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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06화 (206/257)

206화

거창한 각성은 필요 없었다.

물어뜯은 채로 아물어 흉하게 팬 손이 오래된 약함을 하염없이 쓸었다. 오돌토돌한 나뭇결을 손톱으로 긁고 금속으로 마감한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강향단을 깎아 만든 뒤 오랜 시간이 지난 약함은 본디 가진 향 대신 그의 체취를 입었다. 달이 몇 번을 차고 기울어도 약재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차라리 나약했다면 좋았을 텐데.

작은 흔적에도 쉽사리 의지를 맡기고 그를 만나는 꿈에 빠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가슴에 박힌 말뚝을 무시하고 잠들 수 있는 자는 없다. 자신이 편안히 숨 내쉬는 이 순간에도 그는 내몰려 있다. 살아 있는 것 자체로도 낙인이 찍히는 감각은 오랜만이다.

이 방에 남은 자는 자신밖에 없었다. 누구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들 스스로를 탓하느라 사형제에게 돌릴 칼날 따위 남아 있지도 않았다. 자학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자는 유약하게만 보였던 사형이었다. 그는 연갈색 눈으로 창 너머에 흐르는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일어섰다. 오열도 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누이의 어깨를 꾹 쥔 채 자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나갈게. 모두가 곧 따라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모양이었다.

사저는 그 뒤로 나흘도 지나지 않아 일어섰다. 손에는 더러워진 비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알지, 네가 가장 중요해.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알아들었다.

서문천오는 처음부터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무심서에 비할 바 못 되는 방 안에서 그를 대하듯 무릎을 꿇고 앉아 약함만을 한참 들여다본 까닭은 따로 있었다. 정신을 놓은 듯 석죽은 눈을 하고서도 끊임없이 획책하던 사저만이 알아차렸다. 약내음 물씬한 진창을 벗어나는 뒷모습을 묵언으로 배웅했다.

그리고 서문천오는 계속해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믿고 따를 등이 없으니 그 등에 업혀 있던 물건이라도 보아야 했다.

소중한 이를 쓰다듬듯 부드럽던 손이 가늘게 떨리며 약함의 겉면에 희미한 생채기를 남겼다. 내력을 잃고 식음을 전폐한 몸뚱이가 드디어 흰 잔상을 보여 주었다. 그분의 것을 망가뜨리면 안 되는데. 설핏 든 불안이 무색하게도 불현듯 깨달았다. 겨우 이따위 약함에 박고 싶은 손톱이 아니었다. 그 등의 살점이 갈라지든 말든, 피 흘리던 팔뚝의 뼈가 부러지든 말든 개의치 않고 붙잡아 당겨야 했다. 몸이 으스러지도록 두 팔로 끌어안고 바닥에 발을 박아 버텨야 했다. 그는 그 자신만을 내어 준다면 모든 일이 해결되리라 생각한 듯했지만, 그를 보낸 것 자체가 실패의 증명이었다. 깃발 잃은 군대가 절대로 긍지를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목숨 잃은 사람이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하나를 빼앗긴 순간 서문천오의 생애는 실패의 연장일 뿐이었다.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가 서문천오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만큼은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의 판단이 틀렸다. 그의 판단이 틀릴 수 있었다.

서문천오는 그의 지시를 따르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일을 망치더라도 기어코 손을 뻗었어야 했다. 차라리 같이 죽었어야 했다. 그의 말에 오롯이 따르는 얌전한 아이였기에 이 자리에 덩그러니 버려지고 말았다.

그는 서문천오에게 진리며 기준이다. 그를 따르는 일이 순리라면, 그를 거스르는 일은 역리다.

이치를 벗어난다는 개념은 생각보다 별것 없구나.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손등 위로 금이 생겼다. 마른 땅과 깨진 도자기, 혹은 뻗은 나무줄기처럼 시작된 균열은 그대로 팔꿈치를 지나 전신을 덮었다. 입술을 달싹이자 부스러진 조각이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수십 개의 녹슨 침이 강성하는 기맥에서 밀려 나와 동강났다. 머리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바닥 깊은 눈이 손톱자국 가득한 약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서문천오는 느릿느릿 고개를 숙여 약함에 뺨을 올리고 양팔로 끌어안았다.

우습게도 당신이 이제껏 보여 주었던 모습이 있기에…….

이제 와 소소한 대거리를 하여도 내쳐지지 않으리라 믿을 수 있다.

전신에서 버스럭버스럭 파편이 뒤척였다. 자처해 뒤집어썼던 순종의 껍질이었다.

작열하는 태양이 무른 바닥을 달구었다. 반사된 햇볕에 열 오른 공기가 지면 가까이서 아지랑이로 일렁였다. 옅은 바람이 고운 입자의 세사(細沙)를 머금은 채 머무적거렸고, 곳곳에 솟아오른 모래 산의 능선을 연신 깎아 내리고 다시 쌓길 반복했다.

서문천오는 눈이 아프도록 황량한 사막의 한낮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발이 푹푹 빠져야 마땅한 모래밭 위를 깃털처럼 거닐며 한 걸음마다 일 장을 나아갔다. 그 뒤로 이어져야 할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내리쬐는 햇빛에 익은 피부를 모래바람이 할퀴고 지나가니 따끔한 통증이 잇따랐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뜨거운 온도를 품은 채 목뒤와 등을 덮었고, 마시는 숨마다 텁텁한 흙이 입 안과 목구멍을 채웠다.

이렇게 일광이 만연하고 건조한 곳에선 도리어 검은 옷으로 머리와 몸을 감싸야 시원하다는 사실은 일찍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고 온 검은 장포는 다른 이의 몸을 둘둘 휘감느라 이미 제 것이 아니었다.

서문천오는 품 안의 스승을 조심히 고쳐 안았다. 등에 업으면 운신은 쉽겠지만 이 지독한 더위가 스승의 등으로 곧장 쏟아질 게 분명했다. 스승은 이미 한서불침의 경지에 달했으나, 팔 너머 느껴지는 체온은 자꾸만 흔들렸다. 쇠약해진 이들은 가장 먼저 항상성을 잃으니 제 몸으로 일구어낸 한 뼘의 그늘이나마 스승의 몸 위에 드리우고 싶었다.

낮밤이 두 번 바뀔 동안 쉼 없이 달렸다. 지표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해 지는 방향과 별 뜨는 궤도만을 길잡이 삼아 뛰었다. 머릿속으로는 나름의 계산을 맞췄다. 사저는 모위 현에서 활불과 만난다고 했다. 마차가 갈 수 있는 거리는 하루에 250리 남짓. 1200리에 달하는 강의 길이와 마교의 추격, 말의 피로를 생각한다면 모위 현까지 일주일 이상이 걸릴 게 분명했다.

모위 현은 천산남로와 더불어 이 사막을 둥글게 둘러싼 무역로인 서역남로의 주요 거점 중 하나. 사막녹주(沙漠綠州)에 터를 잡고 번성한 사막의 마을들은 대부분 마교에 공물을 바쳐 안위를 유지하고 있으니 어느 도시든 오래 머무를수록 위험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활불은 남로를 고스란히 따라오기보단 더 남쪽에 있는 곤륜산맥을 횡단하길 택했을 것이고, 그자를 중간에 만나야만 하는 천오는 적어도 이틀 안에 이 사막을 다 건너야 했다.

이는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품 안에 죽은 듯 늘어져 있던 몸이 일순간 세차게 요동했다. 지난 이틀간 네 번을 겪었지만 여전히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천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발을 옮겼다. 머지않은 물 냄새를 맡은 코끝이 미세하게 찡긋거렸다. 스승의 폐부가 숨을 다 담지 못하고 작게 들썩이자 덩달아 제 속이 타들어 갔다. 운기가 격렬해지고, 경공은 거세졌다. 바람이 미끄러진 듯 발자취 하나 없던 자리에 강풍이 몰아친 것처럼 푹 꺼진 자국이 이어졌다. 자연과 동화하는 미무일식공은 사막 한가운데서 사나운 모래바람의 형태를 갖췄고, 폭발하듯 나아가는 발뒤꿈치 뒤로 황토색 사풍이 몰아쳤다.

이윽고 불러일으킨 바람을 타고 바닥을 박차며 높이 뜨자 작은 반달 모양 녹주가 시야에 들어왔다. 맑고 아담한 연못 주위엔 억센 식물들이 소박하게나마 뒤엉켜 자라 있었다. 그 옆으로 눈만 내놓은 채 검은 옷을 전신에 두른 십수 명의 인간과 낙타들이 보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한 손으로 스승을 받치고 내달리며 다른 손으론 허리춤의 백홍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금방 놓아 버리곤 스승을 고쳐 안았다. 몸을 숙이고 두 발로 내리찍듯 녹주 옆에 착지했다. 둔중한 진동이 반경을 울리자 물에는 파문이 일었고, 진녹색 풀잎은 바르르 떨었다. 천오는 차게 식어 가는 스승의 등을 연신 쓸어내리며 검은 옷의 인물들 중 가장 강해 보이는 이에게 다가갔다.

그는 곡도를 뽑아 든 동료들을 한 팔로 가로막은 채 맨 앞에서 천오를 맞이했다. 긴장한 몸과 두 눈에서 보이는 경계심이 예리했다.

조급증에 손끝이 곱아들었으나 천오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단정한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휴식을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일행의 몸이 좋지 않아 잠시 머무르고 싶습니다만, 양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남자는 여전히 방어적인 자세를 풀지 않은 채 거친 억양으로 대답했다. 천오는 한 번 더 묵례하고, 뒤돌아선 녹주 가장자리의 그늘진 곳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경련하기 시작한 스승의 몸을 다리 사이에 앉히고 자신의 가슴에 등을 기대게 했다. 힘없이 늘어진 발끝이 물가에 닿자 눈꽃 모양 성에가 수면에 번졌다.

천오는 스승의 얼굴과 몸을 휘감은 제 옷자락을 다급히 헤쳤다. 검은 장포 사이로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파리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술을 비집고 새는 숨이 하얀 한기로 가득했다.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보라색으로 얼어붙은 스승의 손에 서둘러 제 손을 얽어 쥐었다. 다른 손은 스승의 가슴부터 쓸어내려 가선 아랫배를 눌렀다. 맞닿은 손바닥으로, 가슴으로, 단전으로 전해지는 한기에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데일 듯 뜨거웠던 피부에 살얼음이 끼고 기맥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천오는 이상할 정도로 차게 식은 채 흘러넘치는 스승의 내력을 물가로 흘려보냈다. 동시에 미무일식공으로 주위에 만연한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뒤 내공의 형태로 빚어 닿은 몸에 천천히 불어넣었다. 처음에는 세맥조차 녹이지 못했던 온기가 천천히 스승의 몸에 스며들었다. 굳은 기맥을 어루만지고 가시 같던 내력의 조각을 부스러뜨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눈을 뜬 천오의 입술엔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뉘엿뉘엿 지는 해는 상아색 모래를 황금빛으로 물들였고, 나아가 초윤의 몸을 덮는 따스한 면사가 되었다. 수척한 얼굴에 사그라든 고통을 꼼꼼히 확인한 천오는 스승을 그러안은 채 그대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는 이유가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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