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배웅의 말이 익숙지 않은 듯 남자가 뒤에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걸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잡기에는 보여 준 신위가 심상치 않고, 말기에는 이 사막의 혹독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천오는 이미 초윤의 다리를 팔뚝으로 받치고 엉덩이 밑에서 손목을 잡은 뒤 미끄러지듯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급했던 일이 마무리되자 발밑으로 이어져야 할 족적은 다시 모습을 감춘 뒤였다.
까마귀처럼 새까만 남자와 장포 속에 몸을 숨긴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백화인. 사막 한가운데서 눈으로 좇다 놓치기엔 지나치게 특이한 조합이었으나 시선을 돌리면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걷는 모양새와는 별개로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이 모래바람에 흩어질 것처럼 흐렸다. 서툰 도적은 목뒤만 쥐어뜯다가 와락 소리쳤다. 막사를 치고 있던 부하들이 깜짝 놀랄 만큼 벼락같은 목소리였다.
“거 조심해서 가시오! 이 등지에 나처럼 보는 눈 달린 놈들만 있다는 법은 없으니까!”
별 의미 없는 말 한마디나마 어떻게든 달아 둬야만 할 것 같은, 마주치고 살아남은 지금 어떻게든 잘 보여 둬야만 할 것 같은 조바심. 생존본능에 직결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들려온 외침을 선명하게 들은 서문천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업은 사람을 한차례 고쳐 안고, 등 너머 살아 숨 쉬는 기척에 안심할 뿐이었다.
모래는 빨리 달구어지는 만큼 또 빨리 식어 버렸다. 해가 지며 어두워지기 무섭게 한기가 엄습했다. 체온이 일정치 않은 이에게 극단적인 일교차는 치명적인 법. 이에 천오는 한계까지 공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중 7할은 경공에 할애하고, 3할은 맞닿은 피부를 통해 스승의 몸으로 밀어 넣어 순환을 도왔다. 오래전 기능을 멈췄거나 삐걱거리기 시작한 약선 초윤의 신진대사를 활발히 하고, 흔들리지 않는 온기를 전하며 걸음을 옮겼다. 미무일식공은 주변의 자연에서 얼마든지 축기할 수 있는 무공이며 사람의 손길이 그다지 닿지 않은 이 사막은 삭막할지언정 소모된 내공을 회복하기엔 최적의 장소였으나 쉽사리 이곳의 기운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더운 낮일 땐 몰라도 자신의 내공에 한기가 섞이면 애써 데우고 있는 스승의 육신을 식힐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사막에 들어선 지 이제 와선 사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모한 내력을 다시 쌓을 시간도 없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내달린 몸이 피로감을 호소했다. 온종일 힘이 들어간 허벅지와 종아리가 뻐근했고, 오랜만에 숨이 찼다. 막대하던 내공은 수문이 열린 것처럼 아낌없이 빠져나갔으며 물기 없이 부르튼 피부는 어디 하나 거슬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목덜미에 와 닿는 숨결이 있었다. 천오는 이대로 평생을 사막에서 헤맨다고 하여도 이 감각과 맥박만 사라지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허리춤에서 육포를 꺼내 입에 물자 품질 낮은 고기의 불쾌한 냄새가 코끝에 닿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별이 하늘을 흐르듯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불 밝히지 않은 밤은 별빛을 더욱 환하게 했다. 해가 지고 나서야 드러난 이정표는 여명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그 끝에 닿으리라.
순례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아이고오오오.”
멀찍이서 들려온 우렁찬 곡소리가 북적거리는 골목을 가득 메웠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깨를 수그린 채 쿡쿡 웃었고, 노점을 펼치고 앉아 있던 상인들도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지 피실피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인지 모르던 이들 역시 아무에게나 사정을 물어 들은 뒤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 와중 유일하게 웃지 못하는 한 무리가 차양 아래 옹기종기 모여 선 채 한 사람의 눈치만을 살폈다. 홀로 나무 의자를 가져와선 허벅지 한쪽에 다른 발목을 턱 걸친 채 불량하게 앉아 연신 이마를 쓸어내리는 여자였다.
“후…….”
가늘게 떨리는 호흡에서 가슴 깊은 곳의 짜증이 묻어 나왔다. 이곳의 복식에 맞추어 흰 두건을 쓰고, 밑단에 가로 줄무늬가 들어간 장수견포를 꽉 여며 입은 여자는 턱 근육이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악문 뒤 양손을 내려 깍지를 꼈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숨길 수 없는 노기가 드러났다. 그 뒤 한 뼘만 한 그늘에 모여 선 남자들은 힐끔힐끔 여자를 살피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 소리를 내 버린 사제의 뒤통수를 뻑 소리가 나도록 후려갈겼다.
“야 이 새끼야, 너는 웃음이 나오냐?”
“어억!”
얼떨결에 맞은 남자가 머리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때린 이는 나름 훈계를 하려는 듯 짧은 어휘력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어? 산만 타도 모자랄 시간에, 어? 저 다길이 새끼 더러운 짓 때문에 내려와서 이게 뭔 꼴이야, 어? 궁주님 화난 거 안 보여? 웃음이 나와?”
“아니, 그치만 저 멍청한 새끼가 그 멀리서도 여기까지 다 들리게 아주 광고를 하고 있는데 웃긴 걸 어쩝니까. 이제 아이고 소리만 들어도 배가 찢어지겠다고요.”
“물론 그거야 그렇지만……!”
기세 좋게 말하던 덩치 큰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여자처럼 화를 참기보단, 저도 모르게 새어 나갈 뻔한 웃음을 어떻게든 억누르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상대를 한 번 더 때릴 듯 손을 치켜든 채 새빨개진 얼굴로 떠듬떠듬 말했다.
“물론…… 지금 이 동네 온 사람들이 다 다길이 새끼 엉덩이 사정을 알게 됐지만…… 멍청한 놈이 그것도 모르고 일 다경 째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함께 서 있던 덩치 큰 남자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애써 삼키고 있던 웃음기가 표정의 균열로 새어 나왔다. 주도적으로 말하던 이의 목소리가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건 명백히…… 어? 일정이 늦어진 거고…… 궁주님이 먹지 말라 하신 걸 주워 먹은 저 새끼 잘못이고…… 어? 우리가 아주 곤란하게 됐단 말이야……. 지금 다길이 새끼가 사막에서 까고 있는 엉덩이 때문에!”
결국은 폭소가 터져 나와 주위의 사람들한테까지 번졌다. 좋게 말해 건장하고 나쁘게 말해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뒤집어지도록 웃자 온 거리의 눈길이 이쪽으로 쏠렸다. 한참 이어진 세찬 웃음을 한순간에 뚝 그치게 만든 건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여자에게서 흘러나온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야…….”
희미한 소리였지만 그 안에 서린 경고와 노기를 귀신같이 알아들은 남자들이 재빠르게 차렷 자세로 열을 맞추고 섰다.
“지금 이게…… 웃기냐?”
여자의 목소리는 그다지 날카롭지 않았으나 섬뜩하게 심장을 찌르는 불안감이 있었다. 도열한 남성들이 정면을 바라보며 음성을 맞추어 각지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궁주님!”
“웃겨서 웃은 거잖아, 지금…….”
“죄송합니다, 궁주님!”
“상황 파악이 안 되지? 그러니까 씨발 먹지 말라고 한 신강 산유(酸乳)를 게걸스럽게 처먹고 이 난리를 쳤겠지…….”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진다는 듯 갈수록 음성이 깊어졌다. 수그린 어깨가 한눈에 보기에도 위험할 정도로 들썩였다. 활기차고 생기 넘치는 낮 시장과 유리된 듯 전쟁터의 한복판처럼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낄낄대던 남성들은 섣불리 움직이거나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마른침만 삼켰다. 꽉 쥔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무언가 터지고야 말 것 같은 분위기를 흩트린 건 시장 저편에서 불쑥 나타난 또 다른 남자였다. 복식은 다른 이들처럼 이곳의 문화에 맞추어 입었으나, 까맣게 물들인 명주천을 복면처럼 휘휘 감아 눈만 드러낸 남자가 예리한 공기를 익숙한 듯 헤치며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주머니 가득 사 온 건포도를 한 알 집어 정면을 노려보던 여자의 입술에 갖다 댔다.
“연천, 여기 건포도 맛있네요.”
“…….”
다 알면서도 능청을 부리자 돌아오는 건 매서운 눈길이었다. 여자는 노여움 가득한 시선을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분에 겨운 한숨을 푹 내쉬며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건포도를 받아먹었다. 복면을 쓴 남자는 가볍게 웃고 여자의 어깨를 다독이고선 건포도 주머니를 쥐여준 뒤 도열한 일행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이미 구원자를 만난 듯 남자를 바라보며 환호하는 중이었다. 장령, 멋지다! 장령, 대단하다! 세기의 함락자, 잘생겼다! 그러나 남자에게서 약간의 눈웃음과 함께 되돌아온 말은 매몰차기 그지없었다. 좀 닥쳐요.
얼굴을 가린 남자, 장령이 철석같이 입을 다문 일행 중 가장 덩치 큰 사람에게 물었다. 웃어 버린 사제를 잡으려다가 더 큰 사태를 초래해 버린 인물이었다.
“길상다길은 아직도 안 온 거 맞죠?”
“어, 진짜 내장을 다 비우려나 본데.”
“청해의 발효유와 신강의 산유는 다르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뭐, 사서 욕을 먹는 것도 본인 팔자겠죠.”
장령이 어깨를 으쓱이고 여자를 힐긋 돌아보았다. 주머니를 열어 야금야금 건포도를 씹고 있는 모습을 보아선 당장의 위기는 지난 듯했다. 눈치 없는 일행도 어느 정도 풀어진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자세를 편히 하곤 시답잖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역시 고기 맛이 다르다느니 난이 제법 배부르다느니 대부분 식욕과 관련된 잡담이었다.
그때, 반대편 골목에서 엉덩이 두 짝을 부여잡고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근처의 모래밭에서 불편한 장을 싹 비운 막내 길상다길이었다. 애써 웃음기를 지웠던 일행이 다시 한번 왁자지껄 낄낄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방금 있었던 일은 싹 잊은 듯 당장의 우스운 일에 정신이 팔린 모양새가 그들의 높지 않은 지능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장령은 낯설지 않은 상황에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고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저 인간들은 늘 멍청한 짓을 한다는 이유로 이 여자에게 가루가 되도록 처맞으면서도 바뀌질 않았다. 결국 골머리가 썩는 건 여자였고, 그 기분을 풀어 줄 수 있는 사람 또한 남편인 장령뿐이었다.
건포도는 이미 써먹었는데, 이번엔 무슨 방법으로 신경을 돌릴까…….
알아서 납작 엎드려 사는 장령은 호랑이 같은 아내를 어떻게 달랠지 고민하며 몸을 숙여 앉아 있는 여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러나 야차 같은 표정을 하고 있으리라 예상했던 여자는 허공 어딘가를 고요하게 노려보며 집중할 뿐이었다.
의아함에 눈을 몇 번 깜빡인 장령이 여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옮겼다.
지평선 부근, 메마른 땅에 솟구친 모래바람이 이쪽을 향해 무섭도록 다가오고 있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재액을 눈치챈 사람들이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거나 노점을 접기 시작했다. 흉흉한 황토색 폭풍이 가까워질수록 그 속에 껴안은 먼지바람과 그림자의 규모가 거대해졌다. 장령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자며 여자를 부르려 했다.
그러나 여자는 앉아 있던 의자의 손잡이를 내리누르며 벌떡 일어났다.
“살면서 별 미치광이는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웃길 노릇이구나.”
오래 산 맹금류처럼 노련하고 적확한 눈동자가 모래바람의 중앙을 꿰뚫고 본질을 보았다. 한참 떨어진 거리를 무시하고 그 안의 새까만 눈동자 한 쌍과 마주쳤다. 도망치는 이들은 몸을 불린 모래바람에서 위협을 느꼈는가, 아니면 그 안의 사람이 퍼뜨리는 기운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는가.
여자는 굳어 있던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호령했다.
“가자, 새끼들아! 괜한 마을 장사 공치기 전에 나가 줘야 할 거 아니냐!”
“아니, 폭풍이 저렇게 오는데요?”
“잘 봤다. 저기로 간다!”
경악하는 부하들을 뒤로하고 팔짱을 낀 여자는 단호하게 확신했다. 편지 한 장에 기대어 이 머나먼 타지까지 온 이유가 바로 저곳에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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