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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187화 (187/257)

187화

초윤은 그대로 남궁영의 입을 틀어막은 뒤 한 걸음 성큼 진각을 뻗었다. 무릎을 굽히고 몸을 숙이며 남궁영의 뒤통수를 팽개치듯 바닥에 내리꽂았다. 사적인 감정이 섞인 한 수였으나, 머리가 터져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널브러진 남궁영의 옆에 그대로 가만히 앉은 채 고개를 수그렸다. 희고 긴 머리칼이 초윤의 옆얼굴을 가리자, 집무실에 자리한 이들의 눈에는 이따금 꿈틀거리며 경련하는 백협맹주의 팔다리만 보일 뿐이었다.

아연하게 굳어 있던 이들 중 하오문주 희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야, 약선 대협? 어떻게 아시고 여기까지 벌써…….”

“내가, 헉, 모셔 왔습니다.”

초윤을 따라 뒤늦게 올라온 모용서가 창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네 명분의 시선을 받으며 땀에 젖은 앞머리를 후 불어 넘겼다. 제 말을 듣자마자 달리기 시작한 약선 초윤을 따라잡는답시고 짧은 순간 극한까지 경공을 끌어 올린 탓에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지만 헐떡거릴 시간은 없었다.

“백협맹주의 기운과 비밀(秘密)을 내가 분명 알고 있건만 문주께서 부득불 형님만 데려가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다 했는데.”

“그건 저 방이 한 사람분의 기척만 숨길 수 있어서…….”

“다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나 없었으면 큰일 날 뻔한 것 같은데요. 내가 저분 찾는답시고 이곳을 얼마나 뻔질나게 뛰어다녔는지 아십니까? 앞으로는 나만 빼놓고 이런 일 벌이지 마세요. 섭섭합니다.”

“……창틀에서 내려오세요, 모용 공자님.”

초승달처럼 웃는 눈에서 선명한 경고를 알아챈 모용서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바닥에 내려왔다. 그리고 기특하단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모용단의 곁으로 종종 다가갔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남궁영이 시기 좋게 꺽꺽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다른 이들의 눈길을 다시금 잡아끌었다. 그때까지도 가만하던 초윤이 슬며시 머리를 들자, 손톱만 한 갈색 벌레 한 마리가 남궁영의 코에서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 장면이 모두의 시야에 들어왔다. 희는 인상을 와락 구기며 입가를 가렸다.

“저게 그 고독인가요?”

“그렇습니다. 수많은 금제 중에서도 가장 확실하고 악랄한 방법입니다.”

굳건히 서 있던 여와가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남궁영에게서 빠져나온 고독은 초윤의 파리한 손등을 꾸물꾸물 가로질러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몸이 뒤집힌 채 수많은 다리를 버둥거리는 벌레의 위로 약선의 손바닥이 묵직하게 떨어졌다. 날파리를 잡듯 별것 아닌 동작이었지만 담긴 힘은 순간 층계를 진동케 했다. 초윤의 손바닥과 바닥 사이에서 흘러나온 매캐한 독기가 나무로 엮은 마루를 삭히자, 희는 눈살을 찌푸리고 계월을 부르며 물었다.

“아월, 백협맹주가 금제에 걸렸던 사실을 몰랐다고 했던가요?”

“예? 예……. 전혀 몰랐습니다. 보통 마교 외부의 협력자들에게 고독을 심는 건 제가 속해 있던 오운단의 일이었는데, 설마 저만한 고수…… 고수가 맞나? 어쨌든 저자의 무공을 감당할 금제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벌레로 제어할 수 있는 경지는 초절정까지인 줄로만 알았는데요.”

“고수가 맞지요. 아무렴요. 나는 무기의 힘을 빌렸고, 여와는 본디 무림 제일가는 살수였으니 제압할 수 있었던 인물이에요. 그런데 금제라…….”

피어오르는 독기를 입김으로 날린 초윤이 손을 가볍게 털었다. 그리고 남궁영의 무복 앞자락을 성의 없이 열어젖힌 뒤 가슴과 복부, 머리와 얼굴의 혈도를 손끝으로 콱콱 눌렀다. 분수에 넘치게도 약선 초윤의 처치를 받은 남궁영이 눈과 코에서 검은 피를 왈칵 쏟았다. 희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암존이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움직임을 멈추게 만드는 사술’을 쓴다고 했던가요?”

“어…… 예.”

“그 밖에도 다른 비술을 쓰진 않던가요?”

“어…… 쓰는 모습은 못 봤지만, 그냥 존재 자체가 비술일 겁니다. 이 몸이 어쩌구 본래 몸은 저쩌구 하던 걸 봐선 암존의 정신머리만 똑 떼어다 지금 육체에 넣은 것 같았거든요. 아, 광동성에 들어와선 들킬까 봐 연락을 못 드렸는데, 암존은 지금 요만한 어린애입니다. 약선 대협처럼 머리털이 하얀데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군요.”

“이 세상이 자신과 다른 형상의 인간을 단 한 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적이 있던가요. 그게 비술이었겠지요. 음, 이를 어쩐다. 초월량이 임 소저와 천보도 소협에게 괜히 손을 댔다면 큰일인데…… 아니, 약선 대협이 계시니 최악은 아닌가.”

“아, 그…… 문주님, 그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사현이 초월량의 손에 아주 크게 다쳤다는 사실도, 아까 사영을 남궁호관에게 넘겨주고 왔다는 사실도 전달하는 걸 깜빡했다. 정확히는 광동성에 들어온 뒤로 꼬리 잡힐 일을 피한답시고 몸을 사리느라, 그리고 하오문에 들어와선 무려 백협맹주를 낚게 되느라 미처 떠올리지 못한 거지만 어쨌든 급한 정보를 잊어 먹었단 것만큼은 계월의 실수였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멋쩍게 만지작거리던 계월이 말했다.

“천보도를 잡아 온 사람은 남궁이 아니라 초월량입니다. 미친놈들이 다 그렇듯 충동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누나도 데려오라고 하더군요. 자세한 내막은 제 직급이 낮아서 잘 못 들었지만…….”

“……초월량?”

그때, 방 저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담한 어조로 깊게 울리던 음성은 어느새 습한 늪지처럼 가라앉아 듣는 이의 불안감을 찰박였다. 저승에서 앗아 온 목숨을 한 손에 붙든 채 그늘진 눈으로 계월을 노려보는 이는 이제 와 선인(仙人)보단 광인(狂人)에 가까워 보였다.

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계월은 저도 모르게 발꿈치를 들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눈을 돌리거나 등을 보이면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폐부에 엄습하는 두려움이 어떤 약보다도 끔찍한 독극물이었다. 기물로 기척을 감춘 채 멀리서만 지켜보며 느꼈던 공포는 조족지혈에 구우일모였다.

“……네게서 낯익은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약선 초윤이 남궁영을 내버려 둔 채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게 질린 안색으로 조금 비틀거리는 듯싶더니 순식간에 계월의 앞으로 다가갔다. 억센 손아귀로 멱살을 쥐어뜯고 그 속에 감춰 두었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만 한 해시계를 내려다보는 눈에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제 간자예요, 약선 대협.”

때마침 튀어나온 희의 맑은 목소리가 초윤을 가로막았다. 희는 본능적으로 덜덜 떨리던 턱을 한차례 질끈 악문 뒤 애써 약선 초윤을 올려다보았다. 몸에 밴 반사작용으로 검을 쥐던 여와도, 튀어 나가려는 아우를 한 팔로 가로막은 모용단도 그 순간만큼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래전 서문 소협의 아버지인 주역의 행방을 알아 온 이도, 이제는 대협께 아이들의 행방과 상태를 알려 드릴 수 있는 사람도.”

어디서 묻혀 왔는지 모를 피, 흙 묻은 옷자락과 덜 마른 비 냄새. 우두커니 선 두 다리와 무거운 어깨에서 묻어나는 절망감.

약선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직감한 순간 입을 열길 잘했다. 초윤의 손은 그새 칼날이 되어 계월의 갈비뼈 밑을 겨누고 있었다.

“전부 계월뿐이에요. 그러니 이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든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구름 위에서 고상하던 이를 드디어 인세로 끌어 내린 기분이었다. 그의 분노에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희는 이 가공할 화살이 올바른 목표를 노린다면, 정확히는 자신과 제 사람들을 피해 다른 곳을 향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세 치 혀를 놀릴 수 있었다.

용의 역린을 겁도 없이 헤집어 당장의 고통으로 눈 돌리게 할 수 있었다.

“약선께서 찾아다니시던 광천마제 초월량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요. 그를 끄집어내는 일이 먼저 아닐까요, 대협.”

그게…… 누군데?

내가 누굴 찾아다녔다고?

온통 사현이 생각밖에 없었던 초윤은 아연하게 인상을 썼다. 그저 원작에서 비중 있는 악역이었던 남궁영이 이곳에 왔다는 말을 듣고 이놈의 짓거리다 싶어 달려왔을 뿐이었고, 허둥지둥 올라와 보니 범인 놈이 죽기 직전이어서 일단 살렸을 뿐이었다. 추궁해야 하는 인간의 뇌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벌레를 뽑아냈을 뿐이었고, 납치를 사주한 이가 남궁영이 아닌 다른 인물이란 말을 들어 벌떡 일어났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사영이가 잡혀간 자리에 있었던 희미한 기척을 감지해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 뿐이었다.

근데 초윤은 알지도 못하는 이름이 나와 버렸다. 엄청난 한자들만 모아 만든 별호로 봐선 굉장한 인간인 것 같은데, 들어 본 적도 생각한 적도 떠올린 적도 없는 인물이었다.

아니…… 정말 내가 모르는 사람이 맞나?

-……월량…….

이상한 기시감이 엄습했다. 오랫동안 학습당해 몸에 밴 듯, 혹은 막대한 무게에 짓눌린 듯 생리적인 구역감이 목 끝에서 넘실거렸다. 어째선지 그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뛰었다. 불쾌하게, 불편하게, 불안하게 박동했다. 무림인의 강건한 몸을 갖게 된 뒤 처음으로 토할 것 같았다. 축축하고 비린 짐조를 생으로 다 집어삼켰을 때보다 거북하고 메스꺼웠다.

초윤은 계월을 붙들었던 손을 저도 모르게 놓아 버렸다. 다른 손에 든 성침월구도 놓쳐 버렸다. 희귀한 기물이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전에 서둘러 받아 낸 희가 조심스레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초윤은 그에 답해 줄 여유가 없었다.

-아윤, 진정하렴. 무서워할 것 없어.

마른세수를 하는 자신의 양손이 가늘게 떨렸다.

‘초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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