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며칠이 더 지날 동안 일상은 단조로웠다. 지친 몸은 정오가 되어서야 눈을 떴고, 일어나면 천오가 올리는 죽과 일기단(一炁丹)을 먹었다. 나라연의 도움을 받아 단전의 상태와 외상을 확인하고, 천오가 가져오는 온수로 몸을 닦은 뒤 창밖으로 곤륜파 제자들의 합동수련을 바라보다가 저녁을 먹고 잠들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영이와 사현이 때문에 불안했던 마음은 하루 간격으로 날아오는 전서응이 달래 주었다. 나라연이 부군에게서 받은 전갈에 따르면, 아이들은 다행스럽게도 약간의 피로와 경상을 제외하곤 멀쩡하다고 했다. 오늘은 마교의 추적을 전부 따돌렸으니 며칠 사이로 도착할 수 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당장 뛰쳐나가도 모자랐던 걱정거리가 해결되자, 초윤은 이 음기를 어떻게 진단하고 해소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협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도와 상황을 반전시켜 버리는 요소는 대체로 세 가지, 우연히 만난 은거기인과 우연히 발견한 무공비급과 우연히 먹게 된 영약이었다. 그러나 초윤은 주인공은커녕 이 무공비급과 영약을 제공하는 은거기인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니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초윤은 ‘초윤’의 지식을 백분 살려 양기에 치우친 영약의 종류와 산지(産地)를 목록으로 쫙 뽑았다. 약선의 몸에 웬만한 영약은 일반 비타민제나 다름없었으니, 일반 무림인은 먹기만 해도 온몸이 새까맣게 타 버린다는 만년지극혈보(萬年地極血寶) 수준의 강력한 영약만 모아 종이 한 바닥을 다 채워 나갔다.
초윤이 사라졌단 사실은 일찍이 발각되었을 터. 마교가 임 남매를 집요하게 쫓지 않는다는 말은 즉 다른 꿍꿍이를 준비하느라 바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하루빨리 만전의 상태로 돌아가 대비해도 모자랐다. 초윤에게는 지금의 평화가 풍랑 전의 고요함처럼 느껴졌다.
아이들과 합류를 하면 곤륜파에 보은(報恩)을 하고……. 어떻게 하는 편이 좋을까. 나라연 같은 우수한 의원이 있는데 금창약 제조법 같은 걸 줘도 되나? 아니면 영약 목록을 좀 더 뽑아서 나눠 줄까? 아니, 이건 잘못하면 피바람이 분다. 지금 써 둔 것도 태워 없애야 할 판이다. 차라리 내가 영약을 만들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내공을 쓸 수 있게 되어야 작업을 하지.
금은보화를 주자니 약선 초윤도 산속에 움막 짓고 사는 자연인이고, 만들어 둔 약을 내다 팔거나 갖다주자니 진령산맥까지 갔다 와야 하고, 솔직히 왕복 거리는 얼마가 되든 상관없는데 내공을 못 쓰면 경공도 못 쓰니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러면 마교 대비가 늦어지고…….
그때, 머리에 닿는 조심스러운 감촉이 늘어지던 생각을 끊었다. 뒤통수에 닿은 가느다란 빗살이 흰 머리카락 사이를 길게 가르며 내려갔다. 뒤에 앉아 초윤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던 천오가 말했다.
“기름을 얻어 올 때 들었는데, 내일부터는 욕간을 하셔도 될 듯합니다. 약욕을 하시겠습니까.”
“이곳에는 중원에서 쓰지 않는 약재가 많으니 생소할 텐데.”
“궁주의 도움을 구해 보겠습니다.”
“바쁜 사람에게 그럴 필요 없다. 얹혀 지내는 몸이니 약욕은 과하고, 약재 고방(庫房)을 둘러봐도 될는지만 여쭈어라. 허락을 받는다면 처음 보는 것들을 조금씩 담아 가져오렴.”
회진이 끝나고 몸 닦는 일을 도와준 천오는 수통을 들고 나가더니 나라연에게서 수유(茱萸)씨 기름과 청동 면경을 빌려왔다. 그리고 품에서 빗을 꺼내 들며 단장을 돕겠다고 했다. 요 며칠 사이 제대로 된 말을 걸려고 할 때마다 은근슬쩍 자리를 피하던 천오가 일과 이외의 일로 다가와 주는 것이 기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오는 초윤에게 면경을 건네고 뒤에 앉았다. 그리고 손에 기름을 발라 머리카락 끝부터 매만지며 올라갔다. 내내 누워 지냈으니 엉킨 곳이 많을 텐데도 당기는 느낌이나 아픔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정성을 들이는 손길이 느껴져서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직접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그래, 석반 이후 한 시진 정도는 너도 짬이 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렇다면 모르는 약재 위주로 가져오겠습니다.”
이런 건 대답 잘해 주면서 말이야. 초윤은 속으로 못마땅하게 입술을 삐죽이곤 면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은 표면 너머로 집중하는 천오의 얼굴 한편이 얼핏 보였다. 천오는 어느새 빗질을 마친 뒤 부드러워진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땋고 있었다.
초윤은 장성한 제자의 윤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거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툭 물었다.
“……어떻게 지냈니.”
“잘 지냈다고 말씀드릴 수 없어 부끄럽습니다.”
간격이 길지 않은 즉답이었지만 초윤에게는 겨우 받아 든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듣고 보니 알 수 있었다. 천오가 무엇 때문에 피했든,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든 간에 며칠이라는 시간은 제게도 필요한 공백이었다. 만일 이 몸의 주도권을 온전히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천오의 말을 듣게 되었다면 차오르는 회한을 이기지 못하고 보는 앞에서 곧장 울어 버렸으리라.
천오는 전부 얘기하기로 결심했는지, 계속해 손을 움직이며 담담하게 이어 말했다.
“하지 말아라, 주의해라, 고려해라 일러 주신 말씀을 무던히도 어겼습니다. 많은 사람을 죽이고 베었으며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졌습니다.”
“…….”
“피 묻은 손이 닿아 불쾌하시다면 단장을 멈추겠습니다.”
“그렇지 않다.”
가슴에서 끓는 불에 목구멍까지 타 버렸는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초윤은 입을 다물고 침을 삼킨 뒤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아. 불쾌히 여기지도 않고, 질타할 생각도 없다.”
“제가 천살성을 타고났다 들었습니다.”
아, 결국은 그 얘기가 퍼져 버렸다. 두망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원에서 지냈다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테고, 그중에 별 읽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리가 없는데. 초윤은 천살성이 그저 천오의 무자비한 성격을 부각시키는 설정이라고 생각한 탓에 잊고 있었지만, 만일 초월량이 몇 년 일찍 나타났다면 초윤이 사라진 사이에 어리고 힘없는 천오가 무림공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초윤은 자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면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반질반질한 금속의 표면에 지문이 묻었다.
“측은지심을 모르고 양심과 도리를 갖지 못하니 사람 말을 하는 흉수(凶獸)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정파를 돕는 행세를 하고 있지만, 언제든 마교로 돌아서서 살육을 자행할 수 있는 살인귀라고.”
“……도대체 누가 감히.”
“언젠가 스승님께 여쭈어야겠다 생각하고 외워 둔 말입니다. 사람까지 기억하진 않았습니다.”
천오는 작은 비취옥이 양 끝에 꿰인 가죽끈을 꺼냈다. 그리고 땋은 머리가 쉬이 풀리지 않도록 잘 묶은 뒤 머리카락 타래를 초윤의 어깨 앞으로 넘겨주었다.
동시에 할 일을 마친 천오가 맥없이 초윤의 등에 툭 기댔다. 얼핏 드러난 뒷덜미 아래에 뺨을 기대고 투정을 부리듯 약간의 무게를 실었다. 스승은 병쇠(病衰)한 도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천오를 받아주었다. 서문천오는 초윤의 다정이 어디까지일까 재어 보듯 강파른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저는 그들의 우려가 합당하다고 봅니다. 저는 사저처럼 굳게 결심하지도 않았고, 사형처럼 매번 고뇌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떠한 느낌도, 감상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이것이 스승님께 향하는 길이고, 스승님께서 돌아오실 자리를 청소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잠시나마 즐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
“만일…… 스승님께서 저를 교화하고 격리하기 위해 거두셨다면.”
서문천오가 천살성이란 사실을 알게 된 자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먼저 경악하고, 그다음으로는 질타했다. 그들의 적을 죽였을 뿐인데도 행실이 쓸데없이 잔혹했고 눈에선 광기가 번들거렸다며 일찍이 알았다는 척 위세를 떨었다. 그러고는 꼭 천오의 스승을 언급했다. 이러니 약선께서 너를 거두셨구나. 그래, 그분이시라면 너를 감당하실 수 있으셨겠지. 그러나 약선께서 사라지신 지금은 누구도 너를 믿지 못한다. 천살성이라는 위험을 떠맡을 순 없다.
극단적인 자들은 남모르게 죽여야 한다는 말을 뒤에서 떠들기도 했다. 자신이 욕하는 건 괜찮아도 남이 욕하는 건 두고 보지 못하는 사저가 아니었다면 번번이 성가실 뻔했다.
중원은 혼란스러웠고, 천오의 주변은 더욱 시끄러웠다. 천오는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논쟁에 무관심하게 일관하며 제 할 일에만 골몰했으나 점차 궁금해졌다.
기름이 묻은 손 대신 양팔로 스승의 허리를 조였다. 뒤에서 안은 모양새로 스승의 앞에 반질반질한 손바닥을 내보였다. 길지 않은 생애 대부분을 함께 살았으나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모르겠다. 아니,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서 부리는 무언의 어리광이다. 절대적인 숭앙 아래에선 하잘것없는 주제에 오래 쌓인 불안을 다독여 주시길. 그리하지 못한다면 행동으로나마 보살펴 주시길.
이 며칠 사이 자리를 피하지 않고도 격정을 삼키는 법을 익히고 왔다.
“끝내 개화(改化)하지 못한 제게 실망하지는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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