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198화 (198/257)

198화

향수(鄕愁)는 감각의 되새김질이었다.

눈을 감으면 빛바랜 경험을 꺼내어 몇 번이고 곱씹을 수 있었다. 차가운 문손잡이를 열고 바깥으로 나갈 때마다 등 뒤에서 들리던 도어 록 소리. 신발 밑창 아래로 느껴지던 딱딱한 아스팔트. 옆으로 뻗은 차도에선 지나가는 차량의 소음이 쉴 틈 없이 들려왔다. 고층 건물에 둘러싸인 도시의 공기는 후텁지근했고, 계단을 내려가 지하철을 타면 비교적 시원한 한기와 더불어 퀴퀴한 냉방기 냄새가 느껴졌다.

가끔은 이러한 기억에 골몰하다가도 이상함을 감지했다. 어째서 나는 그곳에 돌아가고픈 마음이 절박하지 않은가. 태어나 자란 세상이 그립지 않을 리가 없는데, 내 반응은 왜 이렇게 건조하고 차분한가.

일신의 안위부터 편의성과 쾌적성까지 모든 면이 무협지보다는 발달한 곳이었다. 시대와 낭만이 뒤섞여 보기 좋고 쓰기 좋은 것만 남은 세계보단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한 번도 귀환이 간절하지 않았을까.

이곳과는 달리 마음 붙인 이가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납득을 해도 미묘한 불편함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이제까지는 이쯤 되면 ‘원작이 무사히 마무리되어 잠재적 위험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 애들은 지켜 줘야지’, ‘천오가 복수를 무사히 마치고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줘야지’ 등등 어렴풋한 이질감을 다독이는 결론이 떠오르며 상념이 마무리되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잘 간직해 두었던 기억과 함께 떠오른 감각들이 하나하나 더 익숙한 것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매캐한 매연은 습기를 머금은 흙과 나무 냄새가, 귓가에 울리던 경적과 엔진 소리는 빽빽한 숲을 지나 불어오는 바람이 되었다. 열띤 대기 대신 촘촘한 안개가 뺨에 닿았고, 머리 위에 넘실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비쳤다.

의아함을 느낀 순간, 옆을 스치고 달려가는 두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선 장에서 무슨 간식을 먹고 오는 게 좋을지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빠르게 멀어졌다.

하윤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배 속에 얼음을 들이부은 것처럼 섬뜩하고 혼란스러웠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어떻게 두망산에 돌아왔지. 눈 감기 전 보았던 마지막 광경이 아직도 선명했다. 시력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전전긍긍 울먹이고 소리치던 천오의 얼굴이 눈앞에 훤했다. 곱게 키웠으니 피를 보고 놀랐을 만도 한데. 아니, 함께 자란 사저와 사형이 그렇게 되었으니 충격을 받고도 남았을 텐데 나란 인간은 도대체 그런 아이 앞에서 정신을 빼 놓고 무슨 짓을 벌인 건가.

사영이와 사현이는 어떻게 됐지? 초월량은 돌아갔나? 난 도대체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하윤은 문득 중요한 사실을 알아챘다. 방금 스쳐 지나간 아이들 목소리는 분명 어린 사영과 사현이었다. 천오가 다친 뒤로 애들만 하산시킨 적은 없으니 이는 제 경험이나 회상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렇게 생생히 기억을 구현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부터가 가능할 리 없었다. 파랗게 질려선 두망산을 돌아보던 하윤의 시선이 어느 순간 앞에 있는 무심서에 가 닿았다.

초윤의 은신처 뒤뜰에는 울타리 밖에서도 보일 정도로 샛노란 월견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하윤은 그 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등줄기를 따라 서슬 퍼런 소름이 내달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고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방금 분명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는데. 실색하며 온갖 방향으로 연신 뒤를 돌아보았지만 하윤의 몸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기척이 느껴졌던 초윤의 육체와는 다르게 한없이 둔감하기만 했다.

그제야 하윤은 더욱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숨 가쁘게 헐떡이던 하윤이 제 손과 팔을 황급히 내려다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육신은 지난 십이 년간 익숙해진 모습이 아니었다.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정하윤의 본래 형상이었다.

그때,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무심서의 나무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쪽으로 활짝 열린 창문과 살랑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연하게 선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하윤은 홀린 듯 터벅터벅 무심서로 들어갔다. 익숙한 높이의 문턱을 넘고, 말린 약초 냄새가 가득한 공기를 한가득 마시며 방 안을 휘 돌아보았다.

모든 게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단차를 두어 높인 구들장, 그 아래에 벗어 둔 신발,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고 빽빽한 약재 서랍장과 좌식 책상, 햇빛이 잘 들어오도록 모든 창을 활짝 열어 놓은 모습과 그 앞에 있는 작은 다과상, 그리고 뒤뜰을 내다보며 찻잔을 들고 있는 하얀 선인까지.

맑은 찻물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초윤은 여전히 시선을 바깥에 고정한 채 말했다.

“공연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앉거라.”

소슬바람처럼 속삭이듯 차분하고 선선한 목소리. 하윤은 그의 음성을 듣자마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상황을 벼락같이 이해했다. 이건 현실이되 현실이 아니었다. 구태여 명명하자면 일종의 심상(心想)세계, 하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저 상상이라고 치부할 순 없었다. 하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의식 속에 고요히 자리 잡은 타인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으며, 얼마 전 그 정체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광경을 납득한 과정이 지독하게 익숙했다.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비슷하지 않았던가. 마치 누군가가 귓속에 속삭이듯 알려 주는 것 같다고 종종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정답인 모양이었다.

나를 부를 때가 되긴 했지. 아니, 오히려 한참 늦었다. 하윤은 속으로 중얼이며 운동화를 벗고 구들장 위로 올라갔다. 콩콩 소리 나도록 바닥을 걸어 초윤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그리고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응시하다 대뜸 말했다.

“이렇게 마음에 두실 거면 왜 방치하셨어요?”

산더미처럼 쌓인 의문 속에서 다른 것을 다 제쳐 두고 느닷없이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약선 초윤이 손톱을 세워 까칠한 찻잔 표면을 톡톡 두드렸다. 하윤은 시선을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갈색 눈동자에 비친 달맞이꽃의 노란 빛과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머리카락. 그늘진 눈가에선 상실이 묻어났고, 달싹이는 입술은 망설임을 가득 담고 있었다.

초윤은 한참 찻잔을 긁고 혀끝을 잘근거리다가 대답했다.

“……두려웠다.”

말을 하다 말고 아랫입술을 씹으며 잠시 바깥 풍경을 노려보던 초윤이 고개를 돌렸다. 많은 감정이 담긴 눈으로 하윤을 마주 보다가 시선을 툭 떨어트리곤 느릿느릿 토로했다. 이어지는 언어의 나열은 해명보다 고해에 가까웠다.

“내가 아는 방도라는 것들은 전부 내 경험에 기반하고 있지. 내가 먹어 본 약재로 처방을 구성하고, 내가 거쳐 온 싸움으로 칼날을 상대했다. 애를 대하는 일이라고 다를까.”

“…….”

“나는 내가…… 자란 방식으로,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 아이들을 키우게 될까 두려웠다. 내가 들어 온 말을 그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내뱉을까 봐, 걸어온 길을 그대로 종용할까 봐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하윤은 이 현상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감정적이고 신체적인 학대를 받으며 자란 사람들이라면 대체로 겪는 공포였다. 어쩌다 뱉은 한마디가 가해자의 언행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스미는 자괴심이었고, 혹여라도 내가 겪은 폭력을 대물림하게 될까 봐 두려워 노상 가슴을 졸이는 강박증이었다.

……그리고 초윤의 과거를 어렴풋이 들여다본 덕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약선은 충분히 무서울 만도 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최소한만 해 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 험한 곳에서도 함께 기대며 잘 버티던 아이들이니까 안전한 거처에서 먹을 것과 잠자리만 해결해 주어도 알아서 잘 자라리라고. 괜히 상관하였다가 멀쩡한 가슴에 생채기 내는 짓만은 하지 말자고……, 그게 옳다고 여겼다.”

“……그럴 리가.”

“헌데 죽었더구나. 아무도 들지 못할 테니 안전하리라 믿고, 또 내가 없는 편이 그 아이들 심신에 편안하리라 믿고 자리를 비운 사이 참으로 보잘것없이 죽었더구나.”

“…….”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구의 숨이 먼저 끊어졌을까. 동생이라면 무서웠을 테고, 누이였다면 원통했을 테지. 모두 내 잘못이다.”

초윤이 쥔 찻잔의 수면이 이리저리 일그러졌다. 차마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내려앉은 침묵이 어깨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도중에, 하윤은 이상한 점을 한 가지 떠올렸다.

하윤은 분명 원작이 시작하기도 전에 초윤의 몸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사영과 사현이 중독으로 사망한 일은 <귀환영웅>이나 그 속의 원래 세계에서 벌어졌을 텐데, 초윤은 벌어지지도 않았을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건가?

설마…….

“그렇기에 너를 끌어들였다. 가타부타 사정을 설명해도 이해할 것 같지 않아 무작정 이곳에 떨어트린 사람이 바로 나다. 네가 무슨 원망을 한들 후회하지 않으니 마음껏 책망하거라.”

“아니, 잠시만요. 그게 지금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물어봐야 하지? 막연하던 미지가 눈앞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도리어 당혹스러웠다. 하윤은 다과상에 팔꿈치를 대고 고개 숙여 이마를 짚었다.

“저는…… 이걸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예 다른 곳에서 활자로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뿐이에요. 그것도 당신의 인생이 아닌 타인의 줄거리였고, 약선 초윤은 그저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네가 나를 눈에 담고 머리로 그리는 순간부터 연은 이어졌다. 현경은 이치를 벗어나는 혜안을 갖게 되는 경지니, 의지가 있다면 이를 거슬러 올라가 나를 도울 자를 찾는 것쯤은 가능하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평정을 되찾은 초윤이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판타지 장르라고 막 나가나? 하윤은 불경한 생각을 했다.

(19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