치다 못해 복제까지 하다니요. 얼마나 더 많은 기물이 얼마나 더 오래전에 도둑맞았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제 어머니께선 세가 내부의 배신자를 지극히 경계해야만 하셨을 것이옵니다.”
“그 와중에 아끼는 자식은 무공을 익히지 못한 몸이니 걱정이 될 수밖에. 내막을 얼추 유추하였으면 부름이 올 때까진 이곳에 있거라.”
“예, 어머니께는 하오문을 통해 따로 긴밀한 연락을 취할 요량이옵니다. 하온데, 대협…….”
제갈설린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초윤을 올려다보았다. 아, 이제야 어렴풋이 위화감을 특정할 수 있었다. 설린이 아는 약선 초윤이라면 이깟 몸 적신 물쯤이야 진작 날리고도 남았건만, 지금 이 분은 머리카락 끄트머리와 소맷자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느끼지도 못하시는 것처럼 그저 아득하게 이야기만 나누고 계셨다.
심상치 않은 이상을 감지한 설린의 어조가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소녀가 진품의 행방을 다시 한번 쫓아 보오리까? 성침월구를 가져간 이상 똑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몇 번이고 찾아낼 수 있사옵니다. 시간은 살짝 걸릴지언정, 아니…… 경험이 생겼으니 이전보다 신속할 것이옵니다.”
“…….”
단연히 그리하라 이르실 줄 알았으나 초윤이 보인 반응은 살짝 미묘했다. 초윤은 매끄럽게 눈을 돌려 흙바닥에 가득 찍힌 사람들의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바닥을 박찬 사영의 흔적을 찾아냈다. 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리고 여태껏 무엇 하나 해결하지 못한 스스로가 지독히 수치스럽고 증오스러웠으나 이대로 손 놓은 채 흘러가는 시간만 관망할 순 없었다.
만사에 초연하게 구는 것만큼 이기적인 짓거리가 더 있을까. 과부하에 기능을 멈췄던 머리가 무게에 순응하며 삐걱삐걱 돌아가기 시작했다. 초윤은 쓴맛이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내가 그 아이를 쫓는 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이 손으로 키운 아이니 알고 있다. 사영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닥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야.”
셋 중 가장 약빠르고 이해관계에 밝은 사람이라면 단연코 사영이었다. 그런 아이가 초윤을 저지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고, 습격자를 데리고 도주한 데에도 마땅한 까닭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초윤은 사영을 맹목적으로 만드는 한 가지 요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자들은 사현을 인질로 붙잡고 협박을 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나 내가 그 아이들의 스승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나를 심히 경계했겠지.”
“실제로 경계했사옵니다. 가품이긴 하옵니다만, 이중으로 성침월구를 이용했으니 말이옵니다.”
“그래, 그리고 사영에게 족쇄가 되는 조건 역시 달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사현에게 해를 입히겠다든가 말이지. 사영의 선택지를 편협하게 좁히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맞닥뜨린 상황을 슬슬 받아들이기 시작한 초윤은 손을 올려 제 얼굴을 쓸었다. 척척하게 들러붙는 옷자락이 이제야 차갑게 느껴졌다.
“내가 방해가 되기에 말도 없이 두고 간 것일 텐데, 이대로 또 무작정 쫓다 그 아이 계획을 망칠까 걱정이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초윤은 뒷말을 삼켰다. 대신에 웃음기 없는 헛숨만 허탈하게 내뱉은 뒤 덧붙였다.
“네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구나. 행동할지, 말아야 할지 분간도 가지 않는데 가까운 이에게 위기가 닥쳤으리라 짐작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노력해도 꽉 눌러 담은 자책은 걸핏하면 와르르 쏟아져 뇌리를 덮었다.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이러쿵저러쿵 한탄하기 싫어 입을 다물었지만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가는 감정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때, 초윤을 유심히 지켜보던 제갈설린이 단호하게 즉답했다.
“아니요. 대협께선 소녀와 같은 상황에 계시지 않사옵니다.”
“……그래, 온전히 같지는 않지. 네 사정을 함부로 넘겨짚어 미안하구나.”
“아,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대협께선 도리어 소녀와는 정반대의 입장이시라는 뜻이옵니다.”
양손을 흔들어 초윤의 자존감 낮은 발언을 황급히 부인한 제갈설린이 빠르고 명료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소녀는 대협께서 언급하신 대로 몸이 약하고 무공도 일천하여 단신이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옵니다. 그렇기에 세가에 위기가 닥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걸림돌이 될까 두려워 돌아가지 못하였으나, 대협께서는 그렇지 않사옵니다.”
“…….”
“대협께서 개입하신다면 전황은 반드시 변화할 것이옵니다. 그들이 어째서 대협을 경계하고 숨어 다니며 대협의 주위 사람들만 골라 해를 입히겠사옵니까. 대협을 그만큼 외겁하기 때문입니다. 대협이라면 본인들의 계획을 일거에 말소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기물 하나에도 농락당하는 몸이 무어가 두려웠을까. 그들이 도모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러니 직접 가서 확인해야지요. 대협께서 이대로 가만히 계시면 그들의 의도대로 이곳에서 멀어지시는 것밖에 되지 않사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갈설린이 목소리를 낮추고 한 손을 들어 입가에 댔다. 그렇게 조심한다 한들 전음이 아닌 이상 주위에 있는 무림인에게는 다 들릴 게 뻔했지만, 나름 낙망한 초윤을 북돋기 위해 과장한 태도였다.
“만일 소녀가 임 소저의 입장이었다면 반드시 대협을 중심으로 두고 생각하여 행동하였을 것이옵니다. 대협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지내 온 제자분 아니시옵니까.”
“……그래.”
“그렇다면 무모한 행동을 하여도 끝에 다다라선 대협께서 돌보아 주시리라 굳게 믿었을 것이옵니다. 대협의 행보를 방해하던 문제는 이제 쉬이 해결할 수 있사오니, 남은 건 제자들의 신뢰에 답해 주시는 것뿐이옵니다.”
신뢰. 설린의 말을 듣자마자 초윤의 이성을 한꺼번에 무너트렸던 한마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애가 이것저것 다 뭉개지고선 정신이 나갔는지 스승님 염불만 외우고 있던데.
왜 나를 부르겠는가. 금방 오리라 믿기에, 내가 구해 주리라 믿기에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