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딛고 선 모든 땅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답을 떠올린 모용단은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한 참담함을 비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독을 머금은 종양이 중원을 침범해 몸을 불리는 동안 백협맹의 창이라던 모용세가는 무엇을 했는가. 아니, 칠성검이라고 추앙받던 자신은 무엇을 했는가. 모용단이 하잘것없는 거짓말을 지켜 내기 위해 틀어박혀 있는 동안, 무림은 벼랑 끝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당장 행동을 개시해선 안 돼요. 맹주님께 들은 답을 토대로 여러 방법을 강구한 뒤에 밑작업부터 들어가야만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거예요. 먼저 엉겨 있는 세력들을 하나하나 분리하고, 여기저기 지긋지긋하게 숨어 있는 마교도들도 다 색출해야겠네요. ‘잠시’ 위탁하는 정도로는 어려울 것 같아요. 음…… 최소한 5년은 걸리려나.”
붓 끝을 입술에 댄 희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내린 손을 주먹 쥔 채 머뭇거리던 모용단은 간신히 말문을 뗐다. 이성이 흔들리며 영향을 받았는지, 흘러나온 목소리는 평소보다 까끌했다.
“그렇다면…… 굳이 저를 증인으로 만드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저 이자를 잡아 지금처럼 추궁하시면 되었을 일 아닙니까. 제게…… 이곳에서 오간 밀담을 듣게 하신 의미가 있는 겁니까.”
“아아,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나 했더니 아무래도 오해를 하신 것 같군요.”
희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안타까운 웃음을 짓고 고개를 내저은 뒤 대답했다.
“나는 이자의 악행을 아예 묻을 생각 따윈 없어요. 죄는 확실히 밝혀야지요. 피해자들에게 배상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가요. 아무렴, 당연해요.”
“그렇다면…….”
“하지만 당장은 아니라는 거예요. 이건 나중에, 우리가 전쟁의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8할 이상의 승기를 잡았을 때 결정타로 끄집어 올려야 할 사안이에요. 남궁영 하나를 저 먼 타지에 풀어 주는 대신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
“난 그 집안의 핏줄은 물론이고 대들보며 기왓장까지 탈탈 털어먹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오래전부터 제멋대로 놀아 대는 꼬락서니가 아주 가소로웠거든. 할 줄 아는 일이라곤 시답잖은 칼질뿐인 시정잡배 주제에 감히 배신이니 멸족이니 지껄이며…….”
낮은 음성으로 음량하게 중얼거리며 싫증 어린 눈동자를 슬쩍 굴린 희는 곧 낯빛을 가다듬었다. 제 얼굴에 가장 어울리는 표정을 찾아 아름다운 미소를 그리고 남궁영을 올려다보았다.
손끝에 징징 울리던 저항의 떨림은 이미 잦아든 지 오래였다. 몸부림치는 벌레도 제 숨통만 조여든단 사실을 체감한다면 고분고분 다리를 오므린 채 안락한 죽음을 기다리게 되는 법. 부러 들으라는 듯 남궁영의 앞에서 현재의 상황과 조만간 닥칠 미래를 차근차근 설명한 희는 그의 선택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자, 맹주님. 결정하실 시간은 충분히 드린 것 같네요. 간단한 양자택일이지요?”
“…….”
“내가 돕는다잖아요. 골라 보세요. 혈육이 다 같이 아등바등 추하게 굴다가 광명교의 손에 황천을 건너실지, 아니면 맹주님 하나라도 바다 건너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실지.”
남궁영은 목숨을 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두 아들을 떠올리고, 막 태어났을 때 한 번 안아 본 게 전부인 다른 아들들도 이어 기억해 냈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딸들과 조카들도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내라고 일컬을 이들은 전부 미색 아니면 집안만 보고 갈취했기에 별달리 애틋할 구석도 없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한 적 없고 가족을 가족이라 여긴 적 없으니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 남궁호관, 남궁옥리, 애초에 남궁이란 함자부터가 다 무슨 소용인가. 여자는 다시 구하면 그만이고 자식은 또 낳으면 그만이다.
비겁한 고민은 금방 종결되었다. 남궁영은 간교한 궁리에만 약삭빠른 인간이었다. 세상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중요했으며, 어딜 가든 나 하나만큼은 성공하리란 괴이쩍은 자신감마저 여전히 잃지 못했다.
어차피 아쉬운 건 저 장사치 쪽이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다름없다면 뜯어낼 수 있는 만큼 받고 말겠다.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남궁영은 고민을 끊고 입을 열었다. 자신이 아는 모든 정보들을 감질나게 흘리며 협상과 흥정을 시도할 요량이었다.
“과, 광명교가 암존을 새로이 키워 내는 대신 되살려 내길 선택한 이유는…….”
그러나 비겁하게 가꾸어 낸 기대는 한 문장을 다 내뱉기도 전에 최악의 방식으로 뿌리 뽑혔다. 남궁영은 본인의 뇌 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다음으로는 잠시 숨을 쉬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귓가가 갑작스럽게 먹먹해지며 웅웅거리는 이명이 들려왔다. 그 너머로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는 무엇인가 싶어 신경을 기울여 보니, 다름 아닌 본인의 처참한 비명이었다.
남궁영은 전신을 빳빳이 굳히고 경련하며 마구 뒤쳤다. 고통에 겨운 고함에 피 끓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좀 멎었나 싶었던 뱃가죽은 격한 발버둥에 못 이겨 다시금 줄줄 피를 쏟아냈고, 목과 얼굴 위로 굵은 핏대가 곤두섰다.
사검에 휘감긴 채 공중에 매달린 거체가 격하게 버둥거리자, 예상치 못한 사태에 멈칫 굳어 있었던 희의 손에서 사정없이 피가 튀었다. 호갑투와 가락지로 친친 둘러 얼추 보호했다곤 하나, 쭉 미끄러진 예리한 실은 쉬이 살갗을 파고들어 상처를 입혔다. 이를 악물고 짧은 신음을 삼킨 희는 남궁영을 놓는 대신 도리어 다른 손까지 거들어 사검을 움켜쥐었다. 팽팽히 당겨진 사검이 순식간에 붉게 젖어 들었다. 과거, 사천에서 이 비슷한 광경을 전해 들은 적 있는 희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이게 무슨……!”
“금제예요! 아월, 푸는 법을 알고 있나요?”
“어, 아, 아니요! 잘 모…… 모릅니다. 설마 남궁영까지 금제에 걸려 있었을 줄은……!”
“섣불리 말하려다 이리된 걸 보아선 본인도 몰랐던 일 같아요. 잠깐, 여와! 죽이면 안 돼요!”
“놓으십시오, 문주님! 금제에 걸린 이상 어차피 죽을 인간입니다. 그럴 바엔 일찍 움직임을 차단하는 쪽이 문주님의 손에……!”
백협맹주 남궁영조차 녹림왕 백호철과 비슷한 금술에 걸려 있었다니, 일찍이 화경을 넘은 고수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교묘한 방도가 있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는데, 남궁영이 여기서 죽으면 일이 대차게 꼬이는데! 조급증에 분노가 치밀어 이를 악물었다. 이 난제를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반의 반 각조차 버틸 자신이 없는 만큼 그를 불러오는 일은 불가능했다. 하물며 그의 처소는 희의 유치한 욕심으로 하오문 가장 깊은 곳에 지어지지 않았던가. 사현이를 놓치고 상심에 젖어 사나흘째 틀어박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으니, 남궁영이 발작으로 사망하기 전에 이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긴 어려웠다.
귀찮게 되었다. 이러면 정말 전쟁밖에 없다. 이 모든 모략의 결과가 고작해야 백협맹주 남궁영의 시신이 되다니 부아가 치밀었다. 남궁영의 죄를 숨기든 덮든 성가신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파 무림이 흰 눈으로 바라보는 사파인 이상 희의 주장은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터였다.
빌어먹을, 이래서 내가 수년에 걸쳐 차곡차곡 밑바닥부터 쌓아 올린 건데. 비좁은 견해에 물들어 눈과 귀를 막은 인간들에겐 화술은커녕 어떠한 증거와 증인도 소용이 없을 텐데.
희는 손아귀에 가해지던 힘이 약해지기 시작한 찰나 잠시 낭패감을 느꼈고, 그다음엔 빠르게 받아들였다. 진행하던 안건이 엎어지면 주저앉아 한탄할 시간에 빨리 수습할 궁리를 해야 했다. 그나마 계월이 멀쩡히 돌아와 다행이었다. 계월은 사현이 어디 있는지 얼추 알고 있을 테니, 상심하셨을 그분께 자그마한 선물은 드릴 수 있을 듯했다.
희가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등 뒤에서 맑은 풍경 소리가 들렸다. 현실감 없이 영롱하고 고운 음색이었다.
희의 뒤편에는 곧장 창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희는 멀리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좋아했기에 낮이 되면 으레 집무실의 모란무늬 격자창을 열어 두었다. 창틀의 모서리에 바닷새와 적란운을 본뜬 첨령을 걸어 놓으면, 이는 곧 선선한 바람을 싣고 오는 정령이 되어 기분 좋게 재잘거리곤 했다.
하지만 남궁영이 들어오기 전에 분명 일찍이 닫아 두었는데. 백협맹주를 핍박하는 모습을 들켜 봤자 좋을 게 없으니 꼼꼼히 걸어 잠갔는데.
이 지저귐은 과연 누구의 방문을 알리는 예고일까.
얇은 옷깃이 희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뺨을 감싸는 실바람에 진한 약 내음이 묻어났다. 알아차렸을 땐 이미 나부끼는 흰 머리카락 타래만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표정 한 자락 내보이지 않은 채 무게감 없는 걸음으로 내려선 초윤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백협맹주가 아무리 버둥거려도 벗어나지 못했던 거미줄 올가미를 한 손으로 훑어 걷어 버리고, 다른 한 손으론 일그러진 남궁영의 얼굴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파리한 손등 위로 곧은 뼈대와 선명한 핏줄이 돋아났다. 악력을 조절할 여유 따윈 없었는지 쩍 벌어지는 남궁영의 입 안에서 으드득 어금니 빠지는 소리가 울렸다.
초윤은 그 앞에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어렴풋한 의문이 명확한 형태로 뭉쳐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전에.
퉤.
약선 초윤이 찢어질 듯 열린 남궁영의 구강 안으로 대뜸 타액을 뱉었다.
증타(憎唾)한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다급하나 멸시 어린 동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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