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그게 자그마치 어제저녁의 일이고, 당신 제자는 기운이 넘치는 녀석이니 사흘거리는 우습겠지. 곧 올 거요.”
“…….”
“첫째와 둘째에겐 내 부하들과 남편을 보내 놨소. 멀쩡히 만났다면 곧 연락이 오겠지. 당신이 지금 벌떡 일어나 봤자 큰 도움은 안 된다는 뜻이오.”
조곤조곤 일러 주는 목소리를 들으며, 초윤은 저도 모르게 일으켰던 몸을 비틀비틀 다시 앉혔다. 피가 아직도 모자란지 머리가 핑 돌고 속이 메스꺼웠다. 손끝으로 입을 막고 구역질을 삼키며 생각했다. 천오는 산 밑에 내려갔고, 사영이와 사현이는 아직도 그 사막에 있다. 내가 당장 달려가서 데려올 수 있다면 좋겠으나…….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바깥을 보았다. 하얀 흙을 발라 높게 세운 토벽(土壁), 빽빽한 창문 너머 붉은 흙과 만년설로 쌓아 올린 산맥, 그 너머 넓은 평야와 키 작은 초목…….
“……곤륜산이구나.”
서장의 북쪽, 사막의 남쪽을 가르는 곤륜산맥은 청해성의 서쪽으로 이어졌다. 하늘 위에서도 보일 정도로 길고 높게 이어진 메마른 산줄기 어딘가엔 영기(靈氣)를 품은 우두머리 산, 통칭 곤륜산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그리고 중원에서 가장 동떨어진 도문(道門) 곤륜파는 곤륜산의 다섯 봉우리에 요새 같은 도관을 짓고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 왔다. 닥쳐오는 마교의 침공마다 무엇보다도 단단한 첫 번째 성벽이 되어 주었고, 중원 어느 문파도 이룩하지 못한 혁혁한 전공으로 벽지(僻地)에서도 긍지를 드높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오랜 시간 중원에서 살아온 ‘초윤’의 인식이고, 무협지를 즐겨 본 독자 입장에서 보자면 곤륜파는 굉장히 안타까운 문파였다. 구파일방의 회의실을 박차고 들어온 전령이 ‘곤륜파가…… 곤륜파가 멸문당했습니다!’를 외치며 벌어지는 정마대전은 아예 한물간 클리셰 취급이었다. 오죽하면 원작 〈귀환영웅〉에서도 곤륜파는 등장한 적이 없었다. 마교가 본격적으로 습격해 올 때쯤 이미 무너진 채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손바닥을 펼치고 시선을 내렸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에 돌돌 감긴 붕대를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아랫배를 짚자 사람의 몸에서 느껴질 리 없는 냉기가 만져졌다. 자세한 상태를 보려면 간단히라도 운기조식을 해야 했지만, 내공을 쓰지 말라는 일갈을 들은 게 바로 조금 전이었다.
“……내 몸은 정상이 아니고.”
그렇다면 지금 이곳을 뛰쳐나가서 남매를 향해 달려 봤자 별 도움은 되지 못할 게 뻔했다. 도리어 짐이라도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니, 초윤은 이미 크나큰 짐이 되어 버렸다. 막내는 사막을 동남쪽으로 가로질러 내려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안 그래도 내세울 거라곤 남의 몸, 남의 지식밖에 없었는데 이를 조절해 줄 ‘초윤’ 본인조차 사라졌으니 당연하게도 무력해졌다. 잠들기 전 벌어졌던 일부터 깨어난 뒤 들이닥친 변화까지, 일련의 사건에 하염없이 가슴이 막막하기만 했다.
자꾸만 흐려지는 눈을 꾹 감고 이를 악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꼿꼿하고 고아하던 몸이 제어해 줄 이를 잃자 자꾸만 무너지려 했다. 초윤은 그동안 살가운 말 하나 하지 못한다고 그토록 타박했던 뻣뻣한 겉모습을 애타게 바라며 욱신거리는 가슴을 손끝으로 긁었다.
그때, 누가 손목을 확 채 갔다.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던 여자가 어느새 침상 모서리에 앉아선 초윤의 양팔을 잡고 있었다.
“대강의 상황은 파악한 듯싶소만, 정식으로 소개를 하자면 이쪽은 나라연천금강이오. 나라연이나 금강이라 불러도 좋고, 곤륜파 운궁의 궁주직을 맡고 있으니 궁주라 불러도 좋고.”
나라연은 초윤의 양손이 천장을 보도록 휙 돌린 뒤 드러난 팔뚝을 각각 잡았다. 검지, 중지, 약지의 끝으로 손목 가운데 연한 살을 눌러 짚고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모위현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중간에 그쪽의 막내와 마주쳤소. 당신 상태가 위중해 보인다고 먼저 빠져나왔더군. 내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당신을 데리고 먼저 곤륜파로 돌아온 참이오.”
간결하게 상황을 정리해 알려 준 나라연은 들어 올렸던 새끼손가락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진맥을 보는 여덟 개의 손가락에 점점 무거운 힘이 가해졌다. 곧 움켜쥐듯 강한 압력이 한 번 가해지고, 나라연은 손을 풀었다.
초윤은 이 독특한 진맥법을 알고 있었다.
“……우매쓰아.”
“오, 약선이라는 별호가 허명은 아닌가 보오. 중원인들이 멋대로 이름 붙인 적맥(赤脈)도 아니고, 쓰아를 제대로 알고 있다니.”
이걸 안다고 하는 게 맞을까?
학교에서 가르친 것만 배워 온 교대 졸업생이 티베트 고유의 의학을 알 리가 없었다. 쓰아라고 불리는 진맥법이 세 가지로 나뉜다는 사실도, 고유의 이름과 중원식 이름이 다르다는 사실도 너무나도 세세하고 전문적인 정보였다.
지난 시간 동안 그저 편리하고 필요하다는 이유로 미뤄 뒀던 근본적 의문이 다시금 불쑥 솟아올랐다. 아까 떠올렸던 곤륜파에 대한 인식도 그렇고, 방금 뱉어 낸 정보도 그렇고 모든 게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한참 아이들을 키울 때처럼 ‘초윤’의 능력과 자신의 능력을 분리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영 느낌이 이상했다. 그땐 누가 일러 주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이 모든 지식이 전부 그저 자신이 익혀 온 제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혼(魂)과 백(魄) 중에 백은 네게 두고 가겠다. 이전처럼 내 기억을 꺼내 볼 순 있을 테지만, 내 의식은 더 이상 이곳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이런 뜻이었나. 중간에서 전달해 주는 사람 하나가 사라졌다고 이토록 이질적으로 느껴질 줄은 몰랐다.
……아니, 처음부터 이렇게 되는 게 맞았다. 타인의 능력을 빌려 쓰는데 지금껏 아무런 의문도 없었던 자신이 이상했다. 이 또한 ‘초윤’이 가운데에서 조절해 준 덕분이었을까. 원흉이긴 해도 믿음직한 선배를 잃은 느낌에 속이 허했다.
아무튼, 산재한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다시 입을 열어 육성으로 말하면서 재차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말이…… 생각한 대로 나온다!’
무협지 특화 자동 필터링이…… 없다!
물론 지난 12년간 원어민이 붙어 통역해 준 말을 제 입으로 구사하며 배운 게 있어 언어 소통의 문제는 없었다. 이 원어민이자 몸 주인이 굉장히 유능한 덕분에 티베트어도 멋대로 알아듣고, 더 많은 외국어도 능숙하게 할 수 있었다. 의도와는 다르게 직설적이고 오만한 독설이 튀어 나갈 일도 없어졌고, 아이들에게 칭찬이나 격려도 가감 없이 마음껏 퍼부어 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초윤’이 언어를 정제해 준 이유를 생각해 보면 도저히 좋다고만 할 수도 없었다.
정하윤은 무협지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정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그리고 예의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영 없어 보이는데,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고 요구할 게 있으면 하시오. 당분간 그 침대 바깥으로 나오지만 않으면 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몇 가지 더 여쭙고 싶습니다. 제 아이들을 마중하기 위해 나왔다고 하셨는데, 곤륜파에서 이토록 도움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몸이 어느 정도 낫는다면 저도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천오는 다친 곳이 없을까요? 사영이와 사현이는 정말 괜찮을까요? 그 아이들이 저를 마교에서 뺏어 왔으니 지금 신강은 상황이 좋지 않을 것 같은데, 들어온 소식이 있을까요? 하오문의 사태 이후로 몇 년이 지난 건지는 알 수 있을까요? 중원은 지금 어떤가요?
떠오르는 대로 물어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하윤은 ‘초윤’에 비해 깍듯하고 예의 바르며 정중하고 친절했다! 중원 전역에 고고하기로는 따를 자가 없다고 정평이 난 약선 초윤이 갑자기 누구에게나 공손한 존댓말을 쓰며 적당히 자신을 굽히고 듣기 예쁜 말만 쓰는 공무원식 대인용 어휘를 구사한다면 마교에 잡혀 있는 동안 세뇌를 당했다는 오해를 받기에 딱 좋았다!
더군다나, 작품에 따라 달랐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의 몸에 자신의 영혼을 밀어 넣어 불멸과 불사를 추구하는 마교인이 나올 때도 있었다. 어둡고 사악한 힘을 다루는 집단으로 묘사되는 만큼 작가의 음침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세력이 바로 마교였다.
그리고 마교와 대립하는 정파인들은 누구보다도 그들의 위험성과 기발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말인즉슨 돌아온 초윤이 하루아침에 바뀐 모습을 보이면 금제니 고독이니 세뇌니 강신이니 온갖 이유를 붙여 가며 추궁하다 못해 죽이려 들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
초윤은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나라연천금강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여자의 물처럼 맑은 눈동자에 서슬 퍼런 지혜가 일렁거렸다. 어떤 우물이든, 어떤 사람이든 저 앞에선 밑바닥까지 꿰뚫릴 것 같았다.
캐해를…….
캐릭터 해석을 틀리면 죽는다…….
원치 않아도 ‘초윤’처럼 행동하게 했던 필터링이 사라지자마자, 어떻게 해서든 ‘초윤’처럼 행동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왔다. 초윤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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