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황급히 닦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검붉은 핏자국이 말라붙은 손이었다. 초윤은 천오의 머리카락 위에서 제 손바닥의 꼬락서니를 다시 한번 확인하곤 아주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고민은 찰나에 불과했다. 초윤은 괴로워하는 서문천오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머리가 많이 자랐구나. 제 주위를 둘러싼 요소 하나하나마다 경망스럽게 비명을 지르던 아까와는 다르게 퍽 담담한 감상이었다. 천오를 제대로 다독이자고, 달래어 안고 괜찮다며 안심시켜 주자고 다짐한 순간부터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발밑에 웅크린 몸에서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져 오는 감정이, 이 아이가 이렇게 자랄 때까지 홀로 견뎠을 시간이 초윤에게까지 번지듯 밀려 들어왔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무거웠고, 듣고만 있어도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웠다. 이렇게 제대로 마주하면 내가 잠시 눈 감은 동안 세상이 나를 놓아두고 홀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정말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반쯤 죽어 간다 해도 초윤은 현경의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 천오의 등 뒤에서 흉흉하게 일렁이는 살기와, 잠시 바라보았던 동공 너머 엉망으로 일그러진 정신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망자의 손이 켜켜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니 기척이 무거워질 만도 했다. 깊어지는 족적에도 아랑곳 않고 목적만 바라보며 여기까지 왔으니 제정신이 아닐 법도 했다.
뒤바뀐 모습으로 나타난 서문천오의 형상은 그대로 하나의 증명이었다. 그래도 잘 자라리라 생각했던 내 아이들이 그 속에서 결국 위태로운 시기를 보내고, 사라져 버린 나를 끝내 놓지 못해 위험천만한 일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인이었다.
……즉 초윤의 선택이 그리 옳지도 않았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헤집고 동그란 뒤통수에 손바닥을 문질렀다. 천오의 등이 눈에 보일 정도로 흠칫거리고, 바닥에 닿아 헤쳐진 장발은 이리저리 뒤엉켰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이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웠다.
긴장한 짐승을 작은 숨소리와 미지근한 온기로 한참 어루만지던 초윤이 가만히 천오의 뺨을 감싸 얼굴을 들게 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겨 주곤 황폐한 시선을 가만히 마주했다. 폐허의 잿더미처럼 핏기 없는 안색, 메말라 갈라진 입술과 파헤친 듯 초점 없는 눈동자까지 빠짐없이 가슴에 삼켰다. 실성한 것처럼 흐르는 눈물을 엄지로 훔쳐 닦아 준 뒤 눈두덩을 지그시 쓸어 감게 했다.
초윤의 손바닥에 기댄 채 한동안 호흡을 고르던 천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진정이 되었나, 싶은 순간 종아리를 잡고 있던 천오의 손이 오금으로 파고들었다. 새까만 눈을 초윤에게 못 박은 채 붙든 다리 한 짝을 제 품 안에 끌어안았다. 단상에 걸터앉아 있던 초윤의 엉덩이가 속절없이 딸려 갔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중심을 잡는데, 사람보다는 야생동물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운 목소리가 아래에서 스산하게 흘러나왔다.
“다…… 죽일 것입니다.”
“…….”
불길한 기시감이 엄습했다. 초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눈만 내려 천오를 다시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서문천오가 귀신 같은 몰골로 저주를 내리듯 한 글자씩 씹어 뱉고 있었다.
“다 죽일 것입니다. 스승님을 이리 만든 이들을 모조리 잡아 산 채로 불태울 것입니다. 팔다리는 얇게 저미고 뼈는 으깨어 가루 낼 것입니다. 흉곽을 갈라 폐를 잡아 뜯고, 목구멍에 심장을 박아 넣을 것입니다.”
차라리 저주가 나을 뻔했다. 이건 살인 예고였다. 일곱 살 때는 애가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워 왔나 경악이라도 했지만, 이제는 이 남자를 어떻게 말리나 고민부터 해야 했다. 아직까지도 기억 속에 선명한 19살의 서문천오라면 주의를 돌리고 설득하는 것으로 충분했겠으나, 초윤은 직감했다. 지금의 천오는 제 입에 담을 말을 능히 해내고도 남을 실력과 경험을 갖추어 버렸다. 사람을 죽여 분을 푸는 법을 알아 버렸다.
“어떻게 해야, 제가 어떻게 해야 그자가 후회할까요. 피부를 벗기고 살점을 발라내어 바닷물에 절일까요? 사지를 떼어 내고 눈코입을 봉한 뒤 창에 꿰어 황무지에 세워 놓으면 죽어 가는 나날이 사죄할까요? 조금이라도 일조한 자들까지 샅샅이 찾아내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안겨 주고 싶습니다. 아니, 아니야. 모자라…….”
꿇고 있던 무릎을 세워 앉은 천오가 고개를 숙였다. 서늘하게 식은 초윤의 허벅지 위에 제 뺨을 올려놓고 응석을 부리듯, 혹은 버글거리는 속을 애써 눌러 참듯 문질러 비볐다.
……긴장감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나도 낯설고 무서웠다. 느닷없이 등장해서 제 일상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초월량과는 다른 의미로 두려웠다. 초윤은 어린 서문천오를 십이 년간 키워 냈다. 천오가 초윤에게 익숙해진 만큼 초윤도 천오만큼 익숙한 사람이 없었다. 별난 면모가 있어도 내 앞에선 온순해지는 습성을 알았고, 이 세상에선 내가 가장 이 아이를 잘 알고 있으리라 감히 자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체감상 한숨 푹 자고 일어나자 키는 손바닥 하나만큼 더 자라 있고,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몸에 두른 기운은 사납기 그지없었으며, 생소한 표정과 눈빛에서 잔혹했던 시간이 드러나니 덜컥 겁이 나고도 남았다.
하지만…….
“증오스러워 죽을 것만 같습니다, 스승님…….”
아슬아슬한 목소리가 너무나도 나약하게 들려서, 내가 없으면 이 아이는 또 산지옥에 떨어질 것 같아서.
길게 늘어트린 검은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던 손으로 천오의 어깨를 쥐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가볍게 잡아 올린 정도에 불과했지만 천오는 순순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웅크리고 있던 남자가 허리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앉아 있는 초윤보다 덩치가 컸다. 품에 다 넘치다 못해 팔을 두르기도 어려운 몸을 한가득 끌어안았다.
불안정한 호흡이 옆 목을 간질였다. 그러고 보니 꿈 같은 곳에서 얘가 물어뜯었던 부위도 여기였지. 초윤은 조금 떨떠름한 기분으로 천오의 등줄기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괜찮다, 네 선생님 잘 살아 있다. 이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름 진심을 가득 담은 표현이었다.
초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굳어 숨만 쉬던 천오는 어느 순간 초윤을 와락 마주 안았다. 저절로 쥐여짜이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고 우악스러운 힘이었다. 그래도 얼추 진정이 된 것 같아 조금 안심했다. 무림인들은 항상 기맥을 열어 놓고 다니다 보니 정신적으로 살짝만 무너져도 토혈부터 한다는 약점이 있었다. 업계 전문 용어로는 주화입마(走火入魔)였는데, 심할 경우 몸이 망가지고 단전이 깨져 평생을 폐인으로 살거나 죽음까지 이르는 심각한 부작용이었다.
그리고 천오의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까딱하면 애가 제 분을 못 이겨 주화입마에 들 것만 같아서 한참 조마조마하던 참이었다.
천오의 손에 붙잡혀 있던 다리가 뒤늦게 욱신거렸다. 손톱을 세우고 힘을 준다 했더니 아무래도 멍이 들 것 같았다.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한결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발끝을 꼼질대고 있는데, 크게 들숨을 마신 천오가 이를 악물더니 초윤의 허벅지를 팔로 받쳐 대뜸 안아 올렸다. 화들짝 놀란 초윤의 성대에서 바람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몸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천오의 어깨를 그러쥐고 매달렸다.
“시간을 지체해서 죄송합니다, 스승님. 이곳을 나가겠습니다.”
눈물 자국이 여전히 마르지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말한 천오가 한 손을 내렸다. 서늘한 쇳소리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둠 속에서도 흰빛을 뿌리는 검, 백홍이었다.
◇
제자의 팔에 안긴 채 돌무덤이 된 석조 문을 넘어 나온 초윤에겐 가장 급한 질문 두 가지가 생겼다.
하나, 여기가 도대체 어디일까.
“찾아라!”
머리 위에서 일제히 산개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못해도 수백에 가까운 무인들이 발 빠르게 위층을 점하고 침입자를 수색하는 중이었다. 천오는 예리한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다가 초윤을 고쳐 안고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 하나, 숨소리 한 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교한 은잠술이었다.
멀쩡한 손을 보아 짐작하긴 했지만 정말 경지를 넘었구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기척을 죽인 초윤이 기특한 마음을 담아 천오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그러자 주위를 살피던 천오가 초윤을 잠시 눈에 담고 고개를 돌렸다.
초윤이 누워 있던 장소는 깊은 지하에 있었다. 한 층씩 올라오며 온갖 광경을 보았다. 온기가 미처 식지 않은 시신들이 천오가 내려온 길을 알려 주듯 줄줄이 늘어져 있기도 했고, 문이 있었을 법한 자리에 석회를 발라선 완벽히 밀봉해 놓은 감옥도 있었다. 바닥에는 자갈을 가득 뿌려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소리가 나게 했으며 침입자가 드나들면 족적이 찍히도록 그 위에 고운 모래를 한 겹 더 깔아 놓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삼 장 간격으로 깔린 진법과 함정이 사람을 질리게 했다. 다행스럽게도 천오가 처음 보는 모양의 기물을 꺼내 잘 피해 가긴 했지만, 연식이 있는 장치마다 묻어 있는 선명한 핏자국에 자꾸만 어처구니가 사라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올라오긴 했는데, 여기서부턴 아무래도 들킬 수밖에 없을 듯했다. 천오 혼자라면 몰라도 운신하기 어려운 초윤을 한 팔에 안고 저 모든 사람을 상대하며 나가긴 어려웠다. 그리고 이걸 떠나, 초윤은 적어도 자신이 멀쩡히 깨어 있는 동안에는 아이들이 누군가를 죽일까 말까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길 바랐다.
초윤의 파리한 손이 천오의 손에서 백홍을 자연스레 넘겨받았다. 눈 뜨고 검을 뺏긴 천오가 깜빡거리며 초윤을 바라보았다. 초윤은 천장을 향해 검극을 올리고, 실 같은 검기를 쏘아 올려 천장에 미세한 틈을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엔 어떠한 소리와 진동도 따르지 않았다.
메마른 입술 사이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숨이 흘러나왔다. 양상 너머를 들여다보며 폐부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독기를 운용했다. 무색, 무취, 무미의 기체가 방금 생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선 초윤이 감지한 기척마다 따라붙었다. 기백의 호흡기를 틀어막곤 일제히 혼절하게 했다.
행여나 사태를 알아차린 누군가가 도망가서 상황을 알릴까 봐 단번에 모두를 중독시키자, 위층의 인원이 한꺼번에 쓰러지면서 막대한 진동을 자아냈다. 초윤은 뻑뻑한 눈을 감으며 천오에게 검을 되돌려 주었다. 나갈 때까진 누군가를 마주칠 일이 없도록 계속 독을 쓰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덮쳐 온 고통이 아랫배를 터트릴 것처럼 작신작신 짓눌렀다.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고 허리는 자꾸만 뻣뻣하게 굳었다.
그래서 질문이 두 가지였다.
둘, 내 상태가 왜 이렇게 안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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