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잠청(潛聽)을 곧장 멈추고 창피함에 몸부림치고 있자 한 시진은 금방 지나갔고, 한낮의 하늘은 어느새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녁을 먹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자처한 수치심에서 겨우 벗어난 초윤은 천오가 딛고 들어온 창틀을 손으로 털어 냈다. 가공할 무림 고수 두 명한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으니 침대 밖을 벗어날 순 없었고, 천오가 열심히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데다가 잠도 다 날아가 버린 탓에 시간을 보낼 방법은 구경뿐이었다.
흙먼지를 얼추 치워 낸 초윤은 창 밑에 팔을 기댄 채 가만히 바깥을 내다보았다. 저 밑에서 뒤통수에 혹을 매단 곤륜파의 제자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선 채 기합 소리를 내며 권법의 초식을 이어 가고 있었다. 쩌렁쩌렁한 기합이 운궁을 뒤흔들 듯 울려 퍼졌고, 상의를 벗어 던진 몸에선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래…….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죄다 호쾌하게 웃통을 깐 맨몸이었다. 아득히 높고 추워 사시사철 만년설이 쌓여 있는 공간적 배경은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듯했다. 다들 귀 끝과 뺨이 이미 빨갛게 얼어붙어 있었는데도 꿋꿋했다.
아니, 영향이 없진 않나. 초윤은 그들을 유심히 관찰하며 생각을 고쳤다. 줄 맞추어 선 채 힘차게 동작을 연결하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눈빛과 신경전을 눈치채 버렸다. 아무래도 다들 추워 죽기 직전이지만 옆에 있는 동기들보다 먼저 항복을 선언할 순 없단 오기 하나만으로 버티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마찬가지로 반나체 상태의 장수흥법이 꿋꿋하게 서서 움직임을 지시하고 있었다. 이쪽도 춥긴 마찬가지인지 킁 하고 코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반면 초윤은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못해 공연히 제 어깨를 쓸어내렸다. 한서불침은 이미 체질이 되었는지, 의식적으로 내공을 쓰지 않는 지금도 제대로 기능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초윤은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놓고 곤륜파의 제자들이 펼치는 권법을 보았다. 전신을 골고루 사용하는 데에 의미가 있어 보이는 초식과 직선적인 동선을 보아 몸을 단련하는 기초 과정 중 하나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정파 도장(道場)의 훈련을 제대로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화산파 가까이에선 속세에 물든 제자를 접한 게 다였고, 사천당가에선 모두가 초윤을 경계하고 경외시한 탓에 팔자에도 없던 제약 대결이나 해야 했다. 제갈세가는 도둑놈처럼 몰래 들어갔다가 빠져나와야 했으며 하오문은 무력을 위시한 문파보단 노동조합이나 무역회사에 가깝기도 했고 정파 또한 아니었다.
정직하게 무공으로 이름난 문파 자체가 처음이구나. 원래 이렇게 척박하고 험한 곳에서 무협지의 낭만인 협의가 피어나는 법인데……. 초윤은 새삼스러운 무협 독자 감성에 잠겨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위치를 일부러 알리는 듯 정갈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스승님, 천오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얘기 좀 나누려 했더니 밥해야 한다고 냅다 나가 버린 제자가 문밖에서 공손히 말했다. 담담하게 대답하자 온갖 음식 그릇을 아예 낮은 상에 받쳐 들고 바리바리 가져온 천오가 조용히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천오는 흔한 달그락 소리도 없이 들고 있던 반상을 침대 위에 놓고, 식지 않게 덮어 둔 뚜껑을 하나하나 뒤집어 치웠다. 그리고 그새 씻어 말린 수저를 들어 초윤에게 두 손으로 내밀었다.
“…….”
얘가 원래 이 정도로 극진했던가. 생각해 보면 무엇이든 헌신적으로 임하는 아이긴 했다. 하지만 임금이라도 된 것처럼 온갖 수발을 받자니 조금 얼떨떨했다. 초윤은 작게 고맙다고 하며 수저를 건네받은 뒤 저녁상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고마움인지 부담인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잠시 입만 뻐끔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음식은 천오가 장담했던 양육대맥탕, 즉 양고기보리탕이었다. 질 좋은 양고기는 한입 크기로 썰어 부들부들하게 푹 끓였고, 고기의 잡내는 새콤한 초과(草果)와 말린 모과를 몇 점 넣어 없앴다. 그리고 보리는 탕에 넣기 전 물에 한 번 삶아 거친 식감을 죽인 덕분에 알알이 쫄깃하고 부드러웠다.
……아, 보다 보니 저도 모르게 냉큼 한 입 떠먹어 버렸다. 뒤늦게 깨달은 초윤은 음식을 처음 먹어 보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턱을 움직여 잘 익은 보리와 고기를 씹어 넘겼다. 힘줄도 하나 걸리는 것 없이 목에 기름칠을 하듯 삼키기 쉬웠다. 못 본 동안 요리를 정말 잘하게 됐구나. 초윤은 순수하게 감탄하며 연신 숟가락을 옮겼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고소하고 맛있어서 오랜만에 허기가 느껴졌다. 밥보단 약에 가까웠던 ‘초윤’의 솜씨와는 다르게 먹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음식이었다.
몇 숟가락을 더 떠먹은 초윤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천오는 어느새 등받이 없는 간이의자를 가져와선 침상 옆에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천오가 얌전히 시선을 내리고 손끝으로 탕국 옆의 다른 그릇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갈색의 주먹밥처럼 생긴 덩어리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조금 전 나라연이 말했던 티베트의 주식, 참파였다.
곱게 간 보릿가루에 수유차(酥油茶)와 우락(牛酪)을 넣어 빚은 참파는 유목민들이 휴대하고 다니기도 좋고, 열량도 높은 음식이었다. 지금껏 먹어 본 경험은 없었지만, 입 안에서 고소하고 짭짤하며 담백한 맛이 감도는 것으로 보아 ‘초윤’은 이를 먹어 본 기억이 있는 듯했다.
초윤이 숟가락 모서리로 참파를 조금 잘라 먹으려는 순간, 가만히 곁을 지키고 있던 천오가 잠시 수저를 달라는 듯 양손을 내밀었다. 초윤은 잠시 망설였지만 손을 올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 천오의 모습에 깨끗이 먹은 숟가락을 머뭇머뭇 건넸다.
오른손으로 초윤의 수저를 받은 천오는 왼손으론 찻주전자를 들었다. 참파가 담긴 오목한 그릇 안으로 주전자를 기울이자 뜨거운 찻물이 용기를 반쯤 채웠다. 천오는 흰 찻물에 잠긴 참파를 수저로 으깨고 개어 누글누글한 죽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숟가락을 돌려 초윤에게 내밀었다. 초윤은 떨떠름하게 식기를 받아들고 식사를 마저 이어 나갔다.
초윤이 느릿느릿 저녁상을 비우는 동안, 옆에 앉은 천오는 묵묵히 스승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찻잔이 비면 채워 넣었고 찬이 크면 쪼개어 주었다. 먹기 좋게 음식을 손질하며 초윤의 수저를 몇 번 빌렸는데, 그동안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초윤은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나였어도 천오를 잃어버렸다가 8년 만에 되찾는다면 수저가 다 뭐야, 걸어 다니게 두는 것도 아까워서 업고 다녔을 텐데. 그렇지만 아무리 내가 환자라고 해도 이건 너무 과한 배려 아닌가. 물론 나도 천오가 어렸을 때 감기 기운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미음을 떠먹여 주긴 했다만.
아니, 무엇보다 이제껏 살면서 누가 나를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돌보지 못해 안달 난 눈으로 봐준 적이 있던가?
“…….”
자아 충돌을 두어 번쯤 겪다 보면 천오는 수저를 다시 제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꼬박꼬박 받아서 먹다 보니 어느새 저녁상 또한 깨끗이 비어 있었다. 초윤은 천천히 수저를 받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무언가 속은 기분, 휘말리는 느낌이 영 사라지질 않았다. 그러나 어딘가 어색하고 불안할 뿐 뿌리치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일 천오의 행동이 효도 비슷한 개념이었다면 행복하기만 했을 테고, 거북할 정도였다면 그만두라 했을 텐데 애매하게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듯했다. 그저 재회한 순간부터 잘 날 없는 바람이 부는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술렁이기만 했다.
초윤이 식사를 마치자, 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입에 맞지 않거나 부족한 게 있으셨습니까?”
“아니, 전혀 없었다. 이젠 나보다도 실력이 좋아졌구나.”
“……다행입니다. 함수(含漱)하실 소금물와 세숫물을 올릴 테니 소세하신 뒤 침수 드십시오. 손목과 발목의 자상이 다 아물기 전까진 욕간이 어려우실 테니, 내일 낮부터는 매일 몸을 닦아드리겠습니다.”
벌써 자라고? 초윤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산의 해는 짧은 탓에 벌써 어둑하긴 했지만 곤륜파 제자들의 기합 소리는 아직도 들려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모처럼 위협받지 않는 상황에서 깨어나 마주 보았는데 이대로 하루를 보낼 순 없었다. 초윤은 상을 집어 들려는 천오의 팔뚝을 덥석 잡고 올려다보며 말했다.
“들이안기니 받아주었고, 먹으라 하니 먹었다. 너와 이야기를 나누기엔 아직도 부족하더냐.”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막상 마주 대하니 원망스러워졌다 하더라도 탓하지 않겠다, 천오야. 이리 피하지만 말아다오. 내가 너희에게 정말…….”
“원망하지 않습니다, 스승님.”
서둘러 대답한 천오가 상을 놓고 침상의 모서리에 잠시 걸터앉았다. 그리고 제 팔을 붙잡은 스승의 손을 양손으로 모아쥐었다. 지근거리에서 두 눈을 마주친 채 목소리로 새기는 언어는 초윤의 가슴에 한 음절씩 박히도록 무거웠다.
“제게 베푸신 모든 은혜에 맹세코 스승님을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
“그저…… 분명 긴 이야기가 될 테니, 막 의식을 찾으신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이만 쉬시길 바랄 뿐입니다. 다시금 어딘가로 떠나지만 않으신다면…… 대화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잠시 눈을 피했던 천오가 이어 말했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고 직감했으나 초윤은 더 이상 캐묻지 못했다. 원망하지 않는다고는 말했지만, 마지막 문장에 눌러 담긴 감정을 차마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오는 미련이 가득한 손길로 초윤의 손을 매만진 뒤 놓아주었다. 그리고 상을 정리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 방은 바로 옆이니 스승님께 이변이 생긴다면 곧장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제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소리 내어 불러 주십시오, 스승님. 약재도 받아 왔으니 이제 운궁에서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천오는 방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오가 따듯하게 데운 물을 대야에 담아 돌아와도, 그 물로 얼굴을 씻고 입을 헹군 뒤 밤 인사를 받고 홀로 자리에 누워도 어수선한 감정이 가라앉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골치가 아픈 이유는 이런 느낌이 정확히 어디서 기인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모든 게 바뀐 상황, ‘초윤’이 사라진 지금 모든 일을 홀로 헤쳐 나가야 하는 부담감과는 별개로 서문천오라는 초윤의 아이가 주는 압박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째서인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 사영이와 사현이가 돌아오면 알 수 있을까.
머리와 가슴이 뒤숭숭해 쉬이 잠들지 못하리라 예상한 것과는 별개로, 피로감에 눅눅해진 몸은 달이 중천에 뜨자 쉬이 의식을 꺼트렸다.
기억이 끊어지기 직전까지도 옆방의 고른 숨소리는 깊지 않았다. 일찍 자야 할 텐데. 불어났던 고민의 끝은 어렴풋한 걱정뿐이었다.
(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