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아, 목소리가…….
“스승님, 저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초윤은 남자의 입과 눈을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양손으로 초윤의 어깨를 붙잡더니 시선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말했다. 가까이 바라본 그의 눈동자는 들여다볼수록 바닥없는 절벽처럼 깊기만 했다.
“저입니다. 서문천오, 스승님의 제자입니다. 너무 늦게 돌아와서 죄송합니다.”
“천…….”
천오?
익숙한 이름자를 곱씹는 순간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기다렸다는 듯 비강을 가득 채우는 피비린내와 쟁쟁하게 고막을 때리는 전투의 소음이 오감을 혹독히 몰아붙였다. 초윤은 몸서리치듯 취우를 떨어트리고 손을 올려 천오의 뺨을 이리저리 만졌다. 제 몸인데도 처음 들어보는 위태로운 음성이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천, 천오야. 아가, 어디를 돌아다니다 이제야 들어오는 것이냐. 초월량, 그자가 네게도 해를 끼쳤더냐. 다친 곳은, 어디 아픈 곳은. 어째서 네 기운이…….”
다가오는 너를 내가 알아채지 못할 리 없는데 왜 몰랐지. 너무 많은 말들이 치밀어 오르며 목구멍을 꽉 막았다. 시야는 흔들리고 몸은 떨렸다. 차게 식은 손이 천오의 턱선과 목을 거쳐 어깨로 내려왔다. 엄지로 빗장뼈를 덧그리고 단단한 팔을 매만졌다. 직접 만져 가며 안위를 확인하던 초윤은 자신을 붙잡은 천오의 손마저 팔뚝을 쥐고 떼어 냈다.
그리고 심장이 꽉 조이는 듯한 격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너, 손이…….”
천오의 손은 엄지와 소지의 중수골이 드러날 정도로 사정없이 물어뜯긴 채 너덜너덜하게 망가져 있었다.
단순히 피부가 찢겨 나간 게 아니었다. 근육과 힘줄이 뜯겨 나가 뼈가 보일 정도였다. 처참한 열상 주위에 온통 말라붙은 혈흔으로도 모자라 새로운 피가 연신 솟았다. 초윤은 시선을 내려 온기가 서려 있는 제 팔을 보았다. 핏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스승님의 하명을 어기고 담장을 나섰다가 자신을 제 사백이라고 주장하는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자의 이름은 듣지 못했지만 스승님을 아윤이라고 불렀으며, 사형의 행방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내가 너를 외면한 그 잠깐 사이에 이리되었구나.
“위협적으로 굴기에 응전하였지만 제자가 미흡하여 붙잡혔습니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구속된 상태였고, 무슨 수를 썼는지 내공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너는 이 수라장을 가로질러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와 주었구나.
“상처는 심려치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스승님. 수갑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물어뜯었을 뿐입니다. 일반적인 철이 아니어서 애를 먹은 탓에 조금 지체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더 일찍…… 위험을 알려 드리고 싶었는데.”
만신창이가 된 손으로 실성한 나를 붙잡아 주었구나.
들쑥날쑥 호흡하던 초윤이 천오의 목에 팔을 둘러 와락 끌어안았다. 어깨에 턱을 얹은 채 초점 없는 눈을 이리저리 헤맸다. 볼품없이 덜덜거리는 제 몸뚱이가 느껴졌으나 동요를 가라앉힐 방도가 없었다. 스스로를 향해 날을 세운 감정이 자꾸만 가슴과 목을 할퀴었다.
“돌아왔으니…… 돌아왔으니 됐다. 무사하니 됐다. 손은…… 네 손은 이 스승이 어떻게든 낫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천오야. 무섭지는 않았느냐? 어찌 이리…… 무모해.”
내 죄고 내 잘못이라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워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초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듯 잠시 경직되었던 천오는 곧 스승의 목에 얼굴을 묻고 콧잔등을 비볐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너절한 양손 대신 멀쩡한 팔로 초윤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변명 같은 말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무섭지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스승님. 말씀하신 바를 어겨 죄송할 따름입니다. 스승님께서 애써 쌓아 주신 무공을 잃고 사형을 데려오지 못한 것도…….”
“됐대도.”
약간의 간격을 두고 중얼중얼 흘러나온 변명 같은 말을 단박에 끊은 초윤이 이를 악물었다. 입술을 짓씹고 눈을 감으며 미간을 일그러트리는 표정은 적나라한 고통과 닮아 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도 모자랄 판국에 내가 정말 실성을 했구나. 잠시라고는 하나 아이들마저 잊은 채 아무런 고민도 없이 사람을 죽이다니. 지나온 길을 돌아보기 무섭고 스스로가 끔찍했지만 자책할 시간은 없었다. 후회는 그만한 여유가 있을 때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탈력감 어린 한숨을 짧게 내쉰 초윤은 천오의 등에 손을 얹고 자신의 내공을 천천히 흘려 넣었다. 실처럼 가느다란 기운이 천천히 천오의 기맥을 돌며 내부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언제나 그랬듯 접하고 나서야 떠오르는 기억은 성가시기만 했다.
“……해건금침(海乾禁針)에 당했구나.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바늘 72개로 기맥을 가로막아 목숨까지 메마르게 만드는 수법이다. 낫게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예, 스승님.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괜찮아. 천오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약선의 힘이라면 낫게 할 수 있었다. 손도, 무공도 전부 돌려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신없이 날뛰던 심장이 조금 안정을 되찾는 느낌이었다. 이제 초월량을 찾아 사영과 사현을 되돌려 받으면 될 일이었다.
이성을 다잡기 무섭게 멀리서 들려온 처절한 비명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초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천오의 손을 보고 충격을 받아 뒷전으로 미뤄 놓은 소음이 고막을 때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초윤은 포옹을 풀고 천오의 손목을 잡았다. 허리를 숙여 떨어트린 검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앞서가며 입을 열었다.
“주륜각에 진법을 쳐두었다. 네 사저와 사형을 찾아올 테니 들어가서 꼼짝 말고 기다리거라.”
“예?”
“백협맹의…….”
그러고 보니 지금 하오문을 습격한 이들은 십이 년 전 천오의 세가를 멸문시킨 흉수와 동일했다. 시간이 오래 흘렀다지만 일반인의 수명을 훌쩍 뛰어넘는 무림인인 만큼 당시의 참사에 관여한 인간이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다.
천오가 이를 알면 어떻게 나올지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자신의 반밖에 오지 않는 일곱 살이었을 적에도 태연히 그들의 목을 뽑아 가축처럼 매달고 싶다 말하던 아이가 아닌가. 평소 같았다면 자신의 동행하에 너 하고픈 대로 하라 말했을 테지만, 천오의 상태는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가차 없이 물어뜯은 양손은 주먹조차 쥐기 어려웠으며 무림인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내공은 감지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바닥나 있었다.
이걸 어쩌지. 초윤은 멈추지 않고 걸어가며 고민했다. 하지만 혹사당한 정신머리는 아무리 쥐어짜도 그럴듯한 거짓을 꾸며 낼 경황이 없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이었다.
“……백협맹주 남궁영이 마교와 결탁하고 정파를 기만했단 사실이 자드락났다. 그를 제압해 최악의 사태를 피하려 했으나, 초월량이 직접 이 일에 관여했다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초월량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는…….”
-다……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어요, 형님.
새로운 사실을 접할 때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면, 초월량이라는 이름자를 들었을 때 일찍이 떠올렸어야 하지 않나. 그러나 불쑥 치미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불쾌한 장면뿐이었다. 초윤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초윤’이 더 알려 주기 싫어하는 듯하니, 그럴듯한 설명을 도출해 내야 했다.
“내…… 형님이시다. 어렸을 적에 도움을 받았지.”
-형님은 갑자기 쓰러지시고, 모두, 그렇게…….
“나를 많이 아껴 주셨던 분이다.”
-너도 하얗게 변했구나. 눈이 내린 것 같아.
“걷기로 한 길이 달라 갈라선 지 오래되었는데, 왜…….”
-나는 너를 많이 애중하니 괜찮다만…….
단편적인 기억을 되짚던 초윤이 고개를 들었다. 정신없이 벗어났던 주륜각이 저 앞에 보였다. 많은 이들이 넘나들던 대문은 초윤이 닫아 둔 대로 굳게 잠겨 있었고, 각종 마차와 화물이 지나던 공터는 널브러진 시신과 고인 피 웅덩이로 지저분했다.
초윤이 지나가며 한차례 정리한 탓인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한 주위와는 달리 주륜각 둘레로는 음산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천오를 피신시킬 작정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던 초윤은 전각 앞에 즐비한 죽음들 사이 서로에게 기대앉은 두 명의 인영을 보았다.
아득한 예감에 조금씩 걸음이 느려졌다.
“왜……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 갑작스레 나타나셨는지 모르겠구나.”
“정말로 모르겠어?”
혼잣말 같은 끝맺음에 등 뒤에서 날아온 대답은 익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초윤은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만 멍하니 시선을 주었다. 스승님, 그자입니다. 천오의 나직한 경고가 들려왔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어렸을 적에 도움을 받았다, 많이 아껴 주셨다, 뜻이 달라 갈라졌다…….”
힘없는 몸을 함께 지탱한 채 주저앉은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반쯤 잘린 귀에서 흘러나온 피에 뺨 한쪽이 엉망인 사현이가,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뚝뚝 떨어진 핏방울이 허벅지를 다 적신 사영이가 망막에 박히고 뇌리에 새겨졌다.
초윤이 남매를 향해 한 발자국을 떼었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다 한들 내가 너에게 그것밖에 되지 못했다니, 상심이 크구나.”
그러나 미처 나아갈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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