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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181화 (181/257)

181화

“이런. 아래가 소란스럽네요.”

열려 있는 창문에서 풍경이 흔들거리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남궁영은 희미하게 먹구름이 끼어 있는 하늘을 내다보다가,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어온 맞은편의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오문주 희는 남궁영과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결 좋은 머리카락에 땋아 내린 홍옥과 비취옥이 새파란 홍채와 어우러지며 눈길을 끌었다. 목소리는 나긋하고 생김새는 수려하여 누구에게든 호감을 안겨 줄 인상이었으나, 화경의 끝을 밟고 있다는 백협맹주 남궁영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좌한 채 엄중한 태도를 지켰다.

“여간 심상찮은 일이 아닌 듯한데, 내려가서 문도들을 살피고 와도 좋소. 문주만을 오롯이 믿고 따르는 자들이 아니오.”

“배려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다른 분도 아니고 맹주님을 직접 뵙는 일인데 이보다 급한 용무가 어디 있겠나요. 설령 천지가 개벽할 일이 일어났다 한들, 저 역시 제 사람들이 저에게 일 각의 시간은 벌어 주리라고 믿어요.”

다르게 말하자면, 남궁영의 용무 따위 일 각 안에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에 남궁영은 희게 바랜 눈썹이 성성한 눈을 잠시 가늘게 떴다가 본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희는 가까운 곳에 세워 둔 책장으로 손을 뻗었다. 빽빽한 서랍 안에 들어 있는 서류를 전부 기억하듯 망설임 없이 뒤지고 그 밑의 죽간을 꺼냈다. 필요한 자료를 모두 찾아내는 동안 손님의 무료함을 달랠 작정인 듯 소소한 주제로 입을 열었다.

“자리가 불편하시지요. 죄송해요. 제가 다릿병을 앓아 보료 위에서 살고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집무실에 직접 방문해 주시는 손님께도 의자를 제공해 드리기가 여의치 않아서…….”

“객이 주인을 내려다볼 수는 없으니 개의치 않소이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야 감사할 따름이에요. 정파를 단합하여 이끌어 주시는 분답게 도량이 하해와 같으시군요.”

가볍고 단아한 웃음소리가 작게 울렸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던 소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잦아들었고, 희 역시 목표한 문헌을 전부 찾았는지 손끝에 끼운 호갑투로 변색된 문장을 짚어 내려갔다.

“영약이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그렇소.”

사파에 속한 하오문의 문주가 정파의 최고권자인 백협맹주를 대하는 자세치곤 지극히 여유롭고 유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타고난 자태 덕분인지 도리어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희는 문서에 신경을 집중한 듯 고개를 숙인 채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맹주님의 격에 맞는 물건을 몇 가지 추려 보았는데…… 정확히 무슨 효능을 지닌 영약을 찾고 계시는 건가요? 내공 증진, 노화 방지, 불로장생, 신체 수복…….”

“신체의 수복을 목표로 하고 있소.”

“맹주님께서 사용하실 건가요?”

“내 아들에게 먹일 요량이오.”

“아드님이시라면…….”

희가 남궁영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궁영은 시선을 조금 내리깐 채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게는 많은 자식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십여 년 전 내 가슴에 가시가 되어 박힌 애틋한 아이들이 있소.”

“…….”

“호관과 옥리라고 하오. 모르시진 않을 테지.”

“그럼요. 도와드리지 못해 한없이 안타까웠던 일인데요.”

백협맹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남궁세가에서 벌어진 참변이었다. 그에 더불어 사건의 발생지가 광동성이었으니, 당시 세력을 넓히고 있던 희가 알지 못할 리 없었다.

가여워하는 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희의 표정을 보며, 남궁영이 담담히 말했다.

“그 아이들이 오랜 투병 끝에 드디어 정신을 차렸소이다. 이에, 쇠한 육신을 보하기 위하여 영약을 구하고 있소.”

“아, 세상에…….”

희가 손끝으로 입술을 가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허나 그도 잠시, 갸웃거리는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의문이 묻어났다.

“헌데…… 보신을 위한 영약이라면 남궁세가에서 직접 수급하셔도 충분하지 않으신가요? 맹주님의 청렴함이야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커다란 약 시장이 있는 박주 시에서도 충분히 구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멀고 복잡한 광동성까지 몸소 걸음 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그는…….”

허벅지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정좌한 남궁영이 큰 숨을 들이마셨다. 거목처럼 단단하고 위압적인 체구가 눈에 보일 정도로 부피를 키웠다. 이는 심저에 들끓는 화를 삭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심각한 이야기에 앞서 뜸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림인에겐 마음을 가다듬으며 기회를 노리는 위협이 될 수도 있었으나,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는 하오문주는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한 듯 이어질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다른 용무를 겸하여 그렇소. 나는 내 아이들을 해한 흉수를 찾아다녔다오.”

“아무렴, 자식이 큰 해를 입었는데 눈감고 넘어갈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다만 목격자가 마땅히 없어 사세난연하시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은 것 같은데…….”

“없었소. 없었지. 그 객잔 주위로 오간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들어가는 이도 나오는 이도 보지 못했다 했소. 무공의 흔적도 전혀 분간할 수 없었고, 내 아이들을 중독시킨 독물의 정체조차 알 수 없었소. 그렇게, 사는 것 같지 않게 보낸 시간이 십 년을 지나가며 나는…… 새로운 방식의 접근을 해 보기로 했소이다.”

희를 응시하는 남궁영의 기세가 잘 벼린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등 뒤에 태산을 업은 듯 웅장해졌고, 머리 위에 광대한 하늘을 띄운 듯 창대해졌다.

과연 창궁무애검(蒼穹無涯劍)을 대성한 자인가. 희의 얼굴에 배어 있던 미소가 조금 희미해졌다.

남궁영의 정중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는 점점 더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무림은 이제 와 그대를 무용군주(無用君主)라고 하지.”

“…….”

“세상 모든 쓸모없는 것들의 군주……. 하오문은 그대가 수장이 된 이후로 유례없는 충성심을 보이고 있고, 이는 광동성 전체의 구마지심이 되지 않았소. 모르긴 몰라도 광동성 인구의 절반은 그대가 먹여 살리고 있을 것이오.”

“……듣잡기 어려운 극찬이세요. 저는 그저 한낱 약한 자의 입장으로서, 저와 마찬가지로 내세울 것 없는 이들이 한시름 놓고 살 수 있길 바랄 뿐이랍니다.”

“바로 그것이오. 인간은 백 명 중 구십 명은 약하고, 일곱 명은 적당하며 세 명은 강하지 않소? 그렇다면 그대는 백 명 중 구십 명을 휘어잡고 있는 것이오.”

“……휘어잡다니요. 저는 단순한 장사치일 뿐인걸요.”

“장사치인 그대를 통해 이득을 보는 구 할의 인간은 그대의 사소한 부탁 정돈 들어주겠지. 예를 들어 외지인에게 무언가를 말하지 말아 달라…… 하는 정도의 당부 말이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공기가 얼어붙었다. 말간 뺨이 한순간 꿈틀거렸다. 희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 흉수를 제가 숨겨 주었으리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객잔 주변을 오가던 민간인 모두를 함구시켰어야 하는데, 당시의 제겐 그럴 힘이 없었어요.”

호위무사 하나 곁에 두지 않은 홀몸으로 백협맹주의 노기를 감당하기엔 조금 힘들었는지, 희는 한 손을 올려 제 가슴을 살포시 눌렀다. 생각도 못한 이야기를 들어 긴장한 듯 보이는 그를 앞에 두고도 남궁영은 기세를 꺾지 않았다. 도리어 어깨 위가 일렁이도록 내공을 찬찬히 끌어 올리며 깊은 울림을 담아 말했다.

“아니, 힘이 없었다면 십 년 만에 이리 자랄 리가 없지. 뿌리가 없으면 순식간에 그리 뻗어 날 수 없소. 세상 어떤 사파가 광동성을 넘어 광서, 호남, 강서, 복건의 남쪽 절반을 쥐락펴락하겠소?”

“……결국은 하오문이 사파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는 건가요? 분명…… 본문은 정파의 도리에 부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긴 하오나, 이는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예요. 맹주님께서 보시기엔 지저분한 수법일지 몰라도…….”

“그것이 단순히 지저분한 수법이오?”

“읏!”

남궁영의 일갈이 공기를 가르고 희의 말을 끊어 냈다. 그와 동시에 화경의 고수에게서 터져 나온 세찬 기운이 바람으로 화, 해 희를 할퀴었다. 희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양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길게 풀어 내린 머리가 엉키며 장신구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천천히 손을 내리고 남궁영을 살피는 새파란 눈에 파리한 불안이 어렸다. 정좌한 자세를 풀지 않은 채 희를 노려보던 남궁영은 치미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듯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내 아이들이 깨어난 뒤, 나는 그래도 설마 싶어 그대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소. 이미 많은 무림인들이 그대의 사업으로 큰 도움을 받고 있고, 특히나 중원 남부는 거의 그대의 손에 달려 있지 않소. 거기에 더해 문도들의 충심이 대단하다면 그들을 보듬는 그대의 인덕 또한 높으리라…… 그저 그리 믿었소.”

“……맹주님, 고정하세요.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헌데…… 어느 순간부터 머리 위를 돌아다니는 비둘기들이 그리 거슬리기 짝이 없지 않소이까. 알다시피 남궁세가는 하늘을 점하는 무공을 익히기에 한낱 비둘기의 날갯짓에도 예민하다오.”

“…….”

“하오문주에게 직통으로 서신을 보내려면 특별한 지물(紙物)과 인장(印章)을 써야 한다지?”

남궁영이 윗입술을 들어 올리며 송곳니를 보였다. 몸을 웅크린 노호의 목 울림처럼 나직하고 섬뜩한 위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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