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울먹이던 사현은 곧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휘휘 돌려 산으로 가득한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사영의 팔을 툭 친 뒤, 밑에 있는 천오에게는 올라오라는 듯한 손짓을 남기고 능선 너머로 떨어지듯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초윤과 천오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온통 찌푸리고 있던 사영은 활시위를 당기고 사현의 뒤를 따랐다. 울음이 나올 때마다 화가 난 것처럼 오만상을 쓰는 것까지 이전과 똑같았다.
사형제의 신호를 받은 천오는 경사를 박차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폭발적인 추진력이 더해졌다. 정상에 가까이 다다라선 아예 높게 도약하여 단번에 능선을 뛰어넘었다. 공중에 머무른 채 아래를 내려다보자 빠르게 산을 내려가는 남매가 보였다. 사현은 먼저 쭉쭉 나아가고 있었고, 수십 장의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르던 사영은 힐긋 이쪽을 올려다보며 의도적으로 속도를 낮추었다. 그 뒤를 쫓아간 천오는 수월하게 합류할 수 있었다.
“……격조하였습니다, 스승님. 너무……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천오와 나란히 달리며 한참 초윤을 바라보던 사영이 간신히 말했다. 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사영이 입을 가리고 나타난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조여들었던 긴장이 탁 풀리자, 초윤은 설움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사영은 꿀꺽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정도로 목에 메인 감정을 삼키고선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헤집고 똑바로 들려왔다.
“구천(九泉)을 빠져나온 졸개들은 보다시피 다 죽였어. 총본산으로 소식이 전해지기까진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아직까지는 여기까지 온 대마두도 없어. 의식이 꽤 중요하나 보지, 빌어먹을 개새끼들.”
“구천에서 쫓아올 교도도 없습니다. 다들 죽거나 스승님의 독에 당해 쓰러졌고, 상층의 기관진식이 일제히 작동하면서 무너졌으니 압사하거나 질식할 겁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기껏해야 이 각이야. 곧 떼거지로 몰려올 테니까 이제부터 잘해야 해.”
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문 사영이 다시 한번 힐긋 스승을 훑어보았다. 피 맺힌 손끝과 검붉게 말라붙은 옷자락, 핏기 없이 희게 질린 피부와 바짝 마른 몸. 무엇보다 달리는 천오에게 안겨 자꾸만 초점을 잃는 눈동자가 견딜 수 없는 살심을 불러일으켰다. 오심에 시달리는 모습이 명백한 와중에도 연신 시선을 들어 자신을 확인하려는 온화한 성정을 마주하자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정말 잘해야 해. 사영은 제 말을 한 번 더 되뇌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악수강과 타림강이 만나는 지점에 마차가 있어. 사현이가 먼저 가서 몰 거야. 강 주위로는 땅이 단단하니까, 거기서부터 남쪽으로 뻗은 호탄강을 따라 쭉 마차를 타고 내려가면 돼. 그렇게 모위현까지 도착하면 그쪽에서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어.”
“마차는 너무 느리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계속 이렇게 달리는 편이…….”
“미쳤어? 다른 곳도 아니고 죽음의 사막이야! 이 지역을 단기간에 종단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차라리 사막에서는 추격만 따돌리고 마차로 안전하게 가는 게 나아. 기껏 모시고 나와 놓고선 모래밭 한가운데서 굶어 죽을래?”
“그렇지만…….”
아이들이 아웅다웅 싸우는 목소리를 들으니 한 가지 사실이 더욱 공고해졌다. 초윤은 울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천오의 어깨 너머 뒤를 살폈다. 고도 높은 산들이 즐비한 산맥, 황량한 불모지의 압도적인 경관, 물기 없는 흙냄새와 척박한 땅을 뚫고 자란 억센 식물 몇 종…….
그리고 구천(九泉), 총본산, 대마두, 교도, 악수강과 타림강을 비롯한 몇 가지 단어.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초윤의 세 아이들이 스승을 찾아 마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까지, 중원에서 넉넉잡아 일만 리 떨어진 이곳까지 기어코 와 버린 것이었다! 초윤이 감금되어 있던 건물을 고작 셋이서 습격한 것으로도 모자라 서문천오는 홀로 지하 깊숙한 곳까지 내려왔으며, 이제는 죽음의 사막이라고 불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이대로 주파하려는 속셈이었다!
도대체 뭐가 있을 줄 알고 여기까지 와!
마교도로도 모자라 광명교인지 하는 놈들까지 있을 텐데 험한 꼴 당하면 어쩌려고 여길 와!
잊어버리고 네 인생 살라고 했던 말은 어디로 들었어!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고 황당했지만 동시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처음으로 아이들을 혼내고 싶었다. 나란히 세워 놓고 언성을 높이며 걱정되는 만큼 성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대로 운신할 수조차 없는 몸은 강렬한 감정만으로도 탈력감을 느꼈다. 천오의 주화입마를 우려한 게 무색하게도 날카로운 불길이 전신의 기맥을 들쑤셨다.
이상을 감지한 천오가 흠칫 몸을 떨며 초윤을 고쳐 안고 조심스레 불렀다. 초윤은 씨근씨근 호흡을 다스리며 가슴을 부여잡은 채 간신히 분을 가라앉혔다. 이렇게 자랄 정도로 시간이 흘렀는데도 날 놓지 못하고 도우러 온 아이들에게, 그저 속상하고 두렵다는 이유로 화를 낼 순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감정을 우선할 상황이 아니었다.
마음이 가라앉자 머리가 핑 돌았다. 선명한 햇빛이 쏟아지며 피부를 데웠다. 그러나 단전을 비롯한 장기는 여전히 한기에 시달렸고, 가뜩이나 모자란 피가 뇌로 한 번 쏠리자 손끝부터 물에 잠기듯 가라앉고 있었다. 탈진의 장막이 전신을 휘감고 숨통을 조였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수면 너머로 점차 멀어졌다.
아, 여기서 내가 기절하면 안 되는데.
추격자가 붙을지도 모르는데…….
끝의 끝까지 걱정만을 거듭하던 의식이 끌어당기듯 침몰했다. 야윈 손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죽음 같은 잠이었다.
◇
“스승님!”
사영과 천오의 목소리가 동시에 겹쳐 울렸다. 천오는 경공을 멈추지 않은 채 서둘러 한 손으로 초윤의 손목을 잡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맥박에 집중하며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헐떡거리던 사영이 황급히 물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괜찮으신 거 맞아?”
“……잠시 혼절하셨을 뿐입니다.”
천오는 침착하게 답하곤 스승의 팔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히 보듬어 안았다. 눈을 감은 초윤의 창백한 안색을 시선으로 더듬고 한결 들끓는 적개심으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안력(眼力)에 집중하자 멀리 앞서 나가는 임사현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 너머로 쭉 이어진 악수강과 지평선에 솟아 있는 모래 언덕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정신을 잃었을 뿐이라는 대답에 안심한 사영이 거침없이 노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이제 말해 봐. 스승님께서 왜 이런 모습이신 거야? 도대체 무슨 짓을 당하고 계셨던 건데?”
“그자에게서 들은 대로 맨 아래에서 두 번째 층에 계셨는데…….”
스산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 천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8년, 자그마치 8년이었다. 바람 앞 등불 같은 희망 하나로 그 시간을 견뎠다. 숨만 쉬어도 꺼질 듯 흔들리는 불꽃을 온몸으로 붙든 채 데든 말든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 끝에 도달한 문 너머 마주했던 광경은 어떠했는가.
저절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스승을 그러안은 손아귀가, 바닥을 딛는 발끝이 난폭해졌다. 천오는 간신히 평정을 가다듬고 나서야 하던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거대한 방 가운데에 석조침상을 두고, 그 위에 스승님을 뉘어 두었더군요. 그때도 정신을 잃고 계셨으며 출혈량은 이미 상당했습니다. 바닥에 진법을 그리고 그대로 홈을 파둔 것 같던데, 이 틈새가 모조리 스승님의 혈액으로 꽉 차 있던 모습으로 보아 사저의 예상이 맞는 듯합니다. 피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오늘 말고는 기회가 없었네.”
“더불어 스승님께 무언가 무도한 약재를 먹였으리라 예상됩니다만, 제 능력으로는 무엇인지 밝힐 수 없었습니다.”
“괜찮을 거야. 그래도 네가 모시고 나올 때 의식을 차리셨잖아. 명색이 활불(活佛)이라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최소한 스승님이 기운을 되찾으실 수 있도록 도와주긴 하겠지. 그 뒤로는 우리 스승님께서 누구보다도 잘하실 테고.”
“……마지막으로, 독공을 쓰실 때 굉장히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뭐?”
순간 경직된 사영이 딱딱하게 옆을 돌아보았다. 의식 없이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스승을 참담한 기분으로 바라본 뒤 시선을 올렸다. 몇 년 사이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에 가까워진 사제는 광인의 눈과 복수자의 안색을 하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드러나는 송곳니는 짐승에 가까웠으며, 씹어 뱉듯 이글거리는 음성은 악귀처럼 들렸다.
“깨어나셨을 때부터 출혈과는 다른 까닭으로 아파하며 몸부림치셨습니다. 내공을 운용하실 때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식은땀이 맺혔고, 제 힘과 행동에 이렇다 할 대항도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스승님의 단전 주위에 고여 있는 한기가 느껴집니다.”
“……설마.”
“이건 제 예상이 맞는 듯합니다.”
천오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자조했다. 그리고 초윤을 재차 고쳐 안은 뒤 대뜸 말했다.
“사저, 아무리 생각해도 마차는 너무 느립니다. 스승님은 한시가 급하신데, 강을 따라 남하하면 눈에 너무 잘 띄기까지 합니다. 분명 종단하는 내내 추격조가 따라붙어 시간을 지체시킬 겁니다. 물통이 있으십니까?”
“그러니까 우리 셋이 번갈아 가면서 서장으로 유도하다가 은폐기물로 조용히 돌아오는 계획…… 뭐? 야!”
“마교도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저.”
사영의 허리춤에서 물통을 뜯어 쥔 천오가 인사말을 남기고 냅다 앞질러 나아갔다. 8성의 공력을 오로지 하체에만 돌리자 안 그래도 빨랐던 속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속되었다. 사영은 본디 향하던 곳과는 다른 방향으로 훌쩍 멀어지는 등을 보며 새파랗게 질린 채 소리를 질렀다.
“미친놈아! 맨몸에 물 한 통 들고 사막을 달리는 새끼가 어딨어! 스승님은 어쩌고! 스승님 쓰러지시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러나 천오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미친놈도 맞았고, 스승님도 이미 쓰러져 계셨다. 대책을 세우고 명마까지 구해 왔다 해도 하루에 끽해야 300리를 갈까 말까 하는 속도에 내심 걱정이 있었던 사영은 결국 혀를 차며 서문천오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들어도 제정신이 아닌 계획인데, 막연한 믿음이 생기는 것을 보면 저놈도 꾸준히 뱉은 말 잘 지키는 미친놈이었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사영과 사현의 차례였다.
궁수이자 첩보원, 화경의 무인이자 하오문의 소문주인 임사영의 기민한 감각에 수십 명의 기척이 한꺼번에 걸려들었다. 마기를 숨기지도 않은 그들은 한참 뒤에서부터 족적을 추적하며 이쪽을 쫓아오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순간부터 사영의 경공이 달라지며 두 사람의 발자국을 남겼다. 다행스럽게도 천오는 흔적을 잘 남기는 편이 아니라서 그다지 번거롭지 않았다.
스승의 앞에서만큼은 다잡아 삼키자고 다짐했던 원념이 다시금 목구멍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매서운 눈은 광괴하게 휘어지며 흥겨운 웃음을 표방했다.
사영은 검지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면사를 끌어 내렸다.
스승님께서 새롭게 지어 주신 세 치 혓바닥 위, 선명하게 새겨진 금(禁) 자가 검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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