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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188화 (188/257)

188화

월량, 월량. 그래, 잘 생각해 보니 기억 속에 있는 이름이었다. 얼마 전 사현이를 찾으러 길거리를 헤매던 도중 끔찍한 두통을 비집고 떠오른 ‘초윤’의 경험 속에 있었다. 친분을 가진 듯한 아이들이 주위에 처참히 죽어 있었고, 그 가운데 어린 ‘초윤’이 안겨 있던 자가 바로 월량이었다. 둘 사이에 오가던 대화나 신뢰를 봐선 최소한 청소년기 ‘초윤’의 정신적 버팀목쯤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런 것치곤 말을 모질게 했지만…….’

어쨌든 ‘초윤’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자꾸만 술렁이는 심장도, 가늘게 요동하는 몸도 전부 ‘초윤’의 감정 때문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반쯤 맛이 간 채 앞뒤도 재지 않고 남궁영을 살려 놓은 초윤은, 우습지만 그 덕분에 조금 정신을 차렸다. 항상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럽게 초윤을 지탱해 주던 몸뚱이가 앞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도리어 이성이 벼려졌다.

속에서 들끓던 감정을 식히듯 찬 숨을 내뱉자, 이쪽을 지그시 응시하던 희가 말했다.

“처음부터 천보도 소협을 데려간 자가 초월량이란 사실을 알고 계셨지요? 그래서 그토록 노골적으로 바깥에 나가 꾀어내신 거지요?”

“…….”

“천혜지봉 제갈설린을 이쪽으로 끌어오셨을 때부터 짐작했어요. 천보도 소협이 모용 공자와 얽히면 대협에 관한 정보를 필연적으로 흘리게 될 것도, 그리하여 언젠가는 이들이 기어코 대협을 찾으러 올 것도 이미 예상치 않으셨다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덕분에 지금 가장 큰 위기가 닥친 이곳에 무림 정파의 저력이 모여 있게 되었지요.”

희의 말을 들으니 그나마 남아 있던 동요도 다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내가 너도 아닌데 그럴 리 없지 않냐고,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의 주역과 얽힌 덕을 톡톡히 본 것뿐이라고 변명하기엔 한참 늦은 것 같았다. 애초에 부정을 해 봤자 다들 믿지도 않을 듯했다. 그 증거로, 저쪽 구석에서 형과 함께 서 있던 주인공 모용서마저 설마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냐는 듯 망연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초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만 새로운 암존을 탄생시킨 것도 아니고, 설마 광천마제를 무덤에서 끄집어낼 줄이야……. 역시 일을 너무 크게 벌이지 않길 잘했어요. 약선께서 직접 움직이시기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하려고 했는데, 이것마저도 대협의…….”

“그만. 지금은 공로를 치하하거나 감탄할 때가 아닙니다.”

더 듣고 있다간 아주 천지 만물이 약선의 뜻대로 돌아간다고 할 것만 같았다. 초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희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희가 다른 발언을 하지 못하게 선수를 쳤다. 다행히도 아주 틀린 핑계는 아니었다.

“백협맹주의 목숨은 붙여 두었습니다. 복부의 출혈도 멎었고, 단전은 부러 복구하지 않았습니다. 저대로 이틀가량 요양하면 정신을 차릴 겁니다. 고독의 저항이 거세고 독기가 강해 뇌에 충격이 남았을 수 있으니 정신을 차린 뒤로는 청혈단을 꾸준히 먹이십시오.”

“예, 대협. 덕분에 하오문이 큰 위기를 피하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만족하셨다면 이만 제 아이들의 행방을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희를 내려다보던 초윤이 슬며시 눈을 돌려 계월을 보았다. 짧게 친 머리카락, 새까만 눈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는 초윤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에 띌 정도로 흠칫 어깨를 튕겼다. 초윤은 입 안에서 단어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느리게 내뱉었다. 그 누나도 데려오라고 하더군요. 심드렁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아마도 사영을 데리고 갔을 사람. 초월량이라는 인물에게 넘겼을 사람. 희가 마교에 꽂아 넣은 첩자란 사실을 들었고, 또 현 상황에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못 다 풀어낸 증오가 아직도 혈관을 돌았다. 위압감에 짓눌린 계월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밭은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랑곳할 수 없었다.

“내 아이를 어디에 갖다 바쳤지?”

“……죄, 죄송, 죄송합니다. 사영 소저는 남궁, 남궁호관에게…… 비녀를 챙겨서.”

“인과를 알았으니 함부로 책망할 생각은 없다. 그저 묻는 말에만 똑바로 대답하거라.”

절박한 손이 계월의 어깨를 움켜쥐고 한 차례 흔들었다. 채근당한 계월이 식은땀을 흘리며 덜덜 떨었다.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초윤의 감정과 동화된 공기가 차게 식어, 곁에 자리한 이들은 모두 한기에 감싸였다.

모두를 겁주어 긴장시킨 주제에, 초윤은 한없이 간단하고 근본적이며 한낱 필부와 다름없는 질문을 불쑥 내뱉었다.

“내 아이들은 무사하더냐?”

이는 초윤 본인마저도 당황케 했다.

월량이라는 자는 어째서 사현을 데려갔는가. 너희는 왜 보름이 넘어서야 기어 나와 모습을 보였는가. 이렇게 이 자리로 도망칠 예정이었다면 사영을 꾀어내기 전에 하지 왜 이제야, 어째서 지금에 이르러서야 이곳으로 와 범인 따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단 듯 말하는가. 묻고 싶은 게 한없이 많았다. 이 입을 뜯어 벌리고 목을 쥐어짜 내서라도 모조리 듣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분통한 의문을 비집고 튀어나온 질문이라는 게 고작 저것이었다. 내 아이들은 다치지 않았나.

그리고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게 무엇보다도 중요했구나.

목매단 끈을 간신히 붙잡고 버티는 꼴이었다. 희망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괜찮다는 말 한마디만 듣는다면, 그래도 심히 다치진 않았다는 대답 한마디만 받아 낸다면 그대로 동아줄이 될 것 같았다. 다시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계월은 시선을 피했다. 두렵다 못해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자실(自失)한 채 잠시 얼어붙었던 초윤이 애써 입을 열었다.

“대답하거라. 무사하더냐?”

“…….”

한 번 더 세차게 흔들린 계월이 도와 달라는 듯 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영과 사현에 관해 전해 들은 게 없는 희 또한 심장이 떨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미가 심지처럼 타들어 갔다. 초윤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대답하래도!”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울렸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창밖으론 해가 기울고 있었다.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하늘 밑으로, 수많은 무림인들이 하오문의 무너진 외곽을 넘어 들어왔다. 우각 나팔의 소리가 문도들의 미약한 비명을 덧칠하고 걸쭉한 핏물이 흰 돌길을 가렸다.

너희는 왜 보름이 넘어서야 모습을 보였는가.

초윤은 그제야 그 답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모용서가 아득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모르는 걸 저 애가 알 리 없겠구나. 광천마제 초월량이든, 느닷없는 습격이든. 초윤은 감흥 없는 동정심을 느꼈다. 희가 처음 들어 보는 다급한 어조로 호위무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여와, 나를 데리고 내려가 줘요! 주동자를 찾아야겠어요. 분명 그자일 거예요. 암존, 그자가 아니면 이런 짓을 벌일 리 없어요.

그에, 호위무사는 처음으로 자신을 주인의 손목을 잡아 단호하게 떼어 냈다. 안 됩니다. 문주님은 지금 안전한 곳으로 가셔야 합니다. 주륜각은 가장 먼저 표적이 될 테니 하오문을 완전히 벗어나셔야 합니다. 이런 아둔패기 같으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진법이 무너졌어요. 내가 가야 해요. 아니, 됐어요. 나는 전음으로 지시를 할 테니 당신은 남궁영을 데리고 당장 내려가서 장강으로 향하세요. 악양으로 가서, 가장 큰 기루의 루주를 찾으세요. 빌어먹을, 여와! 내 무사라면 내 말을 들어요!

험악한 말싸움이 오가는 와중, 가장 먼저 창밖으로 몸을 던진 사람은 모용단이었다. 그가 흘린 말 한마디가 초윤에게는 선명히 들려왔다. 백협맹의 무사들이, 어째서……. 분명 광동성의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긴. 백협맹주 남궁영은 〈귀환영웅〉에서부터 마교의 끄나풀이었다. 백협맹의 무장 단체를 다 휘어잡고 있는 막강한 캐릭터였고, 주인공 모용서조차 연재분의 중후반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겨우 그자를 두들겨 팰 수 있었다.

그런 중간 보스가 지금 초윤의 뒤에 대자로 뻗어 있었으니 꼬여도 단단히 꼬일 게 당연했다. 전쟁이 앞당겨질 만했고, 예상치도 못한 일이 터질 법도 했다.

그런데 원작에서는 하오문이 습격을 당했던가?

하오문은 분명 무림인보다 민간 구성원이 더욱 많은 문파였는데……. 그들을 모두 지켜 내고 이끄는 게 사기급 캐릭터인 희의 역할이었는데.

이토록 많은 문도들이 급작스럽게 쳐들어온 백협맹의 칼날에 속절없이 죽어 나갔던가?

그런 장면이 있었나?

들려 오는 모든 대화와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부터 현실감이 느껴져선 안 됐다. 여긴 소설 속이었다. 희는 소설 속의 캐릭터였고, 여와 역시 소설 속의 인물이었다. 그러니 저것 역시 소설 속의 살인이었고 문장뿐인 살육이었다.

삼십 리 밖의 아기가 넘어지는 진동을 기민하게 감지하던 촉각은 생명을 잃고 나뒹구는 수십 구의 무게를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다. 이것 또한 소설 속의 사건이었다.

8층 위에 있는 주루에서 술잔 채우는 소리를 실어 오던 청각은 허무하게 멎는 울음과 애원을 듣고 말았다. 이것 또한 소설 속의 사건이었다.

바닷바람 사이 생선의 비린내도 분류하던 후각은 차곡차곡 겹치는 피 냄새를 맡아 냈다. 이것 또한 소설 속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은…….

내가 키워 온 아이들은, 사영이와 사현이는 소설 속에선 묘사도 되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원작에 한 줄 비치기는커녕 장면 뒤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어 캐릭터조차 되지 못한 인물이었다. 보호자인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초윤이 맨손으로 땅을 파고 관도 없이 매장한 아이들이었다. 그 위에 샛노란 꽃을 심고 해마다 가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뒤뜰에 묻은 것이 밀봉한 술동이밖에 없어 얼마나 안도했던지.

그리고 천오는 철저히 자극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부모를 잃고 멸문지화를 당한 것 정도로는 한 이야기의 악역을 떠맡기에 부족했다. 인간성을 잃고 무자비한 교주가 되었다는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평생 학대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눈에 담고 의미를 둔 모든 것들이 주천오의 인생을 더욱 혹독하게 몰아세울 소재가 되었다. 물건을 귀애하면 반드시 부서지고, 사람을 신뢰하면 반드시 배신당했다. 긁어모은 파편이 쓸모없는 잡동사니가 되고 등에 남은 흉터는 그림 같은 형상을 이룰 무렵 주천오는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접고 염라군으로 거듭났다.

그런 아이들을 데려다 여태껏 키웠는데…….

이 또한 소설 속의 인물에 불과할까?

만일 아니라면 나는 내가 목도한 이 참상이 현실이란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데.

그것도 어쩌면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납득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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