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한계까지 부푼 비눗방울을 바늘로 퍽 터트린 것처럼 단숨에 깨어난 느낌이었다. 무력하게 질질 끌리는 정신머리를 간신히 채찍질하던 방금까지와는 모든 게 달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순간에 피가 돌았고, 부옇게 비치던 세상이 선명해졌다. 빠져 있던 넋을 붙잡아 제자리에 욱여넣은 초윤은 퍼뜩 생각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고작 몇 가지 실패로 앞서 비관하며 손 놓고 관망이나 할 것인가? 고작 한 명의 귀엣말에 넘어가선 십 년을 넘게 키워 온 아이들을 포기할 것인가?
아무리 충격을 받았다 한들 멍청한 짓을 했다. 한탄에 빠져 흘려 버린 시간이 아깝다 못해 분했다. 애가 다 큰 지 오래든, 따로 뜻이 있었든, 가능성이 얼마나 희박하든 처음부터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초윤은 보호자였고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니어도 ‘내가 키운 아이’라는 사실은 죽어서까지 영원했으며, 스무 살이 되는 순간부터 옳은 결정만 내리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보호자가 없어도 되는 나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데 무슨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걸까. 남매가 안전하지 않다, 이 가정만으로도 초윤이 끝까지 매달릴 이유는 충분했다. 이 과정에 갑작스럽게 끼어든 남이 하는 말은 신빙성 없는 표지판 정도로만 받아들여야지, 이에 짓눌려 내가 애들을 찾네 마네 하는 것만큼 바보짓도 없었다.
‘초윤’의 몸이 아니었다면 제 양 뺨을 짝 때리고도 남았다. 대신에 볼 안쪽의 살을 어금니로 지그시 깨물고, 심호흡 두 번으로 기민해진 정신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네 덕을 많이도 보는구나. 고맙다. 당장은 보답할 길이 떠오르지 않아 겸연쩍을 뿐이다.”
“아니옵니다, 대협. 소녀는 이미 대협께 목숨의 은혜를 입었사옵니다. 소녀가 대협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일 따름이옵니다.”
제갈설린은 그제야 한껏 미소 지으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임시방편이긴 하나 낙망을 벗어나 다행이라는 듯,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듯 기대감과 함께 많은 의미를 눌러 담은 우아한 행동이었다. 설린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부터 어찌하실 요량이시옵니까?”
“일에 앞서 천오를 찾아봐야겠다. 사영과 함께 있으라 일렀건만 보이지 않는구나.”
아니…… 아예 이 근방엔 없는 것 같았다. 미무일식공을 익힌 천오는 심법의 특성상 평상시의 존재감이 많이 옅은 편이었지만, 같은 무공을 익힌 초윤에겐 더욱 선명히 느껴져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감의 반경을 넓혀도 천오의 기척을 감지할 수 없었다.
내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듣는 아이였는데. 이상한 기시감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문 소협을 마지막으로 보신 시각은 언제이옵니까?”
“너를 만나러 가기 전에 만났으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참 혼란스러운 상황에 모용 형제를 만난 천오가 무심코 위협을 가했고, 초윤은 이에 실망한 동시에 심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천오에게 잠시 축객령을 내렸다. 자리를 떠날 때까지 돌아보지 않은 탓에 천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처 입은 마음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맑아지고 나니 이제야 깨달았다. 애초에 몇 년의 교육으로 될 일이 아니란 사실쯤은 알고 시작했건만 불안에 떨며 예민하게 군 제 탓이었다.
사과해야 하는데 또 어디로 갔을까. 내 아이들이 왜 다 내 곁에서 사라질까. 초윤은 소매 아래로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디로 갔는지 예상되는 곳은 전혀 없는 것이옵니까? 기척은 임 소협과 마찬가지로 느껴지지 않사옵니까?”
“……사현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보느냐.”
“임 소협과 임 소저까지는 남매의 연과 하오문이란 이유를 들 수 있사옵니다. 하지만 서문 소협은 다르옵니다. 만일 서문 소협이 임 소협과 같은 까닭으로 사라졌다면 흉수의 목적은 약선 대협이옵니다. 두 분 사이의 접점이 오로지 대협밖에 없으니 말이옵니다.”
정체 모를 손길이 천오에게도 뻗쳤을 수 있다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소름이 척추에 내리꽂혔다. 하지만 더 깊은 생각을 하기 전에 설린이 말을 이었다.
“임 소협이 평소에도 서문 소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다녔으리라 보시옵니까?”
“……아니, 타지에 지내는 동안에는 친우에게 제 누나 이름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고 들었다. 나름 내 정체를 숨기려는 뜻이었겠지.”
“그렇다면 서문 소협의 사형제 관계를 알 만한 자는 있사옵니까?”
“……이 근방에는 하오문주와 그의 호위무사밖에 없을 것이다. 굳이 꼽아 보자면 8년 전 아이들을 대동하고 만났던 자들이 몇 있지만, 사천에 있는 이들이니 상관은 없겠지.”
“임 소협이 약선 대협의 제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되옵니까? 혹은, 임 소협에게 약선 대협의 문하에 속해 있음을 알리는 징표가 있사옵니까?”
딱히……. ‘초윤’부터가 산속에 오두막 짓고 빈곤하게 사는 인물이라서 거창한 걸 만들어 준 적은 없는데. 초윤은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해야 온갖 진법을 때려 넣은 은주렴밖에 없었지만, 거기에 자신의 서명이나 이름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준 것은 오로지 건강한 몸과 조잡한 기물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내 존재를 알아챌 만한 이는 이미 이백 년 전에 다 죽었다만.”
“아, 이, 이런. 소녀가 무지하여 송구스러운 짓을 저질렀사옵니다.”
“신경 쓰지 않으니 괘념치 말거라.”
초윤은 손을 내저어 설린의 사과를 막았다. 초윤 스스로도 잘 모르는 이백 년의 과거에 지레 놀라 쩔쩔매던 설린은 겨우 안심한 뒤 다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무언가 생각나는 가설이 있는데, 초윤이 딱 잘라 가능성을 막아 버리니 영 진전이 되지 않는 듯했다.
역시 이번에도 무작정 나가 발로 뛰는 수밖에 없나. 또다시 마주친 벽에 탈력감이 번질 찰나, 멀리서 황급히 가까워지는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초윤은 고개를 돌려 높게 솟은 주륜각을 응시하다가 마른 땅으로 걸음을 옮겼다. 초윤의 기분에 동화한 하늘이 이 근방에만 소낙비를 내린 탓이었다.
대문을 넘으며 옷깃을 쥐고 한 차례 털자 젖어 있던 옷자락이 단번에 마르며 수증기를 피웠다. 얼굴에 들러붙던 머리카락도 뿌리부터 물기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온 초윤은 뒷짐을 진 채 이곳으로 다가오는 이의 발걸음을 가늠했다. 의아한 심정으로 뒤를 따른 설린이 초윤과 같은 방향을 멀뚱히 바라보자, 자그마한 인형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어지간히도 급한 일인지 인상을 쓴 채 지붕 위를 뛰어넘듯 달리는 모용서였다.
“대협!”
초윤을 발견한 모용서가 황급히 초윤의 앞에 내려섰다. 발뒤꿈치 밑으로 흙바닥이 움푹 파이자 곁에 서 있던 제갈설린이 움찔거렸다. 그에 신경도 쓰지 않고, 모용서가 말했다.
정확히는 초윤을 붙잡으며 절박하게 전음을 날렸다.
[남궁영입니다. 남궁영 그자가 지금 하오문에 찾아와 하오문주를 독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남궁영이 광동성에 들어왔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이는 오로지 초윤과 모용서밖에 없었다. 초윤의 입꼬리가 가차 없이 비틀렸다.
◇
톡, 차가운 감각이 뺨을 때렸다.
사영의 의식을 희미하게나마 끄집어 올린 물방울은 그대로 도르륵 미끄러지며 마른 입술을 적셨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입을 움찔거린 뒤, 연이어 손끝에 힘을 주었다. 차갑고 축축한 흙을 움켜쥐자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시린 소름이 전신에 퍼지며 신경을 일깨웠다. 사영은 숨을 들이켜며 번쩍 눈을 떴다. 온몸에 추를 매단 듯 고개를 가누기도 어려웠다.
위기에 대처하는 법을 일찍부터 익혀 온 사영은 목소리를 내어 사람을 부르는 대신 현 상황의 앞뒤를 차근차근 짜 맞추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에 정신머리까지 다 젖었는지 제구실을 하기가 영 어려웠으나, 드문드문 떠오르는 조각으로 어떻게든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갑작스럽게 찾아와선 내게 사현의 안구를 보여 주었고……. 어쩔 수 없이 따라가려는 찰나 스승님께서 오셨다. 그자와 함께 가야만 사현이를 살려 주겠다는 말에, 스승님의 검에 뛰어들어 남자를 빼돌리고 숨어 있던 일행과 함께 도망쳤다. 그런 뒤에는…….
-일 났네.
나지막한 여성의 목소리가 기억에 울렸다. 쉬이 선택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던 사영을 부추긴 전음의 주인과 같은 인물이었다. 사영은 얼굴에 자루를 뒤집어쓴 여성과 함께 도주했고, 그자가 정말 무언가 조치를 취했는지 스승님은 따라오지 않으셨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도심의 외곽에 자리한 빈 장원이었다.
과거에는 이름 있는 도장으로서 번성했던 장원은 채무 문제로 빈집이 된 지 오래였다. 사현을 찾으러 다니며 온갖 빈집을 수색할 때 이곳 또한 몇 번이나 확인했고, 여자와 함께 그곳에 당도한 그때조차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약속한 시간이 되지 않은 걸까. 사영은 꽉 쥐고 있던 남자의 옷깃을 놓았다. 질질 끌려오다시피 한 중상의 태운이 바닥에 풀썩 드러눕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맞다, 핏자국.
이 남자의 혈흔을 수습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흔적이 줄줄이 이어진 이상, 어쩌면 조건 불이행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