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고심하던 하윤이 푹 한숨을 쉬고 마른세수를 했다. 하윤의 선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역시 악역인가?’
<귀환영웅>의 최종보스 주천오가 멀끔하고 성실한 서문천오로 자랐으니 빈자리를 대체할 사람이 나오진 않을까. 이전에 잠시 떠올렸다가 망상으로 치부하고 접어 둔 상상이었다. 이곳이 소설이라는 전제는 이제 무의미해졌지만, 초윤 또한 회귀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듣고 나니 그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 되살아나 하오문을 쑥대밭으로 만든 이 상황을 연관 짓지 않을 순 없었다.
한참 머무적거리던 하윤은 산바람이 두어 번 더 불어올 때쯤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초윤의 앞에서 월량이라는 주제를 꺼내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 사람은 왜…… 이제야 갑자기 깨어났을까요? 모용서가 신물을 썼을 땐 그럴 기미도 없었잖아요.”
“……이전부터 내가 떠나려는 마음을 먹을 때마다 귀신같이 눈치채는 사람이었다. 그저 감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이승의 끈이 내게 묶여 있어 명계에서도 알았는지.”
“예?”
한 박자 늦게 이해한 하윤이 말꼬리를 높였다. 이렇게 벌어진 일을 두고 떠난다고? 순식간에 머리를 꽉 채운 다급함은 곧 재촉이 되었다. 정돈되지 않은 질문들이 체망에 걸리지 못한 채 고스란히 쏟아져 나왔다.
“어, 언제부터요? 어디로 가려고 하셨는데요? 몸은요? 저는요? 저는 그럼 정말 그냥 당신 대신 아기 키우려고 불려 온 거예요?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천오가 이제 막 성인인데 이렇게 갑자기 떠날 생각을 하셨다고요?”
“그만.”
초윤이 손을 들어 하윤의 말허리를 뚝 잘랐다. 언성을 높이지 않았지만 단호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하윤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아이들의 말을 이런 식으로 끊지 않겠다고 분한 마음으로 다짐했다.
하윤이 어느 정도 평정을 찾은 듯하자, 초윤은 올렸던 손을 다과상 위에 천천히 내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이방인인 너의 혼백을 데려오고, 네 것 아닌 몸을 주어 이곳의 일원으로 살게 했다. 이치를 거스르는 힘이라고는 하지만 변화를 이끌어 내려면 대가가 필요하지.”
“…….”
“값을 치를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네 뒤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그조차도 이제 한계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대가가 뭔데요?”
초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잔을 쥔 하윤의 손등을 감싸고 깊게 눈을 마주쳤다. 지근거리에서 마주친 초윤의 두 눈은 사람의 안구보단 광활한 사막 같았다. 가늘게 팬 홍채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흩날려 사라질 모래 언덕 같았고, 말간 동공은 삭막한 가운데 차가운 샘처럼 느껴졌다.
시간을 감은 듯 순식간에 기울어진 해가 산등성이에 걸렸다. 붉게 저무는 햇빛이 초윤의 파리한 뺨을 적시고 눈동자 밑을 금빛으로 찬란하게 비췄다. 끝나 간다, 잠시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다 직감한 하윤이 황급히 손을 빼내어 초윤의 손목을 역으로 붙들었다.
“잠시만, 잠시만요. 이제 어떻게 해요. 정말 월량한테 잡혀간 거예요? 그, 그 사람을 죽여야 하나요? 죽이는 법도 아직 못 찾았다면서요. 그러면 그것부터 어떻게든 찾아야…….”
“네가 그를 죽일 필요는 없다.”
“애들이 그렇게 됐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분명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사람이잖아요. 아니면 이대로 따라가서 같이 살아야 해요? 그럼 당신은, 나는…….”
“하윤.”
끝없는 불안감이 숨에 섞여 답답했다. 어른을 잃어버릴까 봐 겁내는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두서없이 말하자 심지 곧은 목소리가 하윤을 불렀다. 추태를 깨달아 입술만 달싹거리는데, 초윤이 다른 한 손을 마저 뻗었다. 그리고 서툰 손길로 하윤의 손등을 조심스레 다독였다.
“그는 오롯이 내 책임이며, 내가 해결할 수 있다. 방도를 찾았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
“너는 이미 넘치도록 잘 해내 주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내 아이들을 보살펴 준다면 내게 여한은 없을 것이다.”
“……저는 잘한 거 없어요. 그때 만난 남자가 그랬잖아요. 사현이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붙잡혔다고……. 제 세상과 이곳이 다르다는 걸 고려했어야 했는데, 제가 싫다는 이유로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지 못했어요. 사람한테 쓰지 못하는 무공은 그냥 운동이잖아요. 나는 몰라도 그 애들은 계속 험한 곳에서 험한 사람들이랑 부딪치며 살아야 할 텐데.”
“무공을 배운다는 이유로 열댓 살부터 사람 죽이는 법을 익히는 게 더 이상하지. 나는 네 방식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키우는 소임은 다 했으니, 나머지는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 나갈 차례다.”
“…….”
“그리고…… 월량과 살 걱정 역시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왜?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윤이 번쩍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허리와 가슴에서 짓누르듯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소스라치게 놀라 옆을 바라보자, 찰싹 붙어 있던 것 빼곤 얌전하던 천오가 팔을 뻗어 하윤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몸을 뒤로 물렸지만 옷깃을 쥐어뜯듯 틀어잡는 손에 실린 힘이 사나웠다.
당황한 하윤은 천오를 연신 부르며 수그린 아이의 어깨를 더듬더듬 짚었다. 분명 자신의 심상에 불과할 텐데도 어째선지 밀려나질 않아서 어르고 달래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손에 닿은 비단 밑으로 꿈틀거리며 부피를 늘리는 몸이 느껴진 순간, 하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혼(魂)과 백(魄) 중에 백은 네게 두고 가겠다. 이전처럼 내 기억을 꺼내 볼 순 있을 테지만, 내 의식은 더 이상 이곳에 없을 것이다.”
“아니, 잠, 잠깐만요. 천오야?”
하윤은 아연하게 초윤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천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천오가 자라고 있었다. 그것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크게 자라고 있었다. 물결친다 생각했던 머리카락은 어두운 밤에 몰려오는 파도처럼 바닥에 닿아 사방으로 펼쳐졌다. 작은 어깨는 뼈 비틀리는 소리를 내더니 품에 벅찰 정도로 넓어졌고, 가만히 쓰다듬어 주던 얇은 등에선 옷 너머로도 날렵히 자리 잡은 근육이 보였다. 단풍잎처럼 젖살이 붙어 있던 손은 커서도 고왔지만 뼈대가 억셌고, 무엇보다 손끝과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죽을 듯이 하윤을 붙잡고 있어 힘들었다. 하윤은 어정쩡하게 양팔을 든 채 천오에게 몸을 내어 주고 있다가 주춤주춤 팔꿈치를 내렸다. 어색한 체구에 잠시 머뭇거리다가도 슬며시 손을 얹자, 천오가 퍼득 몸을 굳히더니 품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천오야, 아…….”
아가.
……맞나?
풀어 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핏기 없는 피부가 도드라졌다. 그러나 그보다도 눈길을 사로잡는 시선, 바닥없이 새까만 눈동자가 하윤을 고요히 응시했다. 속눈썹 그늘에 음울하게 가려져서도 기이한 광채로 형형하게 번들거리는 눈이 이유 모를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저절로 헛숨이 넘어가고 마른침이 걸렸다.
……내 아이가 맞나?
“이게 무슨…….”
“새삼스레 놀라기는. 네가 그리 키우지 않았더냐.”
“예? 아니, 아니에요. 전 이런 모습 처음 보는데.”
하윤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초윤과 천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천오는 하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하윤이 키운 서문천오보단 염라군 주천오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아이를 마주하는데 이토록 가슴이 술렁거릴 리 없었고, 천오 역시 ‘이런’ 눈으로 하윤을 바라볼 리 없었다. 말 없는 갈망에 온몸이 잠겨 질식할 지경이었다. 자신을 끌어안은 힘도, 팔 안에 넘치는 육체와 기대 오는 무게도 버겁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초윤은 도와줄 생각도 없는 건지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찻잔을 가볍게 흔들 뿐이었다.
“주, 주천오 아니에요? 주천오 얘기해서 얘가 나온 거 아니에요? 저는 이런 천오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데……!”
“아니, 이제는 서문천오다. 이리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건만, 이것만은 오롯하게 너의 책임이니 감당하거라.”
“언제는 잘 키웠다면서……!”
하윤을 올려다보던 천오가 기지개를 켜듯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한순간에 시선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너무 달라붙은 것 같아 잠시 비켜 보라고 밀어 내는데, 손에 닿는 몸은 단단하고 뜨겁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가슴팍에 올라온 손을 잡아 내리고 얼굴을 숙여 하윤의 뺨에 콧잔등을 비비는 천오가 지독하게 낯설었다. 스승님, 속삭이는 목소리조차 기억 속의 천오보다 낮게 깔려선 불길하게 흩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남은 시간을 알리는 해까지 능선에 거의 삼켜지고 있었다. 점차 땅거미가 지는 무심서 안에서, 하윤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다가 목청을 높였다.
“잠깐만, 잠깐만요! 이거 하나만.”
누군가 지워 내는 것처럼 색을 잃어 가던 초윤이 눈만 들어 하윤을 보았다. 하윤은 다급한 와중에도 주저하며 입술을 달싹이다 간신히 물었다. 수많은 불안감이 어수선하게 엮여 뭉뚱그려진 질문이었다.
“당신이 없으면 저는…… 어떻게 해요?”
“아둔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때, 천오가 입을 벌렸다. 단아한 입술 너머 날카로운 송곳니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싶은 순간, 목 옆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천오가 사정없이 물어뜯은 탓이었다.
하윤은 악 소리를 지르고 천오를 팔로 밀어 내면서도 답을 갈구하듯 초윤을 바라보았다. 천오의 힘에 밀려 쓰러질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버텼다. 계속해서 돌아오라 속삭이는 소리 때문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급박한 와중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이 앉아 있던 초윤은 선심 써서 알려 준다는 듯 눈짓으로 하윤의 찻잔을 가리켰다. 이미 돌아갈 마음도 없으면서. 천오의 목소리를 비집고 들려오는 귓속말은 그의 말인지, 제 생각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윤은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거의 마시지 않은 찻물이 파문을 그리며 일렁였다.
투명한 수면 위에 비치는 하윤은 이미 하얀 선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천오가 하윤을 밀쳐 넘어트렸다. 단단한 몸과 강한 힘에 중심이 한번 무너지니 속절없이 떠밀려 버렸다. 쓰러지듯 바닥에 눕자 거대한 그림자가 하윤을 가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등 밑에서 새어 들어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하윤은 갓 숨통이 트인 것처럼 경련하며 크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몸서리쳤다. 어느새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시야는 온통 흐리게 뭉개져서 어두운 곳에 들어왔다는 사실밖엔 알 수 없었고, 귓가는 이명과 잡음으로 뒤덮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들이마신 숨을 내뱉지도 못한 채 꺽꺽대고 있자,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이 느껴졌다.
“……승님! 스승님!”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귀울림을 헤치고 파고들었다. 이를 필두로 눈앞이 점차 선명해졌다. 호흡 또한 가쁠지언정 들숨과 날숨을 되찾았고, 머리를 쪼갤 것 같던 두통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어수선한 정신으로 손을 올리자 마찬가지로 낯이 익은, 정확히는 조금 전까지 양팔로 아등바등 밀어 내고 있었던 감촉이 느껴졌다.
이 사실을 깨달은 하윤의 이성이 번쩍 돌아왔다.
“스승님……. 저입니다. 서문천오입니다. 의식이…….”
어두운 실내라고 느꼈던 이유는 순전히 새까만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누운 하윤을 가까이 보느라 숙인 머리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양옆에 장막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후두둑, 차가운 물줄기가 다시 한번 콧잔등과 뺨을 두드렸다. 하윤은 탈력감에 헐떡이며 눈을 깜빡여 초점을 잡았다.
방금 보았던 생소한 모습의 천오가,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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