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그러고 보니 성역은 교주와 소교주만 들어갈 수 있었지.”
교주의 허가가 없다면 장로도 발을 들이기 어려운 장소가 성역이었다. 어디를 통해 들어가는지도 알려지지 않았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가끔 교주가 흘리는 말을 주워듣고 개인 공간이 있다니 부럽다 싶었을 뿐, 소지에게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별달리 신경도 쓰지 않던 곳이었다.
“소교주는 명토에서 망가진 지 오래니 이름만 성역일 뿐 거의 자기만의 공간이니까……. 그런 곳에 의식이 없는 암존과 약선을 함께 둔다면 뽑을 건 다 뽑아먹고 처리한 뒤에 덮어 버리기 편하겠는걸.”
“암존이 사라진 이백 년간 교단은 광명교와 분리되어서 거의 독자노선을 걸어왔어요. 이젠 옛날보다 몸집이 커졌고, 이름도 바뀌었고 성격도 달라졌는데 왜 과거의 신을 따라야 하나…… 이런 생각이었겠죠. 주패군은 욕심 많은 인간이니까요.”
“그렇다면 암존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또각또각 잘라 두면 되는 거 아냐? 왜 순순히 부활을 도왔대?”
학습된 경어와 반대로 불경한 내용이었다. 소지는 파핫 웃음을 터트리곤 대답했다.
“주패군 개인의 무력은 분명 이 안에서 제일이지만 좌우호법과 대호법이 한꺼번에 덤비면 질 게 뻔하니까요. 봉인이 풀리고 회복되기까진 시간이 있으니 일단은 암존을 모시는 척하면서 때를 기다리겠다, 이런 속셈이겠죠.”
“호법들이 왜 덤벼? 설마 걔네도 광명교야?”
“네, 저보다 몇 기수 위예요. 연신단이 실전됐을 시기라서 멀쩡히 살아남았죠.”
“광명이라는 이름에 비해 하는 짓이 음침하네…….”
“마교가 중원에 간자 밀어 넣는 짓을 어떻게 그렇게 잘하겠어요. 다 보고 배운 게 있으니까 그런 거지.”
소지가 어깨를 으쓱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책장 바로 앞에 의자를 둔 덕에 격자 모양 책꽂이에 뒤통수가 닿았다. 천장까지 빽빽하게 차 있는 서적들을 힐끔 올려다보며, 소지는 멍한 얼굴로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주패군은 아마 약선 대협의 혈액을 노리고 있었을 거예요. 그게 영약이라는 사실은 마교의 장로급까진 퍼졌으니까……. 이 말인즉슨 마교의 장로들도 하나같이 약선 대협의 피를 호시탐탐 탐내고 있다는 뜻이죠. 윗대가리가 다 한통속인데 여기서 어떻게 약선 대협을 지켜요. 말짱한 몸이면 몰라도 암존의 술법까지 걸렸으니, 원……. 역시 피만 확보해 놓고 보내 놓는 게 나아요. 암존의 몸은 호법들이 알아서 할 테고.”
다행스럽게도 약선 초윤의 혈액에 관한 사실은 중원에 그다지 퍼지지 않은 상태였다. 8년 전 세 제자를 치료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본 사람들은 대부분 서문천오를 붙잡아 두다가 사망했고, 그 뒤로는 임사영이 하오문의 소문주 자리에 올라가선 철저하게 단속했기 때문이었다.
암존의 의도와는 다른 쪽으로 흘러갔지만 육체적 능력이 일천한 소지에겐 오히려 다루기 편한 상황이었다……. 아니면 오히려 이게 암존의 뜻이었나. 온 천하에 퍼트리겠다고 말했으면서 풍문을 다루는 하오문의 한복판에서 일을 벌이고, 목격자들을 살려서 내보내긴커녕 그 자리에서 소모한 작태로 보아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약선 대협이 스스로 비밀을 까발리는 것’까진 달성했으니 그 뒤의 일은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임시 육신을 만들어 주고, 또 8년간 비밀리에 접촉해 왔으나 여전히 바닥을 알기 어려운 인물이 암존이었다. 소지는 뻐근한 눈을 감고 어깨를 돌리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를 떠올렸다. 어쩌면 파악하려 들지 않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깊은 구덩이는 들여다보다가 빠지기에 십상이다……. 생각하는 찰나 밝고 천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소지야. 우리 군사, 책사, 마뇌(魔腦) 소지야.”
모르는 척, 멍청한 척 영악하게 구는 남자는 여전히 소지의 책상에 걸터앉은 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왜 암존은 ‘암존’이고 약선은 ‘약선 대협’이야?”
태운이 집게손가락을 뻗어 소지 앞에 펼쳐져 있던 낡은 진법서를 슥 덮었다.
세월이 지나며 변색된 표지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엔, 초윤(肖昀)이라는 두 글자 이름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
눈떠 보니 모르는 천장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초윤은 정신이 들고 보니 난생처음 보는 산에 와 있었다.
“…….”
초윤은 오래 잔 사람 특유의 멍한 정신으로 앉아 침대 옆에 있는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초목이 드물고 흙은 붉으며 높은 봉우리에는 흰 눈이 내린 산들이 지평선을 첩첩이 감싸고 있었다. 안력을 집중해서 보면 저 너머에 들판이 넓게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산맥과 평야 사이에 때 없는 안개가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적인 진법이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
불귀산맥만큼은 아니지만 들이마시는 숨에 시원하고 황량한 영기가 가득해 마음이 편했다. 손으로 짚은 창틀은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무릎 위에는 두껍고 알록달록한 양털 담요가 덮여 있었다.
초윤은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방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조 침상 옆에 놓여 있는 탁상, 그 위에 약 냄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만다라 도자기 그릇들과 쇠숟가락, 금동 조각상과 섬세한 향로, 비단천으로 만든 독서대와 구리 거울, 정교한 문양의 양탄자…….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방은 중원에선 보기 힘든 양식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신강은 아니었고, 사막의 남쪽 도시도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여기가 어딘데?!
초윤은 뒤늦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현 상황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던 머리가 두 배로 충격을 받았다. 기절하기 전 마지막 기억이 떠오르자 더욱 다급해졌다. 분명 아이들이 초윤을 찾아 마교까지 왔었다. 천오는 겁도 없이 혼자 잠입해서 초윤을 데리고 나왔고, 뒤에 마교의 추적을 단 채 사막을 건너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게 이곳이라는 추론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의 기척이 어째선지 가까이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 아래층에서 우글거리는 사람들까지 고스란히 감지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제 몸이 온전치 않은 탓도 아니었다.
초윤은 서둘러 담요를 치우고 침상 밑으로 두 다리를 내렸다. 손목과 발목에 감겨 있는 붕대가 깨끗했다.
그때, 방 바깥에 있는 목조계단을 콩콩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공을 익혔다기엔 정돈되어 있지 않은 발걸음이었고, 익히지 않았다기엔 가진 존재감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적의는 없어 보여서 다행인가. 초윤은 소리 없이 들숨을 마시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려 했다. 그러자 다가오던 사람이 도움닫기 한 번으로 거리를 휙 좁히더니 닫혀 있던 문을 발로 차서 벌컥 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야단을 치듯 외쳤다.
“내공 쓰지 마!”
한순간 실내에 파문 같은 바람이 휙 일어날 정도로 힘이 실린 호령이었다.
초윤에게 이토록 소리 높여 명령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깜짝 놀란 초윤은 휘날린 머리카락을 정리할 생각도 못하고 조금 벙찐 채 들어온 이를 올려다보았다. 목깃과 안감에 양털을 댄 청색 장포를 입고, 갖가지 색상의 화려한 옥을 꿰어 만든 장신구를 줄줄이 걸친 여성이었다.
여자는 무쇠 화로를 들고 어깨로 문을 밀치며 들어왔다. 그리고 방 가운데에서 식어 가는 불씨를 대체한 뒤 저벅저벅 초윤에게 다가왔다. 말 안 듣는 환자를 욕하듯 인상을 쓴 채 들으란 듯이 다른 언어로 궁시렁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쩐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약선이란 인간이 자기 상태도 몰라? 하여간 환자란 것들은 그냥 죄다 의식이 없어야 해. 어디가 아프냐? 하고 묻는 말에 여기가 아픕니다. 하고 얌전히 대답할 때 말고는 다 잠이나 처자야 한다고.”
“…….”
찡그린 눈을 보자마자 초윤은 직감했다. ‘초윤’이 사라지면서 남긴 파편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몸에 새겨진 본능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고수다. ‘초윤’이면 몰라도, 타인의 무공을 얼렁뚱땅 계승 받은 지금의 초윤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기기 어렵다고 적대부터 하고 보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초윤은 여자의 혼잣말에 담긴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하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제 제자…… 천오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목구멍은 여전히 까끌까끌했다. 입 안까지 바싹 말라 기침이 터져 나올 것 같았고, 목소리는 쉬어 빠져 볼품없었다. 하지만 신강에서 막 깨어났을 때처럼 아예 말도 하기 어려운 수준은 아니었다. 초윤은 갈라진 손끝으로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초조한 마음을 다독였다.
다가온 여자는 탁상 위의 금속 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따랐다. 뿌연 색의 찻물이 채 식지 않은 김을 피워 내며 잔을 가득 채웠다. 초윤은 여자가 건네는 잔을 받아 한 번에 삼켰다. 비린 듯 고소하면서도 기름진 맛이, 중원의 깔끔하고 씁쓸한 차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당신 제자는 지금 당신한테 쓸 약재를 구하러 잠시 하산했소.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가지고 올라와 준다는데도 그 며칠을 못 기다려서 내려간 게 오늘 아침이오. 이제 곧 오겠지.”
“……사영이와 사현이는?”
“남매라면 막내와 처음부터 길이 갈렸다고 들었소이다. 그 둘이 마교의 잔당을 유인하고, 막내는 사막을 동남쪽으로 가로질러 내려왔던데.”
담요를 움켜쥔 초윤의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물들었다. 나라연천금강은 하얗고 야윈 선인이 고개를 숙인 채 당장에라도 부스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떠는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세상과 동떨어져 홀로 살아가는 인물이라고 들었는데, 어찌 된 게 그 제자라는 놈보다 인간적인 것 같았다.
약선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을 온갖 나쁜 가정이 눈에 보일 듯 훤했다. 사람 괴롭히는 취미는 없는 나라연이 한숨을 푹 쉬고 빠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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