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의식이 없던 8년을 제외한다면 무협 생활만 무려 12년, 활자 너머로 보던 세계가 실체화되어 다가오자 초윤은 이곳을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사람을 죽여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거나, 수천수만 명 규모의 전쟁이 일어나도 나라는 개입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시스템적 모순은 고대 국가의 빈약한 행정력이나 아예 다른 상식 등 여러 이유를 들어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초윤이 머리를 싸매게 만든 항목은 의외로 무림인의 기본, 내공이었다.
세상은 무형의 기(氣)로 가득하고, 이를 정제해 단전에 쌓으면 곧 내공이 된다……. 과학으로 증명되는 현대에서 살다 온 인간으로선 체감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숨 쉬고 먹으면 몸속에 쌓일 만한 건 중금속밖에 없지 않나, 냉소적인 생각도 오랫동안 했다. 하지만 ‘초윤’의 몸을 쓰는 이상 머지않아 내공과 기의 감각을 체험할 수밖에 없었고, 초윤은 맞닥뜨린 현실에 당장 적응해야 했다. 더불어 미지의 힘일수록 ‘어? 되네?’ 하고 가볍게 넘어가기보다 원리를 이해하고 체득해야만 능숙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민한 결과 나름 말이 되는 설명을 붙일 수 있었다. 초윤은 내공을 일종의 축적된 에너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곳은 기존의 물리법칙이 완전히 들어맞는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땅속의 씨앗이 싹을 틔워 나무가 되고, 가지 끝에 열린 이파리가 숨구멍으로 호흡하는 데에 열에너지와는 또 다른 별도의 힘이 작용한다고 가정하자. 모든 자연 현상이 이 힘을 소비하면서도 생산하며, 무림인은 이를 체내의 특수 경로인 기맥(氣脈)을 통해 정련하고 단전이라는 이차 전지에 축적한다고 하자. 이게 바로 내공이다.
그렇다면 분명 기(氣)라는 시작점은 같을 텐데 어째서 누구는 검에 뇌전이 튀고, 누구는 손에서 불길이 치솟을까. 이 기맥의 경로와 개인의 체질에 따라 에너지의 성질이 전환된다고 생각하면 많은 설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대로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그러기엔 소설 빙의부터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격체전공(隔體傳功)은 보통 무협지에서 죽기 직전의 부상을 입은 스승이 본인의 뛰어난 적전제자인 주인공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내공과 선천진기를 전수하는 기술이었다. 생명을 유지하는 힘마저 주인공에게 물려준 스승은 당연히 죽어서 이야기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방대한 내력을 갖게 된 주인공의 성장 스토리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하나, 스승의 내공이 곧장 사용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둘, 스승의 내공을 단전 한구석에 놓아두고 천천히 흡수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두 번째였다. 성장형 주인공들은 보통 우연히 얻게 된 타인의 내공을 바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이유인즉슨…….
“당신은 알고 있었소? 이립도 되지 않은 놈이, 아무리 같은 무공을 익힌 스승이라 해도 거침없이 제 내공을 당신의 것처럼 밀어 넣어 쓰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오. 심지어 기맥도 아주 제 것처럼 다루더군.”
상술한 대로 타인이기 때문이었다. 심법이 같아도, 무공이 같아도 사람의 체질은 각기 다른 법이었다. 기를 정제하는 몸이 다른데 단전에 쌓이는 에너지의 성질이 똑같을 순 없었다. 그래서 타인에게 함부로 내공을 넣으면 에너지 전달 과정에서 손실이 일어나거나 기맥이 손상되는 등 부작용이 따른다는 설정이 붙곤 했다.
그런데 천오가 그걸 해냈다고? 나조차도 애들 몸을 낫게 할 때 쓴 힘 때문에 탈진할 지경이었는데? 내 기맥을 썼다는 말은 또 뭐야. 사람마다 혈의 위치는 같아도 세맥(細脈)의 모양은 다른 법이니 내가 쓰지 않는 세맥으로 내공이 흐르게 했다면 분명 내상을 입혔을 텐데, 그런 과정도 없었다고?
천재? 내 새끼는 천재인가? 천재는 맞지. 그럼 천재라서 가능한 건가?
찰나에 스친 방대한 혼란에 얼이 빠진 와중에도 이쪽으로 성큼성큼 달려오는 천오가 초윤의 신경을 자꾸만 앗아 갔다.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니까 저렇게 죽자 살자 뛰어올 필요는 없는데…….
그때, 나라연이 지나가듯 흘린 말이 귀에 들어왔다.
“격체전공을 이미 받아 본 듯이 말이야.”
“…….”
그래, 생각해 보니까 격체전공까진 아니어도 있었다. 초윤은 천오에게 선천진기를 준 적이 있었다!
천오에게도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남겨 줘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손을 잡고 불어넣어 준 힘이었다. 정신이 없었던 탓에 무슨 기맥을 썼는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제 선천지기였다. 천오가 이를 흡수했다면 내공의 성질이 자신과 비슷해졌을 수도 있었고, 그 앞에서 사영이와 사현이의 몸에 무지막지한 힘을 쏟아부어 치료했으니 기맥을 다루는 법을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보고 기억하는 것과 실제로 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데. 역시 똘똘하고 기특하기 그지없다.
가진 의문 대부분이 해결되고 드디어 머리가 맑아지자, 나라연이 침상에서 일어나며 초윤의 어깨 위에 한 손을 툭 얹었다. 그리고 허물없이 말했다.
“당신이 운기조식을 해서 그 음기를 빼낸다면 쉽게 해결될 일이지만, 단전을 쓰면 내장이 얼어붙어 그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잖소. 근데 저놈은 제 내공으로 당신 속을 살살 녹여 줄 수 있으니 당장 발작하다 얼어 죽을 걱정은 없어도 될 듯하오.”
“……그렇군요.”
“그러니 당신은 예 딱 박혀서 몸조리하고, 이제 정신 차렸으니 저놈도 항시 옆에 끼고 있으시오. 아, 단전의 음기까지는 저놈이 건드리면 안 되오. 그럼 음기가 저쪽으로 옮겨 갈 거야.”
이런 위험한 걸 천오에게 온전히 맡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초윤은 나라연에게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공손히 돌봐준 감사를 표했다. 어슬렁어슬렁 문으로 걸어간 나라연은 문고리를 잡은 뒤 잠시 초윤을 돌아보았다. 나가는 이를 배웅하기 위해 창문에서 잠시 고개를 돌린 초윤과 눈을 마주쳤다.
나라연은 창밖과 초윤을 힐끗거리며 번갈아 본 뒤 쯧쯧 혀를 찼다. 초윤이 의미를 몰라 의아해하자 나라연이 끝으로 말했다.
“저놈한테 다음부턴 대문으로 들어오라고 꼭 전해 주시오. 아무리 급해도 명색이 곤륜파 궁인데 마교 버러지들처럼 벽을 타서야 쓰나.”
그리고 문이 닫히며 나라연의 등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초윤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스승님.”
창문은 분명 해지는 쪽으로 나 있지 않은데도 유독 그림자가 크게 느껴졌다. 어느새 드높은 영산을 올라온 천오가 운궁의 외벽을 딛고 뛰어올라 창틀을 밟고 있었다.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이 풀썩 소리를 내며 침상 위로 떨어졌다. 그의 그늘 아래서 초윤이 고개를 들고, 어째선지 모를 위압감에 마른침을 삼키고, 갑자기 타는 목으로 입을 여는 순간 천오가 초윤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
꼴사나운 신음은 내지 않았으나 숨이 막히긴 했다. 말이 좋아 초윤의 품속이었지, 이 정도로 차이 나는 덩치라면 뭘 어떻게 하든 초윤이 안긴 꼴이었다. 뺨과 가슴에 닿은 천오의 옷은 고산의 냉풍에 나부껴 차가웠고, 그 너머로 느껴지는 피부의 온도는 뜨거웠다. 갓 짓이긴 풀과 젖은 흙냄새가 훅 풍겼다. 초윤은 괴롭다고 나무라기에 앞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스승님…… 스승님.”
입과 가슴에서 말이 엉켰는지 연신 부르기만 할 뿐 덜덜 떠는 몸을 감싸 안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흉통을 잡았고, 그 다음에는 좀 더 팔을 뻗어 아예 둘러 안았다. 웅크린 짐승처럼 잔뜩 긴장한 등을 도닥이고 턱 아래 닿은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천오가 쥐어뜯듯 움켜쥔 곳이 아팠지만 놓으라 말할 순 없었다. 힘을 좀 풀라는 말도, 이만 됐으니 놓으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초윤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천오 또한 제 혀가 무용해지자 조용해졌다. 세상의 소음마저 바깥에 쌓인 눈이 삼켜 주자 사위가 고요했다. 서로의 숨소리가 가까운 귀에 들리고, 맞닿은 심장의 고동은 점차 겹쳐 갔다.
천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하에서 다시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힙겹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찾는 것도, 모시고 나오는 것도, 깨어나시는 것도……. 끊어질 듯 중얼거린 천오가 침상 위에 짚은 무릎을 반걸음 내디뎠다. 동시에 초윤의 뒷머리와 등을 감싸고 기울어지는 몸을 자연스럽게 눕혔다. 성치 않은 몸으로 자신의 무게를 감당할 스승이 그 와중에도 걱정이었을까. 조심스러운 배려는 고마웠지만, 초윤은 포옹이 풀어지며 떨어진 손으로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자꾸만 초조해졌다. 긴장이란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제 뺨 옆에 손을 짚은 채 팔뚝 길이만큼의 우위에서 내려다보는 얼굴엔 어릴 적 이목구비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격해진 감정에 가늘게 떨리는 몸은 안쓰러웠고, 빛없이 컴컴한 눈은 울 것처럼 일렁였다.
그러나 서문천오의 낯에는 무서울 정도로 완연한 성숙함이 어려 있었다. 떨리는 몸은 스승을 다 가리고도 남을 거체로 자라 있었고, 바닥없는 눈동자에선 이전엔 찾아볼 수 없던 감정이 쏟아져 내리며 초윤을 연신 전율케 했다.
아니, 처음 접하는 감정이 아니다. 어린 몸과 덜 자란 정신이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을 두고 자란 천오는 더 이상 무지한 아이가 아니었고, 지켜야 할 어린아이란 막이 사라지자 초윤 또한 눈을 떴을 뿐이다.
초윤은 새삼스러운 충격으로 천오를 올려다보았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오의 이 맹목적이고 의존적인 감정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도 어느 정도 낌새는 있었으나 설마 8년의 세월 동안 집착이 섞여 더욱 깊게 변질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하고 길디긴 찰나가 흘렀다. 천오는 어느 순간 실 끊어진 인형처럼 초윤의 위에 털썩 제 몸을 겹쳤다. 스승의 가슴 위에 제 볼을 문지르며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릴 때에도 부리지 않던 어리광이 섞인 목소리로 약하게 말했다.
“너무 오래 걸렸어요…….”
초윤은 다시 두 팔로 천오를 그러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사라져 버린 내 잘못이다, 자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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