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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10화 (210/257)

210화

청해성의 서쪽 끝자락, 곤륜산맥에 있다는 그 문파?

곤륜파는 뛰어난 실력과 드높은 위상으로 당당히 백협맹의 일원을 차지하였으나 중원과 거리가 너무나도 먼 탓에 쉬이 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나름 잔뼈가 굵은 사영도 그렇고, 많은 곳을 돌아다닌 사현까지 곤륜파의 도사는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거기에 더불어 하오문마저도 굵직한 소식 아니면 정보를 얻기 어렵다고 한 데다, 문파 자체의 성향도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라 근처에 다가가기도 힘들다고 전해 들었다.

곤륜파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떠올린 천오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도를 펼쳤다. 자신이 방향을 잘 잡아 왔다면, 이곳은 서역남로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여기서 곤륜파까지의 거리는 중간에 우뚝 선 산맥을 제외한다고 해도 직선거리로 대략 천오백 리. 어딜 어떻게 봐도 가벼운 마음으로 마실 나올 거리는 아니었다……만.

천오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만, 급한 일이 있어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점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문천오는 마음에도 없는 예의를 차리며 스승의 몸을 감싼 장포를 잘 여몄다. 다행히도 팔을 제외하면 별달리 노출된 곳은 없었고, 체온도 아직까진 조금 낮은 정도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천오가 만나야 하는 사람은 활불이었다. 이는 덕행이 높은 승려를 우러러보며 일컫는 호칭이었으니 도교 문파인 곤륜파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곤륜파 정도 되는 굵직한 집단이 하필이면 이 시기에 서역남로를 지나가고 있단 상황 정보만큼은 중요해 보였으나, 천오는 사영이나 희처럼 온 무림의 상황을 파악한 뒤 머릿속으로 대국을 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알아낸 것을 사영에게 전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여겼다.

그래서 이만 자리를 피하려는데, 나라연천금강이라는 사람이 어딘가 미묘한 표정으로 툭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 급하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사막을 아주 홀로 겪고 온 듯한데.”

“…….”

활불도 청해성의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아는 사이인지 물어볼까?

아니, 위험이 너무 크다. 이 사람들이 스스로 밝힌 신분을 어떻게 믿고 중요한 목적을 밝히겠는가. 지난 8년간 보아 온 마교의 장악력은 상당했다. 한참 멀리 떨어진 중원을 그만큼 파먹었다면 본진인 신강의 사막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도시로 들어가는 일마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무얼 누출할 수 있겠는가.

빠르게 계산을 마친 천오는 누그러지지 않은 경계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활불을 만나러 가는 중인가?”

그러나 곧장 정곡을 찔렸다.

서문천오는 조금도 움찔거리지 않았다. 그저 나라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늠할 뿐이었다. 제 목에 와 닿는 무심한 살의를 알아챘는지, 나라연은 쯧쯧 혀를 차며 인상을 썼다.

“분명 모위현에서 넷을 만나기로 했는데, 겨우 반절 길을 온 차에 두 명밖에 마중을 나오지 않아 확인차 묻는 것이다. 분명 하오문도 둘과 무인 둘이라고 했건만 어째 네놈은 마두(魔頭)에 가까워 보이는구나.”

“……활불께서 보내셨습니까?”

“아니!”

딱 잘라 대답한 나라연은 가슴 앞에 턱 하니 팔짱을 낀 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바로 청해성의 활불이다!”

“……예?”

“비구니도 아닌 사미니(沙彌尼)였고, 승단을 떠난 지 족히 이십 년은 넘었지만 활불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린 사람은 근 80년간 오로지 나뿐이다!”

“…….”

“그러니 네놈들이 그리 설레발을 치며 무림의 명운이 걸린 목숨이라느니 뭐니 지껄인 자의 낯짝이나 좀 보자꾸나. 아무래도 병자인 듯하니 장포를 치우고 양팔을 걷어 보아라.”

천오는 잠시 입을 다물고 들은 말의 진위를 고민했다. 사형제와 함께 무역상으로 위장한 채 마교의 본거지인 십만대산으로 향하며, 서문천오는 하오문의 소문주가 된 임사영의 권한으로 수많은 기밀을 공유받았다. 마교의 대표적인 뇌옥 명토(冥土)와는 별개로 고립된 유배지 구천(九泉), 그곳의 내부 구조와 마교의 공식 일정 예상도도 전부 가는 길에 들었다.

무림은 남궁세가의 변절이 만천하에 드러난 뒤로 벌어진 환란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오문은 이때 입은 궤멸적인 피해를 복구한 이래로 중원에 침투한 마교도 색출과 내정에 골몰하고 있어 큰 지원을 받기 어려웠고, 모용세가와 사천당문처럼 친분 있는 세력 역시 각자 맡은 자리에서 혼란을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다.

하지만 마교가 대형 의식을 치를 준비에 여념이 없단 첩보를 받은 임사영은 더 이상 완벽한 때를 기다릴 수 없었다.

대군(大軍)을 끌고 갈 수 없다면 최소한으로 규모를 줄여 잠입해야 했다. 이틀 밤낮의 고민 끝에 고른 인선은 결국 사영 자신과 사형제 둘뿐이었다. 무모하고 멍청한 도박에 가까웠으나 우습게도 이 셋의 조합은 사영이 지닌 최강의 패였다. 본연의 무위는 물론이고 판단력과 행동력, 이 일을 반드시 이뤄 내고 말겠다는 의지까지 있는 믿음직스러운 동생들이었다.

그러나 스승을 모시고 나온 뒤의 일이 문제였다. 약선 초윤의 실종은 아무리 느려도 몇 시진 안에 발각될 터였다. 그러나 마교의 힘이 닿는 영역은 생각보다 넓었고, 사막에서 중원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정되 어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누구 하나 죽는 일 없이 도망쳐 나오는 완벽한 성공은 요원해 보였다.

이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하오문주 희였다.

물질적 지원 말고는 도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던 희는 수십 년간 하오문을 꾸려 오며 쌓아 온 인맥을 동원했다. 곤륜파에도 파발을 넣어 두었고, 청해성 전역의 믿을 만한 세력에게도 긴밀한 연통을 보냈다. 특히 활불은 직접 사막 끝까지 지원을 나가겠다고 했으니 시간만 정확히 맞춘다면 합류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청해성의 정보망이 그다지 촘촘하고 정확한 편은 아니라서 활불의 인상착의까진 전해 듣지 못했다는 점인데……. 별호가 거창하니 예사로운 이는 아니겠지. 어느 쪽으로든 튀는 인간일 거야.

서문천오는 당시 오간 대화 속에서 사저의 말을 기억해 내며 앞에 선 사람을 관찰했다. 이제 믿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가슴에 흉으로 새겨진 ‘지킨다’는 강박이 자꾸만 혀끝을 잡아챘다. 스승님의 옥체를 덥석 내밀었다가 배신이라도 당한다면? 스승님은 지금 지독히도 쇠약해지셨는데, 내 선택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면?

“…….”

짧은 찰나 방대한 고민을 거친 천오는 곧 모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익숙한 손길로 초윤을 조심히 내려놓은 뒤 자신의 몸에 등을 기대게 했다. 야윈 몸을 휘감고 있던 장포를 벗기자 눈 감은 백색 선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라연의 뒤에 도열한 도사들이 철없는 아이처럼 술렁이다 장령의 팔꿈치에 명치를 맞았다.

서문천오는 그쪽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스승의 소매를 정성스럽게 접어 올렸다. 옷자락을 찢어 동여맨 양 손목이 드러났다. 손바닥에 말라붙었던 핏자국은 모래바람에 쓸려 사라졌으나, 그동안의 고초가 고스란히 보였다. 제 몰골은 생각도 못하고 속상한 듯 아랫입술을 씹는 천오의 앞에 나라연이 불량한 자세로 주저앉았다. 고양이처럼 영롱하고 맑은 두 눈으로 혼절한 초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으며 턱을 쓸었다.

“흐음…….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이야기는 나중에 나눌 수 있으니 진맥부터 해 주십시오.”

“기다려라, 이놈아. 망진(望診)과 문진(問診)도 모르냐?”

쯧쯧 혀를 찬 나라연은 초윤의 턱을 눌러 입 안을 보고, 며칠 동안 마시고 먹은 것을 물었다. 마땅한 식량을 챙기고 나오지 않아 구명단으로 연명했단 소리엔 인상을 썼지만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러고는 초윤의 손목에 감긴 천을 툭툭 끊어 버리고 손바닥이 하늘을 보도록 뒤집은 뒤 하완의 바깥쪽을 양손으로 각기 잡았다. 한 번에 한 손목만 짚어 보는 중원의 진맥 방식과는 달리, 양 손목의 맥을 동시에 보는 셈이었다.

검지, 중지, 약지만 붙여 진맥하던 나라연이 들어 올렸던 소지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천오는 그 손끝과 스승의 피부가 닿는 순간 몸속으로 파문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기운을 감지했다. 이는 초윤의 체내를 울리다 못해 가장 밀접히 맞닿아 있던 천오의 내장까지 울렁이게 했다. 천오는 스승의 어깨를 잡은 채 혹시라도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전신의 긴장을 끌어 올렸다.

초윤의 단전에 시선을 고정한 나라연이 여전히 손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봐, 오기로 했던 나머지 두 명은 어디 있지? 죽었나?”

“추적을 이끌고 당초 계획했던 모위현에 향하기로 했습니다. 죽진 않았을 겁니다.”

“네놈만 먼저 헐레벌떡 뛰어왔다는 소리구나. 잘 생각했다. 장령!”

나라연이 호령하자 뒤에서 버들잎 칼날을 쥔 채 가만히 서 있던 장령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나라연은 눈동자만 올려 그를 보며 말했다.

“차인강파, 차인단파와 장수흥법…… 아니, 길상다길을 데리고 모위현에 다녀와. 흥법이와 나머지는 나와 가자.”

“예? 당신은 어딜 가는데요?”

“난 이쪽을 데리고 먼저 돌아가야겠다. 이거 길바닥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 네가 가서 나머지 둘을 회수하고 돌아와라. 너라면 제시간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싫어요. 셋만 보내라고요. 난 애초에 이 일 맡지 말자고 했는데 이젠 나 혼자만 보낸다니 말이 돼요? 나도 같이 돌아갈 거예요!”

“네놈이 하오문이랑 속살거린 서찰을 괜히 꽁꽁 숨겨서 이렇게 된 거잖아!”

“속살거리긴 뭘 속살거려요! 별 쓸데없는 일 맡기 싫다고 거절한 게 속살거린 거예요? 무슨 외도나 첩자질이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네.”

“좋은 말로 할 때 들어!”

“당신이야말로 내 말을 좀 들어줘요!”

나라연과 장령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내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오는 스승의 팔을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피는 멎었으나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 모래 한 톨이라도 들어갈까 봐 가슴이 졸아들었다. 당장에라도 이 여자의 손을 쳐 내고 다시 꽁꽁 감싸드리고 싶었다.

그때, 품 안의 몸이 한차례 들썩였다.

초윤의 양 손목 안쪽을 세로로 줄지어 꾹 누르고 있던 여덟 개의 손끝을 타고 흰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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