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발작이다. 직감한 천오가 서둘러 초윤을 당겨 안았다. 거칠고 다급한 손길로 옷자락을 파헤쳐 맥동하는 심장 위 가슴을 누른 뒤 다른 손으론 단전이 있을 아랫배를 감쌌다. 한동안 조용하다가 왜 지금 갑자기? 의문을 곱씹을 틈은 없었다. 메마른 내공이나마 닥닥 긁어 퍼부으려는데, 벽력같은 목소리가 사이를 갈랐다.
“얌전히 있어!”
순식간에 올라온 살얼음이 손가락 두 마디를 하얗게 덮었는데도 붙든 손을 여전히 놓지 않은 나라연이었다.
“연천, 손을 놔요!”
난데없는 상황에 대경실색하며 나라연의 팔을 잡고 떼어 내려는 장령은 그나마 온후한 편이었다. 천오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의 명령을 들을 생각 따위 한 치도 없었다. 얌전히 있기는. 사막의 한가운데서도 내내 한기에 몸부림치시던 모습을 홀로 보아 왔다. 이대로라면 반각도 되지 않아 전신이 얼음으로 뒤덮일 터. 서문천오의 스승은 빙공을 익히지 않았으니, 이는 쇠약해진 육신에 치명적인 상흔을 남길 게 뻔했다.
그러니 능숙한 독단을 저지르려는 순간, 조금 전 겪은 파문이 천오의 내장을 강하게 뒤흔들며 끌어모은 내력을 와해시켰다. 나라연이 초윤을 진맥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진동이 스승님의 몸을 통해 자신에게도 전해졌다.
타인의 내공이 취약해진 몸을 훑자 몇 번이고 집어삼켰던 핏물이 다시금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다. 자신에게 이 정도의 영향이라면 스승님께는 더한 해악을 끼쳤을 게 분명했다. 역시 오판이었다. 보여 주어선 안 됐고 내어 주어선 안 됐다. 천오는 이를 악물며 스승을 안은 채 그대로 튕겨 나듯 물러나려 했다.
고개를 들어 나라연천금강의 얼굴을 보기 전까진, 언제고 이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리라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
그러나 나라연은 천오에게 시선도 한 줌 주지 않았다. 살의를 느꼈을 텐데도 경계하지 않았고, 건방지다며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연못 아래 뻗어 내린 연꽃 줄기를 눈으로 쫓는 사람처럼 고요하게 몰두할 뿐이었다.
나라연은 차게 식은 공기로 호흡하는 것도 잊은 채 초윤의 육신을 관조했다. 사람의 겉면을 맑은 수면처럼 꿰뚫고 통찰하는 눈동자 속에서 희고 납작한 꽃이 봉우리를 틔웠다. 적어도 서문천오는 그렇게 느꼈다.
영험한 산에서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선 것들과 부대끼고 자란 덕에 지극히 예민하게 발달한 영기(靈氣), 그리고 본디 갖고 태어나 날카롭게 벼린 육감은 나라연천금강의 반박귀진을 벗겨 냈다. 서문천오는 나라연의 동공 속에서 벌어지는 연꽃을 보았다. 불붙인 향 내음과 부드러운 재 냄새를 맡았다.
천오는 이토록 인간 같지 않은 이를 이미 한 명 알고 있었다. 깨닫고 수용한 것이 많아 사람으로서의 격이 높아진 이를, 그렇기에 언제든 미련 없이 모습을 감춰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이를 알았다.
……나라연천금강은 현경임에 틀림없었다. 감히 스승님에 비할 바는 못할 테지만, 지금 이 급박한 상황에 도움이 되리란 사실만은 자명했다.
……나보다도 더욱 많이.
무심코 세운 손톱이 초윤의 피부 위에 박히기 직전, 나라연이 참았던 숨을 토하며 양손을 놓았다. 얼음은 어느새 손등의 반절을 덮고 있었고, 손끝은 아예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엉망이 된 나라연의 손과는 반대로 초윤은 안색이 조금 창백할 뿐이었다. 몸을 뒤트는 아픔도 보이지 않았고, 장기도 더 이상 얼어붙지 않았다.
장령이 나라연의 옆에 앉아 부인의 얼어붙은 손을 서둘러 모아 잡았다. 온기 가득한 제 손으로 한참 비비고 주무르며 녹였다. 빼꼼히 내놓은 장령의 두 눈에는 당황과 공포, 분노가 넘실거렸지만 타박하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라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독이 아니야. 이건 삿된 술법이다. 아니, 독을 쓴 흔적은 있지만 소용이 없군.”
“그게 지금 중요해요?”
“중요하지, 장랑(莊郞). 굉장히 중요한 일이야.”
나라연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짙은 이목구비에 만만치 않게 생긴 인상이 비스듬한 미소를 머금자 냉소적인 얼굴이 되었다.
“나만큼 살다 보면 백화인(白化人)은 한두 번쯤 만날 수 있어. 드물긴 해도 특이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독을 녹이고 약을 머금은 백화인은 이야기가 달라.”
“…….”
“무림의 명운이 달린 사람이라고 아주 읍소를 하기에 얼굴이나 보러 왔건만, 네놈들이 아주 마교의 곳간을 털어 왔구나. 약선 초윤을 이리 업어 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그 말에 도사린 긴장이 점점 팽팽해졌다. 여자의 뒤에 열 맞춰 선 채 허물없이 잡담하던 일행들이 모두 입을 굳게 다문 채 초윤을 바라보았다. 나라연은 양손을 여전히 남편에게 맡긴 채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교는 광천마제 초월량을 봉인한 약선 초윤에게 앙심을 품었고, 하오문에 머무르던 약선의 소재가 파악되자마자 강 아래 세력을 모두 모아 습격을 자행했다. 민간인이 죽어 나가는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약선은 스스로 자처하여 중원을 떠나 십만대산으로 향했다……. 어찌나 유명한 사건인지 청해성까지 소문이 자자하더군. 자그마치 8년이 지나도 심심하면 회자되는 일이다.”
“…….”
“그 뒤로 마교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오문의 웃대가리들은 작금 무림의 상잔(相殘)이 평화의 또 다른 모습이란 사실을 모르나? 사연이 아무리 안타깝다 한들 마교가 이자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어지길 바라도 모자랄 판국에 냅다 데리고 나와?”
나라연의 목소리가 갈수록 노기에 물들었다. 곤륜파는 중원의 서쪽 끝에 있는 문파, 마교에겐 무림으로 향하는 첫 관문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 간단한 지리적 배경이 뜻하는 바는 명료했다.
곤륜파는 백협맹에 속한 모든 문파 중에서도 가장 빈번히 영락하고, 또 가장 잦게 부흥한 세력이었다. 마교가 중원을 침범할 때마다 전쟁의 최전선에서 누구보다도 용맹히 싸웠으며 제일 먼저 패퇴당해 온 비운의 문파. 오래 버티다 무너지기 위해 쌓아 올리는 성채. 이것이 곤륜파를 일컫는 이명이었다.
짓밟혀도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긴 했으나, 곤륜파가 마교에게 입은 궤멸적인 피해는 아무리 번성해도 지울 수 없었다. 죽은 동문은 돌아오지 않았고 불탄 요새는 되돌릴 수 없었다. 이에 곤륜파의 사위경계는 자연스럽게 삼엄해졌고,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성향이 고질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마교가 준동하면 제일 먼저 타격을 입을 문파니 대전(大戰)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약선 초윤을 탐탁찮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천오는 차곡차곡 생각을 정리하며 위장 근처에서 스멀거리는 불쾌감과 무정한 진심을 애써 숨겼다. 스승이 사술에 당했음을 알게 된 이상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조금 더 많이 아는 자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이는 스승님께 필요한 일이었다…….
천오에게는 사저처럼 능숙한 화술과 철저한 근거로 나라연을 설득할 능력이 없었다. 사형처럼 예외 없는 도리와 인간성을 관철할 성정도 없었고, 기진맥진한 몸으로는 힘의 논리를 들먹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 대신 진실된 말로 상대를 당황시킬 순 있었다. 자신의 스승에게도 여러 번 그러했듯이.
“제 스승님 되시는 분입니다.”
“……뭐?”
“약선 초윤께선 일곱 살에 모든 것을 잃은 저를 제자로 거두어 키워 주셨습니다. 지금 마교의 추적조를 유인해 내기 위해 요란하게 도망치고 있을 하오문도 두 명 역시 제 사저와 사형입니다. 하오문에선 단순히 무고한 자들을 가엾이 여기신 게 아니라, 저와 사형제의 신변으로 겁박을…….”
“……에이씨!”
뒷이야기는 더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나라연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곤 검은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마구 헤집은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빈정거리고 분노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처음의 호랑이 같은 기세를 온몸에 두른 채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장령! 그 둘을 회수할 이유가 늘었다. 약선 초윤에게 은혜를 입힐 기회니, 불평하지 말고 다녀와!”
“싫…….”
“혹시 모르지. 죽은 자도 되살린다는 약선인데 내게 여분 목숨 하나쯤은 줄 수 있을지도.”
끝까지 반항하려 했으나 뒤이은 말이 장령의 입을 막았다. 여분 목숨, 전쟁이 벌어진다면 최전선에 서야만 하는 아내에게 둘러 줄 수 있는 보험. 장령은 결국 구시렁구시렁 제 사나운 팔자 탓을 하며 일행 중 세 명과 함께 다른 도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기척 없이 매끄럽게 멀어지는 등이 천오에겐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장령을 바라보던 나라연이 팔짱을 낀 채 천오에게 고개를 돌렸다. 천오는 그사이 장수흥법에게서 건네받은 붕대를 스승의 손목에 감고, 제 장포로 스승의 몸을 다시 둘둘 감은 뒤 오금과 등을 받쳐 안아 일어서는 중이었다. 짙은 피로와 음울한 감정을 펴 바른 낯짝이었지만 약선을 잡은 손의 힘만큼은 단단했다. 나라연은 천오를 향해 네 번째로 혀를 차며 말했다.
“사막만큼은 아니겠지만 가는 길도 험하기 그지없다. 네 스승도, 너도 얌전히 저 녀석들의 등에 업혀 산을 넘는 게 좋을 텐데.”
“괜찮습니다.”
“약선 초윤이 뒤처지면 지금 이 난리가 전부 쓸모없어진단 말이다!”
“제가 뒤처지지 않겠습니다.”
말해 들을 놈이 아니었다. 늘어진 몸뚱이 하나 넘겨주는 게 뭐라고 저리 다 해진 몰골로도 고집을 부리나. 나라연은 천오에게서 눈을 뗀 뒤 남편이 떠나간 서쪽을 재차 돌아보고 찡그린 얼굴로 몸을 돌렸다.
예나 지금이나 새파랗게 어린놈들이란 하나같이 이해 못할 짓만 해 대는 족속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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