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희는 매무새를 가다듬고 책상 위에 손을 올렸다. 한차례 몰아친 강풍에 구르는 붓을 치우고 뒤집힌 종이들도 더듬어 정리했다. 급박한 상황에 차분함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인지, 아니면 그저 허장성세에 불과한지 표정으로는 분간할 수 없었다.
부드러우나 심지 있는 목소리가 예의를 두르고 흘러나왔다.
“그야 저는 장사치니까요. 된바람에 몸을 싣고 파도에는 배를 띄워 살아남는 부초요. 하늘에 떠도는 입담과 바닥에 감도는 불안이 제게는 곧 돈이자 목숨이에요. 저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고요.”
“된바람과 파도가 곧 돈이 되고, 입담과 불안은 그대의 무기가 되겠지. 그대가 중원의 곳곳에 뻗친 손이 금이란 금은 모조리 갈퀴로 쓸어 담고 있지 않소. 그대가 사파의 일원인 이상 의협보단 득리(得利)에 목적을 둘 수밖에 없을 테니 이를 비난할 생각은 없소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서 말이오.”
“……말씀하세요.”
“그 탐욕스러운 손은 도대체 어디까지 닿아 있는 것이오?”
남궁영의 눈길이 서안 위에 올라가 있는 희의 손에 가 닿았다. 매끄러운 손등과 길고 흰 손가락, 산호와 보옥을 세밀하게 깎아 만든 가락지와 손톱을 가린 금제 호갑투.
몇 겹의 비단으로 둘둘 싸맨 몸뚱이에서 얼굴을 제외한다면 오로지 양손만이 유일하게 살갗을 드러냈다. 그마저도 호화와 사치의 절정을 보이고 있으니, 무복과 관만을 갖춰 입은 남궁영과는 이질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대의 몸을 치장하기 위해 도대체 어디까지 선을 넘으셨소? 좀 더 빠르게, 좀 더 많이 이 땅을 장악하기 위해 누구의 도움을 받으셨소? 아니, 애초에 ‘이쪽’의 인간이긴 하오?”
“……정말 무슨 말씀을 하시고 계신지…….”
“끝까지 발뺌하는군. 어째서 마교가 그대에게 직통으로 서신을 보내왔느냐 묻는 것이오.”
정파 무림의 유일한 금기가 드디어 직접적으로 거론되었다. 가만히 주먹을 쥐는 희의 손등 위로 혈관이 도드라졌다. 연지 바른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희는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 제가 마교와 내통하였다고 의심하시는 건가요?”
“내가 이 의혹을 언제부터 품고 있었는지 아시오? 그리고, 이를 검증하기 위해 또 언제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아시오? 모를 테지. 남궁세가가 자리 잡은 안휘성에는 그대의 같잖은 지부도, 기만적인 표국도 없으니까.”
남궁영은 한 마디마다 멸시와 역정을 가득 싣고 몰아붙이듯 말했다. 그리고 희가 입을 떼기도 전에 품에서 얇은 종이 뭉치를 꺼내 바닥에 나란히 펼쳐 보여 주었다.
“십만대산은 상당히 멀지. 그에 경유지가 꽤 많더군. 신강에서 날아와 곧장 섬서성에 머무르고, 장강을 내려와선 복건성을 거친 뒤에야 이곳으로 들어오더이다. 내가 광동성에 들어와 곧장 그대를 찾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소? 이것들이 바로 장장 스무날을 넘게 들여 모은 서신들이오. 마교에서 그대에게 보낸 각종 불결한 정보와 지시 말이오.”
“그런……!”
“행여나 이것들만 없애면 해결되리라 생각하지는 마시오. 안휘성에는 이보다 더 많은 증거품을 놓아두었소.”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눈에 띄게 동요한 희가 당황하며 서찰을 눈으로 훑었다. 별채마다 놓아두는 숨김 문양 종이에 직행 인장, 그리고 낯익은 필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챘는지 연지 바른 입술 사이로 빠득 이 가는 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위조를 각오하면 어렵지 않은 요소만으로 변절을 주장하다니 말문이 막히도록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희는 스스로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어렵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턱도 없는 핑계를 밀어붙이는 무식한 방법으로 이미 수많은 중소 문파를 제거해 온 백협맹이 아닌가. 희가 봐 온 인간이란 이미 형성된 여론에 쉬이 휩쓸려 동참하는 아둔한 동물이었고, 그 뒤에 모든 것이 모함으로 밝혀졌다 한들 쉬이 잊고 외면해 버리는 이기심까지 지니고 있었다. 무죄는 투명할수록 선입견에 물들기 쉬운 법이었다.
하물며 대표이자 주동자인 백협맹주가 직접 여기까지 거동해 ‘더 많은 증거품’을 언급한다면…… 일이 성가시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말도 안 되는 모략을 알아보지도 않은 채 수긍할 순 없는 노릇. 희는 호갑투의 날카로운 끄트머리로 자단목 책상의 표면을 슬며시 긁어내리며 고요히 말했다. 뱀이 고개를 쳐들고 노려보듯 스산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진실은 맹주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터입니다. 제 행보가 언짢으셨다면 일찍이 다른 길을 통해 화합을 꾀할 수 있었을 텐데, 이리 무도한 방법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기어코 하오문의 목숨을 끊어 놓으셔야 직성이 풀리시겠습니까?”
“이젠 내 탓으로 돌리기 시작했는가……. 그대에게 잔혹한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노력하였건만 아무래도 안 되겠소.”
결연히 답한 남궁영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단정한 내공이 실처럼 뻗어 나가며 전음으로 화했다. 이를 알아챌 능력도, 막을 힘도 없는 희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짧고 갑갑한 침묵 끝에 계단을 올라오는 기척이 들려왔다.
남궁영은 마지막 선고를 내리듯 입을 열었다.
“그대는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소. 개인의 탐욕을 대의로 포장하는 것만큼 가증스러운 행위는 없소이다.”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문주의 방, 그리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해야 할 비밀스러운 회담이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막는 이는 누구 하나 없었다.
“최소한의 협의(俠義)조차 지니지 않은 무뢰배들에게 돈으로 산 무공을 가르칠 때부터 알아보았지. 그대가 이만큼 세를 불리리라고는 예상치 못하였으나, 어찌 되었건 언젠가 벌어졌을 일이오.”
희는 남궁영을 주시하던 시선을 들어 맞은편의 장지문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모란을 그려 올리고 금박을 입힌 문 앞에 한 사람의 그림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잠룡단과 와호단을 비롯한 백협맹의 집행부가 이미 이곳을 향하고 있소이다. 중원 남부를 장악한 하오문이 알고 보니 마교의 자금줄이었다니,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동의를 구할 여유는 없다 판단되어 맹주령을 발령했소.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 땅에 뻗친 부정한 세력을 반드시 솎아 내고 말 것이오.”
미닫이문이 열리며 묵직한 발소리가 문턱을 넘었다. 남궁영은 공기 중에 희미하게 감도는 피 냄새를 맡고 승리를 확신했다. 오운단의 단장이 왔으리라. 내 명대로 부하의 목을 소반에 받쳐 들었으리라. 곧 저 그림 같은 낯짝이 새하얗게 질리며 좌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유리처럼 일렁이는 눈은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오열하며 발악하는 꼴은 잔뜩 일그러져 추하리라…….
멀끔한 껍데기와 엄중한 분위기로 감추어 두었던 도착적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했지. 주제도 모르고 안휘성과 맞닿은 도시를 야금야금 잡아먹던 벌레 새끼가 이토록 구미 돋는 미색을 띠고 있을 줄은…….
번들거리는 혀끝으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축인 남궁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제 취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뒤집어쓴 인두겁도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혹시라도 약선 초윤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다면 일찍이 접어 두시오. 그딴 실패작 따위는 암존께서 친히 거두어 유용하게 써 주실 것이니.”
주어조청야어서청이라 하였으나 백협맹주 남궁영에겐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낮말 들은 새는 쏘아 죽이고, 밤말 들은 쥐는 목을 비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바로 뒤까지 다가온 이가 곧장 수급을 건네긴커녕 남궁영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예기치 못한 일에 짜증을 느낀 남궁영은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는 죄를 참회한다는 의도로 창단된 오운단의 일원답게 사형수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눈구멍만 거칠게 뚫은 삼베자루, 목을 둘둘 감싼 거친 새끼줄, 그리고…….
달라붙는 가죽옷 아래 뚜렷하게 드러나는 여성의 체형.
명명백백 단장이 아닌 이가 손에 든 머리통을 대충 바닥에 버렸다. 데굴데굴 굴러간 수급은 남궁영을 바라보며 멈춰 섰다. 희의 집무실에 들기 전, 태운을 제외한 이가 올라오려 한다면 모조리 죽이라고 명을 내려 둔 수하였다.
곧 호쾌하게 벗어 던진 삼베자루 아래에서 땀에 젖은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세 치의 길이로 짧게 친 머리카락, 무관심한 이목구비에 떠오른 경멸과 안도감.
하오문도 홍계월이었다.
“아무래도 착오가 있으신 듯합니다, 맹주님.”
계월은 한심하다는 듯 남궁영을 내려다보며 한 손을 들어 제 아랫입술을 잡았다. 아랫니가 다 보이도록 그대로 뒤집어 까자 입술 안쪽 점막에 칼로 가른 듯 허옇게 뜬 흉터가 드러났다. 직선으로 깊게 그어 만든 상흔은 몇 개의 획이 모여 명확한 글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오(下汚)>
“전 문주님께서 역으로 마교에 투입하신 밀정입니다. 의심스러우셨다면 직접 물어보시지 왜 굳이 여기까지 와서는…… 쯧. 지난 한 달간 저와 꽤 부대끼고 지내시지 않으셨습니까. 기회는 충분하셨을 텐데요.”
입술 안쪽을 까붙인 채 말하려니 발음이 영 어눌했다. 하지만 의도는 제대로 전달된 듯 남궁영의 어깨 위로 잔떨림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금방에라도 터질 것처럼 고조되던 분위기를 매섭게 가르고 벽력같이 메운 소리는 다름 아닌 희의 박장대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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