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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04화 (204/257)

204화

처음에는 출혈의 여파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손, 발목을 무식하게 베어 그만큼의 피를 짜냈으니 아무리 현경이라도 죽기 직전일 게 분명했다. 깊은 지하층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천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구역감과 현기증을 한참 삼켰는데, 잔뜩 긴장한 천오를 돕기 위해 기감을 펼친 순간부턴 자꾸만 단전에 이상한 느낌이 맴돌았다. 차가운 물이 새어 나와 고이는 것처럼 아랫배가 서늘해지더니 그 주위의 장기와 뼈가 얼어붙듯 시려 왔다. 몸 상태를 제대로 알기 위해 성치 않은 손을 단전 위에 얹고 심법을 운용해 보려고 했으나 불안정한 호흡이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아 당장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로 독공을 조금 썼더니 단전에서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늘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던 내공이 얼음으로 깎은 가시 공이 되어 내장 속을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아랫배를 쥐어짜는 압박감은 고통을 배가시켰고, 설원 한가운데 내던져진 것처럼 전신이 알 수 없는 추위로 욱신거렸다.

얇은 옷의 등 부분이 냉한으로 슬며시 젖어 들었다. 초윤은 신음이 흐르지 않도록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쌔근거렸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바쁘게 얼굴을 훑는 천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입을 열기도 어려웠다. 괜찮다는 말 대신 둘러 안은 팔에 힘을 더하자, 자신을 고쳐 안고 벌떡 일어나는 몸에서 긴장 어린 조급함이 느껴졌다.

천오는 초윤을 단단히 붙잡고 겅중겅중 걷기 시작했다. 보폭 넓은 두루미걸음이 점차 날래지더니 급기야 발끝으로만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할 수 있는 보안은 모조리 해 둔 장소여서 그런지 위층을 향하는 길도 쉬이 보이지 않았으나, 천오는 이미 이곳의 구조를 모두 외운 듯 어렵지 않게 계단을 찾아냈다. 창문도 하나 없고 횃불조차 달지 않은 어둑한 공간을 망설임 없이 뛰어 올라갔다.

아, 그런데 잠깐만. 두통으로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떠올린 초윤이 번쩍 눈을 뜨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방금 하독한 연기에 중독된 사람들이 곳곳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진령산맥과는 달리 폐쇄적인 공간이라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흩어지지 못한 독기가 층 전체의 바닥에서 일렁였다. 초윤은 황급히 천오를 바라보았다. 멈추지 않고 경공을 펼쳐 달리는 모양새를 보아 독의 영향은 크게 받지 않은 듯했지만…….

초윤은 별다른 고민 없이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독공을 운용하면 또 비슷한 고통이 덮쳐 올 게 뻔했으나, 그래도 유독한 물질이 애 몸에 들어가는 일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 깊게 숨을 내쉬며 폐를 비운 뒤 고개를 들어 다시 들이마시려는 순간.

“……?”

커다란 손이 얼굴의 반절을 떡하니 막아 버렸다.

얼떨결에 코와 입이 가려진 초윤은 멀뚱한 눈으로 천오를 올려다보았다. 들고 있던 검을 어느새 다른 손으로 옮긴 천오가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쳤다. 괜찮습니다, 입 모양으로 전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가 너무 심각해 보여서 치워 달라 할 수도 없었다.

천오는 곧 손을 거두고, 검도 다시 잡은 채 성큼성큼 뛰었다. 뺨에 남은 온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초윤은 힘없는 손등으로 제 볼을 문지른 뒤 천오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다 재차 눈을 감았다. 몸이 흔들릴수록 머릿속도 뭉크러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땅을 얼마나 파 댔는지, 이 지하가 왜 이렇게 넓은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나가떨어진 층계를 지나 올라가자, 거기서부턴 쭉 촘촘한 기관진식의 연속이었다. 기상천외한 기계장치와 함정들이 벽 너머와 바닥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어 공기에서도 쇠와 기름 냄새가 났다. 제갈세가를 통째로 데려와도 해체하려면 보름이 걸릴 듯했다.

그래도 천오한테는 진법과 기관을 피하는 기물이 있으니 괜찮겠지. 그런 귀한 물건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아니면 누군가 만들어 준 걸까? 설린이? 모용단?

초윤이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킬 동안, 천오는 백홍을 칼집에 집어넣고 허리춤에서 기물을 꺼냈다. 천오의 주먹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기물은 조금 길쭉한 모양의 검은 보석 같았다. 양 끝이 뾰족하고 가운데에는 동그란 금이 박혀 있어 사람의 눈과 비슷했으며, 홍채에 해당하는 부분의 눈금을 돌려 사용하는 듯했다.

손에 든 것을 묵묵히 바라보던 천오는 이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초윤을 단단히 고쳐 안은 뒤 함정으로 가득 찬 좁은 공간을 향해 느닷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황망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바람처럼 볼품없이 흩어졌지만 질겁한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천오는 그저 앞을 바라보며 초윤을 그러안고 달릴 뿐이었다.

초윤은 허겁지겁 천오를 붙잡고 들숨을 삼켰다. 바람의 압력이 느껴지는 속도에 한발 늦은 함정들이 뒤에서 다가오듯 작동하기 시작했다. 분사된 기름에 내뿜듯 점화된 불이 천오의 발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방금 지나친 바닥에선 쇠꼬챙이가 튀어 올라왔다. 벽에 심어 놓은 비격진천뢰가 폭파하며 사방으로 철편이 튄 순간, 온통 아찔한 와중 이를 악문 초윤이 천오의 뒤로 한 손을 뻗었다. 이쪽으로 날아오는 쇳조각이 눈에 보여 가만 있을 수 없었다. 초윤은 손끝에 지강(指罡)을 맺고, 이것으로 곧 막을 이루어 치명적인 암기를 튕겨 내려 했다.

하지만 제 팔뚝을 잡아 밑으로 내린 천오 때문에 기껏 모았던 내공까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서문천오!”

힘이 어찌나 강한지 맥없이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미약하게나마 타박하듯 아이의 이름을 불렀으나 머지않아 들이닥친 혼란에 말문이 막혔다. 맥없이 딸려 가다니? 초윤은 엄연히 현경이고, 천오는 그 아래 경지인 화경이 아니었던가?

약점을 잡혔던 광동성에서의 일을 제외한다면 십이 년이 넘도록 힘으로 진 적이 없었던 초윤이기에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조막만 할 때부터 업어 키운 내 애가 나를 지금 완력으로 눌러?

기계가 작동하고 벽이 부서지는 소음에 귀가 다 먹먹했다. 천오는 초윤의 자그마한 항의에도 아랑곳 않고 스승의 팔을 우악스레 제 품으로 밀어 넣더니 속도에만 더욱 박차를 가했다. 천장에서 도장 찍듯 돌기둥이 떨어져도 손으로 파쇄하거나 조금씩 방향을 비틀지언정 멈추지 않았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호신강기를 두른 듯, 날아오던 철편 조각들은 등에 박히지도 않은 채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달리기 시작했을 땐 보이지도 않던 출구가 환한 빛을 가득 품고 저 멀리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천장이고 할 것 없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많은 기관진식들이 거의 한꺼번에 작동하자 부하를 받은 층계가 내려앉으며 지축이 흔들렸다. 머리 위로 균열을 알리는 모래들이 흘러내렸고, 벽과 바닥은 쩌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천오는 한 손으로 초윤의 머리를 감싸 제 어깨에 꾹 누른 채 횃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앞으로 무작정 나아갔다. 집념 어린 두 눈동자에 점차 가까워지는 바깥의 빛이 번들거렸다.

마침내 몸을 던지듯 출구로 튀어나온 천오는 바닥에 양발을 딛고도 한참을 미끄러져야만 했다. 발뒤꿈치 뒤로 깊은 족적이 길게 이어졌다. 컴컴하고 습한 데다 음산했던 내부와는 달리, 나오자마자 느낀 감각은 해방감이었다. 어떠한 개발과 침범도 없이 자연 그대로인 공간에서나 맡을 법한 청량한 공기에 숨통이 좀 트였다. 머리와 목으로 곧장 내리쬐는 햇빛 때문인지 온도는 꽤 따듯했고, 대낮인 듯 날은 굉장히 맑고 밝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지끈거리며 건물 무너지는 소리가 주위를 온통 에워쌌다. 흙먼지 섞인 공기가 등 뒤에서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아무래도 천오가 나오자마자 내부의 시설이 결국 전부 허물어진 듯했다.

진동이 한참 울리는 걸 봐선 그렇게 탁 트인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천오가 머리를 누르던 손을 떼자마자 아득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본 초윤은 뻣뻣이 굳어 버렸다.

초윤은 드높고 험준한 산과 산 사이 골짜기에 나와 있었다. 산은 숲 대신 낮은 녹음으로 덮여 있었고, 그마저도 군데군데 벗겨져 있어 어딘가 황량하게 느껴졌다. 방금 빠져나온 문은 아예 잔해로 꽁꽁 틀어막혀 어디가 입구인지도 알 수 없었고, 골짜기의 바닥은 바싹 마른 수풀과 자갈로 가득했다.

그리고 화살에 맞아 죽은 시신들이 협곡을 흐르는 시냇물처럼 멀리 널려 있었다. 입은 옷은 지하에서 보았던 이들과 같았고,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피도 굳지 않은 채였다.

초윤은 설마 싶은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람이 부는 방향, 목을 한참 꺾어야 할 정도로 높다랗고 경사진 산세의 끝. 숲이 없어 선명하고 예리한 능선 위에 우뚝 서 있는 두 명의 자그만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나란히 선 둘 중 한 명은 손에 활을 들고 있었으며, 다른 한 명은 허리 뒤에 칼집을 찬 채 망을 보듯 웅크려 앉아 있었다.

한참 먼 거리인 데다 역광까지 받고 있어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초윤이 모를 리 없었다. 둘 다 못 보던 차림으로 못 보던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초윤은 모를 수가 없었다.

콧잔등 밑을 검은 면사로 가린 임사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사영의 팔을 잡고 일어나며 무언가 말했다.

햇볕 아래 금빛으로 찬란한 임사현의 눈동자가 초윤과 정확히 마주쳤다.

적어도 울기 직전의 표정만큼은 초윤이 기억하는 아이들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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