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내 단전은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상황에 전환점이 되어 줄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이는 필히 ‘초윤’이 본디 지니고 있었던 무위뿐이리라. 초윤은 차분하게 물어보며 제 아랫배 위에 다시 손을 얹었다. 여기서부터 치밀어 오르던 고통이 여전히 기억에 선했다. 내공을 쓰지 말라는 당부부터 단전의 한기까지 틀림없이 연관이 있었다.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마주한 나라연의 얼굴이 곧장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걸 당신이 모르면 어떻게 해?’ 내지는 ‘도대체 아는 게 뭐야?’ 등등 표정만 보아도 여자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걸 물어보고 싶어서 깨어나길 손꼽아 기다린 건데?”
아니나 다를까, 나라연이 맥을 짚고 있던 손을 놓으며 쯧 혀를 찼다. 8년간 실종 구금 상태였던 주제에 아는 건 하나도 없는 초윤은 지레 찔려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 모습이 퍽 처량하게 보였는지, 나라연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모국어로 중얼거렸다. 나라연의 손목과 목에 주렁주렁 매달린 옥석 장신구가 차랑차랑 소리를 내며 거칠게 흔들렸다.
“아니, 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면, 그래. 어지간한 고초는 아니었겠지. 저놈의 새끼들은 매번 기상천외한 사술을 들고나오니 다 알 수도 없는 거고……. 오히려 본인도 모른다면 더 안타까운 거지. 음, 맞아.”
“……면목이 없습니다.”
“됐다니까! 잠깐, 그보다 토번어(吐番語)도 할 줄 아시오? 뭐 말도 함부로 못하겠네.”
무게를 잡던 하오체는 어디로 갔는지, 구시렁거리며 고개를 저은 나라연은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가슴 앞에 턱 하니 팔짱을 꼈다. 그리고 짙은 이목구비를 사정없이 찡그린 채 불량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얼추 알고 있겠지만, 당신 단전에 별 이상한 음기가 뭉쳐 있소. 빙공(氷功)을 익히지 않은 무림인이 빙정(氷精)을 먹은 것과 비슷한 상태야. 차라리 이런 경우였다면 곧장 얼어 죽고 끝나 버릴 텐데, 당신 몸에 들어 있는 놈은 영…… 이상해.”
“……무엇이?”
“여기까지 오면서 당신의 발작을 서너 번 보았소. 음기가 기승을 부리며 온몸으로 번져선 얼어붙는데, 상태가 나아질 만하면 도지고 심해질 만하면 사그라지더군. 그 기세가 마치 독처럼 집요하고 병처럼 영악했소. 마치 당신이 오래오래 죽지 않고 추위와 고통에 시달리길 바라는 것 같아.”
“…….”
담담한 설명 너머로 전해지는 악의에 소름이 돋았다. 초윤은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다른 쪽 팔을 부여잡고 움켜쥐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온몸이 사정없이 떨릴 것 같았다. 무구한 소년처럼 환히 웃던 얼굴이 머리 한구석에 암운을 드리웠다. 지난 8년의 기억은 여전히 백지였으나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초월량이다. 초월량의 짓이다.
하지만 왜? ‘초윤’이 그를 봉인해서?
증오하는 모습이라곤 일절 없었는데, ‘초윤’을 손에 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 악랄한 조치까지 취한 이유가 도대체 뭐지?
“하필이면 그 음기가 단전에 단단히 자리를 잡아서, 당신이 일신의 내공을 꺼내 쓰면 영향을 받아 또 난리를 칠 거요. 섞이지 않는 물이 한 그릇에 모여 있다고 생각하면 돼. 서로 녹아들진 않지만 파도가 치면 함께 출렁이지 않소.”
“……이 음기를 어떻게든 내보낸다면.”
“운기를 하기만 해도 기맥이 얼어붙을 텐데 무슨 수로?”
큰일 났다.
안 그래도 창백하던 초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림인의 무지막지하고 비현실적인 힘은 당연하게도 순수한 근력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었다. 근육에서 나온 힘이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지는 일류 수준에 그쳤고, 가끔가다 보이는 외공(外功)의 보유자도 내공을 완전히 제거한다면 모든 힘을 낼 수 없었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가진 내공의 양과 운용력은 더욱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이백 살을 아득히 넘은 현경의 ‘초윤’은 몸에 내공을 담는 것을 넘어 전신이 주위의 기운, 즉 아직 정제하지 않은 자연의 공력과 동화되어 있는 수준이었다. 그 탓에 육신의 경계를 반쯤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이 희미해질 정도였는데, 여기서 내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단전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인즉슨…….
무협지에 떨어지면서 유일하게, 그러니까 애들을 제외한다면 유일하게 좋았던 점. 아무것도 없는 산속에서 애 셋을 키우면서도 몸살 한번 걸린 적 없고, 웬만한 위협은 맨손으로 쳐 낼 수 있는 무림 고수의 건강하고 막강한 몸까지 잃어버리게 된 건가?
이 음기라는 게 도대체 뭔데?
좌절을 넘어 황당해진 초윤은 입만 뻐끔거리며 아랫배를 만지작거렸다. 대주천으로 몸의 내부를 직접 살필 수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망연자실하는 초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라연이 조금 투덜대듯 말했다.
“그래서 깨어나면 도대체 몸에 뭘 심어 온 건지 물어보려 했는데…… 아예 하나도 모르는 눈치니, 원. 악독한 새끼들…….”
“…….”
“아무튼, 그 음기를 해소할 방법을 찾기 전까진 내공을 일으킬 생각일랑 마시오. 당신 피 냄새를 맡아 보니 별호에 맞게 약이고 독이고 많이도 먹은 듯하던데, 그 음기가 내장을 얼려 육신이 쇠약해지면 일찍이 체화한 독기가 올라와 몸뚱이 안쪽부터 좀먹을 것이오. 명색이 약선인데 제 몸속의 독에 중독되어 죽고 싶진 않겠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정신적 충격을 상쇄하던 초윤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독은 아닐 겁니다.”
“나도 그리 생각하오. 고작해야 독물 나부랭이에 불과한 것이 자리를 잡기엔 당신의 약 기운이 너무 강해. 당신의 몸은 스스로의 독에 부식되면 모를까, 이 지상의 다른 독 따윈 내공이 없어도 거뜬히 집어삼킬 테니 말이오.”
그렇다면 뭐가 있지? 초윤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무협지에서 이런 제약은 보통 사술(邪術)로 통칭되는 금제나 주술, 아니면 고독(蠱毒)이나 이상한 영약 때문이라고 서술되곤 했다. 하지만 고독과 영약은 약선의 몸에 자리를 잡을 수 없으니 전자의 가능성이 더욱 컸다. 게다가 하오문에서 초월량이 보여 주었던 신위가 있으니 아무래도 사술 쪽이 맞는 듯한데…….
초윤은 침상 위로 올라온 나라연의 무릎을 흘끔 보았다. 그 먼 길을 왕복해 가며 천오와 자신을 도와준 건 고마웠지만 어디까지나 오늘 처음 만난 인물이었다. 자기소개와 직위만을 들었을 뿐 힘을 보태는 이유도 몰랐고, 〈귀환영웅〉에서도 나온 적 없는 사람이었다.
사전 정보가 부족한 이에게 하오문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상과 자신의 체질, 그리고 광천마제 초월량과 ‘초윤’의 관계까지 나불나불 말할 순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세하고 체계적이며 친절한 설명은 ‘초윤’의 캐해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일단은 사영이와 사현이가 돌아올 때까진 얌전히 있어 봐야겠다. 참담한 심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초윤은 다른 화제를 꺼냈다.
“……발작은 어떻게 된 겁니까? 경련이나 구토라도…….”
“그랬다면 차라리 다행이지. 호흡은 점점 옅어지고, 손발은 말단부터 꽁꽁 얼어붙었소. 사막의 한밤 같은 냉기가 전신에서 아주 철철 흘러나오더군. 전해 들은 바로는 발끝 좀 닿았다고 연못 하나가 생으로 얼어 버렸다던데. 가까이 가기도 무서웠소이다.”
……내 단전에 들어 있는 게 액체 질소는 아닐 텐데? 무협이 아무리 동북아시아 정서에 맞춘 판타지 장르라고 해도 빙공하고는 일절 관련 없는 ‘약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주위를 꽁꽁 얼리고도 남을 냉각기가 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고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은 게 무색하게도 듣는 소식 하나하나가 다 충격적이기 그지없었다. 초윤은 이마를 부여잡으려는 손을 간신히 억누르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발작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가라앉았습니까?”
그래도 가만히 두면 알아서 끝나는 거였겠지? 그러니까 여기까지 멀쩡하게 운반될 수 있었던 거겠지? 적당히 나아지는 증상이 아니었다면 이런 드라이아이스 같은 인간을 업고 올 순 없었을 테니까?
……왠지 천오라면 전신에 동상을 입어도 꾸역꾸역 해낼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나라연천금강은 상식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그 꼴을 내버려 두진 않았겠지?!
초윤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절박하게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나라연의 복잡미묘한 표정과 떨떠름한 대답이었다.
“아니…… 안 그래도 그걸 물어보고 싶었는데.”
나라연이 한 손으로 턱과 입꼬리를 매만지며 눈을 굴렸다. 이어질 말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초윤은 문득 기이한 직감에 창밖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내공 없이 펼치는 기감은 고작해야 반경 10장가량에 불과했으나, 초윤은 그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막연한 기척을 느꼈다. 정확히는 아득히 떨어진 거리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알아챘다.
새까만 눈길이 까마귀의 깃털처럼 초윤의 뺨을 간지럽혔다. 첩첩한 산맥 아래서 모습을 드러낸 서문천오와 눈이 마주쳤다. 바라봄에 무게가 있다면 일찍이 짓눌려 숨 막혔으리라. 시야 바깥의 세계가 닫힌 듯 순간 굳어 버린 초윤의 귀에, 나라연의 명료한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의 막내 제자라는 놈이 격체전공(隔體傳功)의 묘리로 자신의 내공을 불어넣어 들끓는 한기를 매번 녹여 냈소. 도대체 뭘 키워 낸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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