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서문천오는 녹주에서 만나 물통과 육포를 건네준 남자 이후로 마주친 이들을 모조리 도륙 냈다. 가진 게 없다면 검이라도 풀어 내놓으란 말은 그나마 친절한 편에 속했고, 몸뚱이를 보니 잡아다 팔면 돈 좀 되겠다는 망발부터 아예 문답무용으로 구는 경우도 빈번했다. 사막의 도적들은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자주 나타났으며, 천오는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세 문장가량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그뿐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입씨름을 할 순 없었고, 스승이 언제 발작할지도 모르는데 뒤에 성가신 꼬리를 단 채 도망만 칠 수도 없었다.
살인을 피할 수 없는 이유를 두 개 정도 생각해 낸 천오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백홍을 뽑아 들었다. 낙타 위에 앉아 천오를 포위하고 둥글게 돌던 도적들의 상반신이 일 합에 가로로 갈라졌다.
그들이 남긴 식량과 물을 챙기고, 시신에서 검은 천을 벗겨 머리와 얼굴에 감았다. 낙타에 타 보려 했으나 제 다리보다 느려서 놓아주었다. 널브러진 몸뚱이들은 주인이 사라진 물건을 거두는 동안 그새 절반쯤 모래에 파묻혔다. 저대로 살점에 이어 유골까지 바람에 흩어지겠지. 먼 길을 걸어오는 동안 형태 없이 죽은 유해는 도처에 널려 있었다.
모든 목숨의 무게는 막중하다고 배워 왔지만 가르치는 이가 사라진 8년은 의문의 연속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목숨을 중히 여기지 않는 타인에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남의 목숨을 해하는 자는 자신의 생명을 이미 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서문천오에게 죽음이란 흔해 빠진 현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사람은 다들 느닷없이 허무하게 죽었기에 어떠한 감상이나 유감도 갖지 않았다. 자신이 귀하게 여겨야 할 목숨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 내 등으로 전해지는 심장의 고동밖에…….
그러나 어쨌든 그 귀한 사람에게 배웠다는 사실이 길지 않은 생애의 굳건한 자긍심이니 시야 좁아진 머리로도 살인이 끼칠 영향을 생각했고, 귀찮은 입을 열어 경고도 하긴 했다. 그런데도 덤벼드는 이들은 더 이상 인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좋은 것만 먹고 자라 화수분 같던 내공은 마음이 급해질수록 빠르게 닳아 갔다. 이에 따라 검격이 거칠어지며 깔끔하지 못한 궤적을 남겼다. 쏟아지는 피가 스승에게 닿지 않도록 뒷걸음질하자 얼굴과 앞섶이 지저분해졌다. 다른 이가 보면 기겁할 몰골이 되어서도 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막았단 사실에 만족하며 성긴 걸음만 옮겼다.
그렇게 이틀하고도 한나절을 더 걸었다. 당초 예상한 사나흘보다 훨씬 늦어 버렸다. 지난밤부터는 발작도 없었다. 상태가 나아져서 진정된 것이라면 다행일 테지만, 죽은 듯 축 늘어진 채 희미한 맥박 말고는 아무 반응도 없는 이를 안고 바뀌지 않는 풍경 속으로 나아가는 일은 그야말로 고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볼품없이 쉰 목소리로 하염없이 그를 불렀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르는 말들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을 쥐어뜯다 못해 혈관을 긁으며 기어 다니는 상념들을 잠시나마 가라앉혔다. 이젠 지표면에서 일그러지는 대기처럼 눈앞이 흔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다리를 멈추진 않았다.
무리하게 끌어 올린 내공에 한 움큼 피가 역류해도 마침 목이 말랐다며 삼켰다. 잊은 지 오래되었던 더위와 추위가 한꺼번에 뼛속을 파고들었으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어릴 적 같아 실없이 웃었다.
무심서로 돌아갈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스승을 모시고 안식처로 돌아갈 테다. 아침이면 산안개로 차고 습해 들숨으로 폐를 씻는 그곳으로, 낮에는 태양 아래 가까이서 햇빛을 쬐는 그곳으로, 밤에는 당신과 나 사이에 뒤뜰의 개울 소리만이 유일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독이 비면 마을로 내려가자. 이젠 나도 충분히 자랐으니 약함이며 칠현금이며 대신하여 들 수 있다. 등 뒤에 가득 짐을 지고도 양팔로 당신을 안을 수 있다. 멀리도 가지 말고 산 앞의 작은 장에만 다녀오자. 다시는 그 너머로 나가지 말자. 당신을 너무 오래 잃었다.
이미 오래전에 미쳐 버린 사람티를 내며 중얼거리는데, 성치 않은 눈에 무언가 거슬리는 상이 잡혔다. 멀찍한 지평선에 새끼손톱보다 작고 네모난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 색색의 천을 휘날리고 있었다.
건물인가? 충혈된 눈이 가늘어지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두 눈에도 제대로 들어오면 좋겠다만 맨 앞에 선 희끄무레한 형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기세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잘 벼린 창과 굳건한 성채들이 두 다리로 뛰어 다가오고 있었다. 앞서 달리는 자의 흰 두건 아래서 서슬 퍼런 안광이 한순간 번득였다. 순간 느슨하던 몸에 따끔한 긴장이 흘렀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강자였다. 그것도 드디어 도달한 도시를 앞에 두고.
혹사당한 육신이 삐걱거렸지만 무기 뽑는 소리는 놓치지 않고 들었다. 처음 보는 이들이 먹이라도 발견한 듯 달려오며 무장을 한다니, 지난 이틀간 겪은 바가 있어 무던히 대응할 수 없었다. 서문천오는 혼미한 정신에 굳건한 심지를 박아 고정했다. 끌어안고 있던 스승의 몸을 뒤로 업어 한 팔로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춤에서 백홍을 꺼내 쥐었다. 내딛는 발이 모래 바닥에 닿기 전에 아낌없는 발경(發勁)으로 허공을 박찼다. 높이 뛰어오르며 곧게 치켜올린 검이 시린 햇빛을 사방으로 반사했다. 그리고 그대로 추락하며 선두를 향해 내리그었다.
분명 가벼이 허공에 떴으나 바닥에 처박힌 무게는 육중했다. 원형의 충격파가 쇳덩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한 박자 늦게 주위를 진동케 했다. 무른 모래로 이뤄진 지반이 한 자 깊이로 폭삭 무너지고, 먼지구름이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그때 서문천오가 경공을 운용하며 일으켜 온 모래 폭풍이 잔바람으로 흩어지며 황토색 분진을 말끔히 날려 버렸다. 그렇게 드러난 광경은 천오의 무표정에 미세한 실금을 그렸다.
일격이 막혔다는 사실은 손에 전해진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많은 강자를 거쳐 왔으므로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검을 막은 물건은 같은 검도, 다른 무기도 아니었으며 하물며 손가락으로 집은 것도 아니었다.
두건을 쓴 여자의 손끝이었다.
여자는 소림의 승려들이 반장(半掌)을 하듯 손가락을 붙이고 곧게 편 채 위로 향해 내밀고 있었다. 짧게 다듬은 손톱에 녹송석 가락지를 끼고, 금과 청옥을 깎아 만든 여러 개의 팔찌를 채운 손은 별달리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러나 마땅한 강기를 두른 것 같지도 않은 손끝에, 그다지 힘을 주지도 않은 듯한 행동에 서문천오의 검이 막혔다. 지난 8년간 무뎌지는 일 없었던 백홍의 검날이 여자의 피부 하나를 가르지 못하고 멈춰 있었다.
내공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반박귀진인가? 천오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여자가 데려온 일행은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우두머리와 서문천오가 대치하는 광경이 드러나자 능숙하게 주위를 포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의 앞에, 내민 팔 밑에 몸을 웅크리고 자리 잡은 채 버들잎 모양의 납작하고 예리한 칼날을 천오의 가슴에 겨누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무런 기척 없이 미끄러지듯 위치를 잡은 그는 섬뜩한 적개심이 어린 눈으로 천오를 올려다보았다.
짧은 찰나 수많은 전략이 머리를 스쳤다. 일대다의 싸움에 강자가 껴 있다면 물러나 졸개부터 처리해야 했다. 이 둘은 일단 내버려 두고 포위망으로 물러나자. 저들 일행의 몸을 방패 삼아 비도를 피하고, 합공이 닥치면 남자부터 죽여 변수를 줄여야겠다.
살인을 마음먹자 초점 없던 까만 눈이 조금씩 반들거렸다. 앞에서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비도가 날아와 박히더라도 타격이 덜하도록 상체를 조금 비틀며 검을 거두려는데, 귀가 얼얼할 정도로 강렬한 일갈이 냅다 고막에 내리꽂혔다.
“어린 놈의 새끼가 버르장머리 없이!”
고된 여정과 감정의 혹사로 흔들리던 천오의 정신을 단번에 후려쳐 깨울 만큼 단호한 공력이 가득 담긴 호령이었다.
벽력같이 꾸짖은 여자는 칼날을 막고 있던 손을 그대로 주먹 쥐었다. 이상하게도 그 손에서 백홍을 떼어 낼 수 없었다. 손가락 관절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굽혀 단단하게 움켜쥐자 여자의 주먹 위에 날 세운 검이 고스란히 올라갔다. 팔꿈치와 손등이 일직선을 그리고, 그대로 잔상처럼 조금 흐릿해진다 싶더니 강한 반탄력이 백홍을 튕겨 냈다. 퉁 소리와 함께 몇 발자국 물러난 천오는 얼얼한 손아귀에 힘을 주어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런 뒤 기세를 가다듬고 검극으로 여자를 겨누었다.
그때, 퇴로를 막고 있던 여자의 일행 중 한 명이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궁주님……. 제가 먼저 검 뽑아서 저 친구가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은데요.”
“죄송합니다……. 저도 같이 뽑았습니다. 하지 말라 하셨는데 무심코…….”
“아니 그런데 어쩝니까. 이따만 한 모래폭풍 안에 웬 피투성이 산발한 미친놈이, 어이쿠. 처, 처음 보는 사람이 무섭게 다가오는데 손이 검을 안 뽑고 배겨요?”
“다길이 이 새끼가 말을 해도! 아무튼 저, 버르장머리 없다고 너무 노여워 마시고…….”
“……하여간 하등 쓸모없는 새끼들!”
주절주절 흘러나오는 변명을 듣고 있던 여자가 버럭 성을 내곤 천오를 바라보았다. 가슴 앞에 내밀고 있던 손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복면을 쓴 남자는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아도 쉽사리 자세를 풀지 않은 채 천오를 노려보았다. 여자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기 전까진 버들잎 칼날도 내려놓지 않았으나, 곧 눈가를 찡그리며 일어나 연인의 옆에 섰다.
여자는 천오 앞에 당당히 팔짱을 끼고 명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었군. 미안하다! 이쪽의 잘못이다.”
“…….”
“네 등에 업힌 자는 누구지? 약 냄새가 나는데.”
일련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오는 백홍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등에 업은 스승을 앞으로 다시 돌려 안으며 장포 바깥으로 툭 떨어진 야윈 팔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자신을 향해 정확히 다가오던 모습과 검기 두른 검을 손끝으로 받아 낸 신위, 그리고 도적들과는 다른 억양을 곱씹은 천오가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천오는 얼굴에 감고 있던 천을 끌어 내리고 까끌한 목을 다듬어 말했다.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질문을 받은 여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건을 뒤로 젖혔다. 반 가르마를 타고 길게 늘어트린 검은 머리카락 타래가 구불거리며 흘러내렸다. 피부는 햇빛에 그을린 색이었고 두 뺨은 붉었으며 얼핏 보기엔 젊었으나, 천오는 나이 든 눈을 가진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살아왔기에 알 수 있었다. 최소 반로환동의 고수임이 분명한 여자는 여유롭게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천오에겐 뜻밖의 조우였다.
“나는 곤륜파 운궁(雲宮)의 궁주, 나라연천금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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