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정말 다행스럽게도 ‘초윤’은 경우 없이 무조건 하대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사천당가의 난위정과 처음 만났을 때나 약사로서 손님들을 대할 때, 그리고 하오문주 희와 대화할 때 정중한 말이 나왔던 걸 보면 그놈의 해라체가 절대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사천당가 내에서 난위정보다 서열이 높은 당염초에겐 초면부터 반말을 했으니 사회적 위치나 무공의 수위가 말을 놓는 조건에 포함되어있진 않은 듯했다.
‘자기 정체를 모르는 민간인에겐 존대를 쓰는 것 같아. 난위정도 상단주의 신분으로 다가왔으니까……. 그렇다면 희는 역시 황실의 인물이라서 그런가?’
비교적 겸손한 어조로 말해 온 경험을 최대한 떠올리며, 초윤은 나라연을 힐끔 바라보았다. 나라연은 당연히도 민간인이 아니었고, 도리어 굉장히 강한 무인이었다. 그러나 ‘초윤’은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존중해 줄 골수 무림인이 아니었다. 무공 대신 엄청난 의술을 지니고 있다면 모를까…….
의술! 초윤의 머릿속에 불꽃이 튀었다. 나라연은 방금 초윤의 맥을 짚었다. 사막까지 이르는 먼 길을 다시 왕복했으며, 내내 기절해 있던 이 몸을 회복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거기에 더불어 사영이와 사현이를 구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자신의 부하들과 남편을 보내기까지 했다.
즉 나라연천금강은 보통 이상의 의술을 익힌 중요한 은인이었다. 이 정도면 아무 생각 없이 뱉어 버렸던 첫마디의 존대를 그대로 밀고 나가도 될 듯했다.
“……곤륜파가 나서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제발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어떻게든 붙여 보자. 이 어두(語頭) 뒤에 감사 표현 이외의 다른 용건이 붙으면 ‘늘 청해성에 짱박혀 있기만 하는 네놈들이 사막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좀 하네?’가 된단 말이다.
“덕분에 크나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옥 같은 간극 끝에 어떻게든 해냈다. 목표했던 말은 너무 겸허해서(고맙다는 한마디가 겸허하게 들리는 것도 웃기지만) 못 했지만 그 비슷한 티는 낼 수 있었다. 겨우 한 문장을 말했을 뿐인데 큰 고비를 넘긴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떨렸다. 설마 앞으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놈의 말투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 살던 시대가 비슷해 보이던 초월량은 가벼운 일상어도 잘만 쓰던데, 봉인은커녕 해외 나들이도 잘만 다녀오던 ‘초윤’의 어조가 더 부드러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초윤은 복합적인 눈물을 삼키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운을 떼고 나니 처음처럼 그리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천오는…… 다치지 않았습니까?”
“멀쩡하다 못해 쌩쌩하오. 천산산맥부터 사막을 거쳐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잠자는 꼬락서니 한 번을 못 봤소. 저러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겠지 싶어 가만두었는데, 기어코 당신을 업고 이 산을 오르지 뭐야. 그쪽 상태를 보고 나서야 탈진한 티를 좀 내는 듯싶더니만 그마저도 하루 만에 싹 가셨소.”
나라연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더니 주전자를 제 찻잔에 기울였다. 그러고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차를 냉수 마시듯 속에 때려 부었다.
다치지 않았구나, 다행이다. 그제야 편안히 놓이는 마음과 별개로 초윤의 눈동자는 더듬더듬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기절하기 전 보았던 광경이 잔상처럼 자꾸만 아른거렸다. 어린 티를 벗어난 얼굴을 엉망으로 적셨던 감정, 고통으로 차게 식은 몸을 움켜쥐던 격렬한 체온, 묶어 줄 사람도 없었다는 듯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늘어트린 채 울다가도 안심하던, 내 소중한…….
초윤은 손을 내려 담요 위로 제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 종아리를 압박하던 악력과 무릎 위에 비비던 이마의 감촉이 떠올라 괜히 간질간질했다. 두껍고 보드라운 천 자락을 그러쥔 초윤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오문이 습격당한 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뭐야. 마교 놈들이 해 지고 달 뜨는 것도 안 보여 줬소? 당신이 하오문의 중생들 목숨을 대신해서 신강에 간 지 8년은 됐소이다. 아, 정세도 모르려나. 남궁이 그 꼬락서니로 까발려졌으니 백협맹은 엎어졌고, 그보다 규모가 큰 새 맹이 생겼소. 봉문을 깨고 나온 당가도, 요녕으로 안 가고 하남에 붙어 있는 모용도 그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 남궁 놈들은 죽지 않고 흩어졌는데 끈질기게 살아남아선…….”
나라연이 중원의 상황을 간단하게 브리핑했다. 핵심적인 정보를 짧게 간추린 설명은 복잡한 사태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으나, 초윤은 중원은커녕 백협맹이 없어졌다는 얘기부터 아예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앞선 충격이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치고 간 탓이었다.
‘8년……?’
내가…… 마교에 간 지 8년?
천오가 27살, 사현이가 29살, 사영이는 31살……?
어쩐지 그 잠깐 사이에 애가 너무 자랐다 싶었는데. 그래도 잘해 봤자 2~3년 지났겠거니 했는데. 8년?
“……그 뻣뻣한 도사 놈들도 하오문과 같이 강시들을 박멸하고 있소. 그런데, 이봐. 당신 괜찮은 거요? 어디 이상하기라도 해? 단전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것 같진 않은데, 맥 다시 재 볼까?”
“아니…….”
초윤은 건조한 손바닥으로 창백한 얼굴을 문지른 뒤 입가를 가렸다. 사영이와 사현이의 모습이 그다지 바뀌지 않아서 아직 성장기에 걸쳐 있던 천오가 몇 년 사이 많이 컸다고만 단정하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고 내공을 다루게 된 이상 노화가 늦어지는 건 당연한 사실인데.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버려서.”
“뭐야……. 마교 놈들이 정말 당신을 지하에 박아 넣고 한 번도 안 꺼내 준 거요? 아니면 너무 오래 살아서 시간 감각이 없어졌나?”
나라연은 안타깝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초윤의 잔에 희뿌연 찻물을 채워 다시 건넸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으로 찻잔을 받아 든 초윤은 바싹 마른 입을 몇 번이고 열었다 닫으며 초조하게 머리를 굴렸다. 수유차, 티베트에서 주로 마시는 고열량 음료였다. 주전자 옆 그릇에 담겨 있는 환약은 센덴, 그것도 녹각(鹿角)과 서각(犀角)을 아낌없이 갈아 넣은 티베트의 귀한 약이었다. 그래, 이런 지식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8년 사이 ‘초윤’의 기억은 하나도 없는 거지?
내 의식이 하오문에서 끊기고 심상세계로 이어진 뒤 8년이나 지나서야 깨어난 것도, 그래. 백 보 양보해서 이 몸에 끼어든 처지라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이제 와 생각하면, 하오문에서 ‘초윤’의 의식이 갑자기 튀어나왔던 이유는 제 몸을 다른 이가 차지했단 사실을 초월량이 알아채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초월량과 가까이 지냈으리라 예상되는 8년 동안은 자신 대신 ‘초윤’이 내내 이 몸을 움직여야 했을 터.
그리고 ‘초윤’은 자신의 백(魄)을 내게 넘기고 영영 사라졌으니, 그 8년의 기억까지 모두 내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무엇 하나 생각나는 일이 없는 상황은 대략 세 가지 가능성을 시사했다.
하나, ‘초윤’이 정말 8년 내내 잠든 채 의식 없는 피 주머니로 살았다.
둘, ‘초윤’이 이전부터 초월량에 대한 기억을 극히 제한해 온 것처럼, 이번에도 초월량과 관련된 시간은 쏙 빼놓은 채 내게 구멍 숭숭 뚫린 백(魄)을 남겼다.
셋, 어쩌면 ‘초윤’이…….
“이봐, 당신.”
그때, 까칠한 손끝이 손목 안쪽에 닿아 왔다. 어느새 한 손으로 침상을 짚고 몸을 숙인 나라연이 다른 손을 뻗어 초윤의 맥을 짚고 있었다.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나라연을 마주 본 초윤이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이쪽을 곧게 바라보는 시선이, 수면처럼 반짝이고 물속처럼 일렁이는 눈동자가 천오와는 다른 의미로 깊어 보였다. 척박한 산꼭대기에서 어쩐지 연꽃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나라연은 낮고 엄중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이 정도로 경황이 없는 걸 보면 퍽 고달픈 시간을 보내 왔음은 알겠는데……. 어쨌든 그쪽을 끔찍하게 아끼는 제자들은 다 멀쩡히 살아 있고, 당신 신변은 이 곤륜파가 책임지고 봐준다잖아. 나를 앞에 두고 지나간 일이나 더듬는 눈으로 벌벌 떨고 있으면 자존심이 상한다고.”
……그래, 내 아이들이 살아 있다. 내가 없는 동안 훌쩍 자란 모양새로, 어디 하나 크게 다친 곳도 없이 살아남았다.
“스승이 됐으면 애들 오기 전에 정신 바짝 차릴 생각은 해야지 계속 빠져 있으면 어떡해. 당신 하나 꺼내 온다고 셋이서 마교를 급습한 미치광이들인데, 스승까지 넋을 놓고 있을 거야?”
살아남아 이곳까지 왔다. 이 세계관에서 가장 위험한 조직을 거침없이 들쑤시고, 미지에 휩싸인 손아귀에서 나를 꺼내 도망 나왔다. 순순히 그를 따라 떠나는 게 아이들을 안전히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자신은 단단히 틀렸다. 남매와 천오가 스스로 위험에 몸을 던지게 만들었으니 도리어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마교의 보복이 닥쳐올 때, 초월량이 다시 한번 ‘초윤’을 찾아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같은 길을 고를 순 없었다. 아이들이 목숨을 걸고 해낸 일을 무위로 돌려 버릴 수도 없었고, 포기를 모르는 제자들이 이토록 위험한 짓을 또 저지를 계기를 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초윤은 받아들여야 했다. 하나하나 혼란스러워할 시간에 서둘러 모든 걸 수용한 뒤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복잡하게 끓어오르던 머릿속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손에 들린 잔이 금세 온기를 잃고, 희미하게 내쉬는 숨에는 차가운 기운이 섞여 나왔다.
허리를 곧추세워 바르게 앉은 초윤은 곧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혼탁하게 진동하던 연갈색 눈은 어느새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적인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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