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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 (174)화 (174/257)

174화

스승님께 등 돌려 이곳까지 온 결과가 실패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사영은 단숨에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서둘러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는 눈에 담고 싶지 않은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이고, 아파라.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빌어먹을…….

저절로 잇새에서 욕설이 새어 나왔다. 너무 맥없이 붙잡혀 오기에 정신을 잃은 줄만 알았던 남자는 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활짝 웃으며 사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용케 성한 양손으로 여기저기 쩍 벌어진 상처를 움켜쥐고 있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스승님이 칼에 사정을 두셨다곤 하나 그토록 베이고 찔려 놓고도 멀쩡히 처웃다니, 미치다 못해 상종 못할 인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은, 그가 벌떡 일어나 누군가를 공격할 여력은 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사영은 남자의 어깨를 발로 밀어 치워 냈다. 핏자국을 점점이 남기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이대로라면 치미는 짜증에 그를 밟아 죽이게 될지도 몰랐다. 밑에서 들려오는 가증스러운 엄살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영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여자를 응시하며 따지듯 물었다.

-채근할 땐 언제고 이게 뭐지? 말이 다르잖아. 내가 ‘지나치게’ 일찍 온 건가?

-어…….

여자는 포대 자루에 뚫린 눈구멍 너머로 아무도 없는 장원과 손에 든 해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사영의 눈썰미로 여자의 해시계와 남자의 기물을 비교해 일치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곧 확신 없는 목소리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아마…… 아닐 거야. 시간은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것 같은데. 대충 이 주변에 자리 틀고 앉아서 감시하고 있는 거 아닐까? 네가 그, 거래의 조건을 이행했는지 봐야 하니까…….

-어차피 약점 잡힌 몸인데 신중할 필요가 있나? 스승님까지 기만하게 만들었으면 최소한 지체는 시키지 말아야 할 거 아니야.

-나는 단장도 아니고, 간부도 아니고, 뭐…… 높으신 분도 아닌걸.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봤자 나도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앉아 있는지 모르겠는데.

여자는 떨떠름하게 포대 너머 머리통을 긁적였다. 마냥 지나가는 시간에 좀 더 험한 말을 하려는데, 이제껏 무시하고 있던 남자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사영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스멀스멀 웃는 음성으로 말했다.

-야, 너희 스승님…….

-…….

-죽인다…….

-젠장, 같이 도착한다는 조건은 만족했으니 이제 죽이면 안 되나?

-어…… 안 되지 않을까? 이래 보여도 교단에선 꽤 중요한 사람이라.

될 리 없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죽여도 될 것 같았다면 구구절절 허락을 구하기에 앞서 득달같이 검을 뽑아 찌르고 말았을 터였다. 하릴없는 대화로 간신히 살심만 삭힌 사영은 초조함과 짜증으로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뒤를 보면 스승님이 와 계실 것 같았고, 앞을 보면 눈을 잃은 사현이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품에 들어 있는 호두나무 상자의 감촉이 유난히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것을 다시 꺼내 들여다볼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던 사영은 떨리는 한숨을 내쉬며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무엇도 할 수 없다면 최소한의 특기라도 살려야 했다.

-이 정도로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는 기물을 갖고 있었다면 사현이 다음으로 나를 납치하는 것쯤이야 간단했을 텐데, 어째서 이제야 나를 데리러 온 거지? 그것도 내가 바깥을 돌아다닐 때는 얌전하다가, 갑작스럽게 하오문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어……. 잘은 모르겠는데, 뭐가 좀 애매하게 겹쳤나 봐. 왜, 그, 아까 단장이 말했잖아. 네 동생이 뭔 짓을 좀 저질렀다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피해라고도 했지.

-그래, 그거. 그게, 그…… 잡아서 묶어 놨는데도 작은 도련님 얼굴을 물어뜯었거든, 걔가. 그래서 큰 도련님까지 기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그 통에 윗분이 홀로 돌아다니시기엔 여의치 않았고.

사현이가 ‘작은 도련님’이란 자의 얼굴을 물어뜯었다고?

단박에 와락 구겨진 사영의 미간이 차근차근 원래대로 돌아갔다. 비틀린 뿌듯함이 희미하게 가슴에 번졌다. 그래, 험한 꼴을 당했으니 그렇게 반격을 가했을 만도 했다. 아무렴, 누구 동생인데. 도련님인지 뭔지는 몰라도 사현이가 얼굴에 잇자국까지 박아 주었다고 하니 보는 즉시 모가지를 따 버리기에도 편할 듯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사영의 안색이 다시금 진지해졌다. 이 순간만큼은 죽으리만치 불안하던 속도 가라앉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약선 초윤이 계속 광동성을 돌아다니잖아? 기물이 있다고는 해도, 그, 영 안심을 할 수가 없어서. 한 번 잘못 걸리면 망하는 거니까 말이지.

조잡한 어휘력과 매끄럽지 않은 문장, 귀찮은 듯한 말투로 위장하곤 있었지만 미묘하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이 없다 한들 이런 임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면 입을 무겁게 다무는 것부터 익혔을 텐데, 옆에 단장이라는 사람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데도 이것저것 열심히 주절거리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여자는 지금 대수롭지 않은 수다를 하듯 내부 사정을 줄줄이 털어놓고 있었다. 마치 사영에게 사건의 전말을 어떻게든 알려 주려는 것처럼.

미량의 낌새를 감지한 사영이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는 찰나, 중상의 환부를 움켜쥔 채 드러누워 있던 남자가 시기 좋게 불쑥 끼어들었다.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조르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있던 사영은 제풀에 찔려 어깨를 흠칫 굳혔다.

-계월아.

-예, 단장.

-나 아직 안 죽었는데. 나도 얘기에 끼워 주면 안 돼?

-어…… 글쎄요. 곧 죽으실 것 같은데.

-아니야. 내가 아까 말했잖아. 나 죽일 생각 없는 것 같다고. 그 양반 기가 막히게 급소만 피해서 썰었어. 아니, 아예 능지처참을 할 생각이었나?

남자는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며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사영은 지그시 이를 악문 채 손톱자국이 파이도록 주먹을 쥐었다. 애써 눈 돌린 아까의 일을 상기시킬 때마다 견디기 힘든 중압감이 밀려들어 왔다.

홀로 힘겨운 사영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옆에서 태평한 대화가 오갔다.

-그렇지만…… 잠입은 실패하고, 교전을 일으키고, 약선도 도발하고, 중상도 입으셨잖습니까. 의전각에서 석 달을 요양하느니 그냥 자결하라는 명이 내려올 것 같은데요.

-대신 우리 단장님은 데려왔고, 나도 살아서 나왔고, 약선은 따돌렸고, 이 정도 상처는 잘 먹고 쉬면 금방 낫잖아. 설마 진짜 죽이겠어? 나를?

-죽이고도 남죠.

-단호해…….

투덜거리던 남자는 곧 끙 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분명 근육과 인대가 끊어지고 복부를 관통당하는 모습을 봤건만, 그 짧은 사이에 회복을 했는지 운신이 아주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도대체 어떤 외공을 익혀야 저럴 수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뭐, 마교의 무공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나. 사람 목숨이 한낱 재료만도 못하고, 실력이 안 되면 어린애도 가축처럼 쓰다 버리는 집단이니 장성한 이들은 그만한 힘 정돈 갖추었겠지.

안 그래도 머리가 한계까지 꽉 찬 탓에 계월을 향한 의심도 쉬이 내려놓은 사영은 조용히 조소하며 눈을 돌렸다. 닫힌 대문 너머를 고요하게 노려보며 피 같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곳으로 곧장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이 곤두세운 기감을 건드렸다.

사영은 사현처럼 우직하기보단 효율을 중시했고, 천오와 같은 타고난 무재도 없었다. 이에 넓고 얕은 기감 대신, 좁고 깊은 감각을 길렀다. 보이지 않는 상대에 대한 정보가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였다. 수년간 연습한 성과였다.

무게는 약 1석, 보법을 배운 듯 일정한 발걸음, 기골이 장대하고 자세가 바르지만 뼈대에 비해 근육이 부족한 듯했다. 모래 밟는 소리가 다 들리는 것으로 봐선 무공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으며, 가죽과 비단으로 지어 고급스러운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어딘가 좀 익숙했다. 불길한 기시감에 심장이 술렁였다. 마교와 깊은 연이 있을 만한 사람, 그중에도 익숙하다고 느낄 만한 사람이라면 하오문도밖에 없었다. 본능을 무시하지 않는 사영은 동료가 사실 적이었다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열리며, 남색 장화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뻗었으나 한 줄기 남은 이성이 이를 막았다. 계월에게서 부스럭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나를 인계받는 자, 나를 사현에게 데려가 줄 자, 이 일과 관련이 있는 자……. 배후의 적 중 하나.

누군지 알아야만 했다. 명확히 보고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곧 우아한 하늘색과 고급스러운 감청색 비단을 친친 휘감은 남성이 저벅저벅 장원으로 들어왔다. 허리춤에 찬 칼에는 세 개의 금술과 옥으로 된 패가 달려 있었다. 그는 기억보다 수십 년은 늙어 보였고, 그럼에도 변함없이 추악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영은 그자를 알고 있었다.

이제 와 다시는 마주칠 일 없다 생각했던 과거의 원념이었다.

숨이 턱 막힘과 동시에 허리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정신적 충격에 통증을 느낄 수조차 없었지만, 맥없이 무릎이 꺾이고 나서야 계월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찔러 넣었단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온통 아연한 사태에 아무런 진전도 없이 눈앞이 암전되었다. 사영은 욕조차 지껄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 뒤의 기억은 곧장 입술을 적신 물방울로 이어졌다. 잠시 숨을 고르며 평정을 되찾은 사영은 손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은 채 조심스레 내공을 퍼트려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동네방네 나 깨어났소 알리는 것보단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일이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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