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깨어나 보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들려오잖아. 이백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너는 멀쩡히 중원 땅에 뿌리를 내렸고, 나는 고작해야 네 빛바랜 과거가 되어 있다니.”
“……형님.”
“내가 마치 극복하여 더는 돌아볼 일 없는 역경이라도 된 기분이었단다. 하지만 우리는 겨우 그리 치부될 연이 아니지 않느냐, 윤아.”
월량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발꿈치를 세우고 양손을 들어 올려 초윤의 뺨을 감쌌다. 어린 손가락으로 흰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귀를 스치고 지나가선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초윤은 월량과 시선을 마주치기만 할 뿐 미동도 없었다.
“나는 정말 더없이 상심해서……. 억울하고 서럽고 네가 너무 무정해서.”
평온한 목소리와는 달리 힘이 들어간 손끝엔 근질거리는 감정이 실렸다. 어루더듬듯 꿈틀거리는 마디마디에 얇은 머리카락이 엉켰다.
이윽고 월량은 헝클어트린 머리채를 꽉 움켜쥐고 잡아 내렸다. 표정 없고 수심 깊은 아우의 얼굴이 숨 닿을 듯 가까워졌다.
“도무지 가만 있을 수가 없더구나.”
“…….”
“내가 잠들어 있던 시간을 되돌릴 순 없으니, 도대체 어떤 꼬맹이들이 무슨 방법으로 내 아우를 홀렸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다. 너는 제자를 들일 만한 성격은 못 되지 않니.”
홀리다니 무슨 헛소리야! 하윤은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초윤이 그저 얌전하게 고개를 숙인 채 월량의 손길을 용인하고 있으니 아무리 노발대발한들 겉으로 새어 나가진 않았다.
이렇다 보니 하윤의 마음만 조급해졌다. 등에 꽂히는 절박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매몰찬 말을 들은 천오가 이도 저도 못 한 채 불안해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정신을 차렸으니 이런 미친놈 따위 버려두고 애들 상태부터 봐야 하는데 뭐 하는 짓거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잠시 침묵하던 초윤이 입을 열었다. 하윤은 그제야 왜 초윤이 이 주위로 차음막을 펼쳤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천산(天山)의 황무지에는 여전히 주인 잃은 검 수백 자루가 꺾이고 꽂힌 채 모래바람에 녹슬고 있습니다.”
“간악한 꾀임과 교활한 수작으로 내 아우를 농락하려 들었던 자들이지. 그들의 무덤이라면 황무지로도 족하다.”
“제 운예검(雲霓劍)은 형님의 가슴에 꽂혀 있으며, 그 모든 일은 그저 시간에 묻혔을 뿐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새 검을 찼구나. 취우로 보이는데, 차라리 내 것을 쓰지 왜 그리 뭉툭한 놈을 가져왔어.”
“……여태 배운 게 없으십니까.”
“배운 게 없긴. 멀쩡히 살려다 돌려주지 않았니.”
월량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마치 잘한 일을 자랑하며 칭찬을 기대하듯 산뜻하고 생기 있는 표정이었다. 멀쩡하다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옹송그린 아이들의 허벅지 위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직접 본 하윤은 솟구치는 살심에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이 없었는지, 월량은 태연하게 생색을 내고 서운함까지 내비쳤다.
“평소에는 조용한 놈일수록 화가 나면 막무가내라는 걸 저번 경험으로 톡톡히 알았다. 하물며 이번에는 다른 이도 아니고 내 귀여운 사질들 아니더냐. 죽일 생각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는데도 투정이 많아.”
“난주수경해건금침(攔住水經海乾禁針)으로 생기를 마르게 해 놓으시고선 죽일 생각이 없었다니요.”
“……그래서, 믿지 못하겠느냐?”
역겨울 정도로 명랑하던 공기는 월량의 한마디를 기점으로 뒤집히듯 바뀌었다. 머리카락을 붙잡고 있던 소년의 손이 살금살금 기어 내려와 목덜미를 감았다. 살아 숨 쉬는 사람다웠던 방금까지와는 달리 기분 나쁜 한기가 느껴졌다. 가까이 마주친 눈동자는 빛없이 흐리고 탁했으며 핏기 가신 안색이 주검 같았다.
어째선지 비슷한 대화를 겪어 본 적이 있는 듯했다. 하윤이 자신의 기시감과 초윤의 기억을 애써 분리하기도 전에, 반갑지 않은 타인의 회상이 뇌리를 점했다.
-이 형의 말을 믿지 못하겠느냐?
맹목적인 신뢰를 요구하는 그의 목소리에 초윤은 어떻게 대답했는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끝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윤은 초윤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감촉을 깨달았다. 식은땀에 젖은 등이나 점차 잦아드는 주위의 분쟁 소리, 그리고 주륜각을 에워싸듯 다가오는 수많은 기척을 어렴풋이 공유했다. 선명해지려던 과거는 흩어지듯 사라졌다. 월량은 찰나의 간격을 두고 말을 이었다.
“시간에 묻혔을 뿐이라니. 고작해야 시간에 묻힐 일이었던 게지. 아직도 그것들이 네 죄인 것 같아 고통스럽더냐? 가슴이 쓰리고 속이 타며 원망스럽더냐?”
“…….”
“내게 칼을 꽂아 놓고서도 그것들이 마냥 아쉬워?”
월량이 초윤의 목에 손톱을 세웠다. 뜨끔한 통증과 함께 피부가 베이며 피가 흘렀다. 노여움에 비틀리는 입술이 어린 얼굴에 어울리지 않던 무표정을 깨트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뭉툭한 송곳니가 매섭고도 난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초윤을 응시하던 월량은 곧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손아귀의 힘을 풀고 팔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뭐, 네 성정이야 일찍부터 우유부단했고……. 이리 미련스러운 걸 알면서도 두고 본 내 잘못도 있으니 채근하진 않겠다. 그나저나 들은 소식이 있는데 마침 잘됐어.”
성정이 뭐 어쨌다고? 하윤이 아는 약선의 행적만 해도 결단력이 없다고 하기엔 영 어려웠다. 특히 지나간 대화로 미루어 보아 초월량은 어떠한 연유로 많은 사람을 죽였고, 견디다 못한 초윤이 사형을 직접 찔러 죽인 듯한데 이 일을 직접 겪은 월량이 제 입으로 우유부단을 언급하다니 더 현실성이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긴 하구나. 눈앞에서 펼쳐지는 징그러운 악연에 질려 버린 하윤이 보이지도 않을 인상을 쓸 찰나, 월량은 더욱 기함할 짓을 저질렀다.
제 손끝에 묻어난 피를 내려다보다가 덥석 핥아먹은 월량이 맛을 감정하듯 혀를 우물거렸다.
“연신단에 이런 효능도 있었다니 전혀 몰랐어. 하기야 흡수에 실패하고도 살아남은 게 너뿐이니 교단이 모를 법도 하지. 현경에 들어서야 뒤늦게 발현되는 체질이 있는 건가? 덕분에 중원을 뒤집을 수고는 덜었으니, 돌아가면 확인해 보자꾸나.”
“……제가 돌아갈 것 같습니까?”
“가지 않으면?”
월량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초윤은 우두커니 선 채 쏟아지듯 들려오는 폭력적인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의도한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 네가 박멸하지 못한 교단은 도리어 교묘한 세를 불렸고, 네가 없애지 못한 나는 이렇게 되살아났다. 날 죽이는 법은 찾아내지도 못했지? 네 생애에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해낸 일이 있더냐?”
“저는…….”
“나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절에서 변한 게 없다, 윤아. 너는 나를 배반하고서도 결국 어디 하나 바뀌지 못했단다. 내가 네 제자의 눈알을 뽑고 혀를 자르는 동안 고작 해건금침 하나에 당황하여 무력해진 꼬락서니만 보아도 알조지. 내가 틀렸느냐?”
차분히 대답하려던 초윤이 그 한마디에 무너졌다. 아니, 초윤이 무너졌는지 하윤이 망가졌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심장이 우그러지고 머리는 멈추었다. 초윤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다친 손으로 바닥을 짚고 허락을 갈구하는 새까만 눈을 보았다. 의식을 차리자마자 곁에 있던 동생을 부여잡고 흔드는 아이를 보았다. 달싹이는 입술에서 넘치는 피와 언어가 되지 못한 흐느낌을 보았다. 누나의 손길에 맥없이 뒤로 꺾이는 고개를 보았고, 감은 눈에 옴폭 내려앉은 눈두덩을 보았다.
스승님. 시선이 마주친 천오가 혼잣말처럼 초윤을 불렀다. 그러자 사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스승을 바라보았다. 피와 먼지로 너저분한 뺨에 마르지 않은 눈물이 번들거렸다. 처음 만났을 적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하윤은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속은 텅 빈 채 뼈대만 남아 도리어 고요해지는 감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뿐이다.”
도와주세요. 사영이 속삭였다.
“윤아, 나와 함께 가자.”
감정을 가다듬던 주먹은 어느새 풀렸다. 맞잡은 손에서 월량의 한기가 느껴졌다. 월량은 초윤의 손을 쓸어 손바닥을 펼치게 하고, 선명한 손톱자국 위에 입술과 뺨을 문질렀다. 느슨한 소매를 걷어 내린 뒤 맥이 뛰는 손목 안쪽을 엄지로 매만졌다. 그리고 구애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있다면 더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겠다. 그러니 다시 나와 함께 살자.”
“…….”
“네 손으로 죽였으니, 네 손으로 살려다오.”
몸은 아이들을 향했으나 걸음을 뗄 수 없었다. 붙들린 손 한 짝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고작해야 소매를 쥐고 애걸하는 척, 초윤에게 선택권을 넘겨주는 척 아양을 떨고 있으나 하윤은 모를 수 없었다. 월량은 말과 행동으로 초윤을 옭아맸다. 두려운 가정과 무서운 상상에 무릎을 꿇게 했다.
월량은 돌아보는 초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느새 초윤의 뺨을 척척히 적신 물기를 훔치고 닦았다.
초윤의 침몰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목도한 자가 달래듯 연하게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네가 홀로 겪어 온 이야기를 오래도록 듣고 싶구나.”
약선 초윤이 분투한 세월을 끝까지 짓밟고 퇴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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