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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21화 (221/257)

221화

“그렇지 않다.”

스승은 작게 숨을 삼키더니 즉답했다. 차분하다 못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호한 어조였지만, 서문천오에겐 그 어떤 밀어보다도 감미로운 속삭임이었다. 간질간질한 감각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스승의 등에 이마를 비볐다. 이 기분을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오래 느껴 보고 싶었다. 며칠 전 자신을 당황케 했던 열화(熱火)와는 또 다른 온기가 허파 사이에서 부풀어 올랐다. 얇은 막에 감싸인 듯 아슬아슬하게 몸집을 불리는 감정이 이대로 폭 터져 온 가슴에 번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질 것 같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어 고막까지 울렸다. 머리는 본능에 가까운 충동으로 어지러웠다. 강하게 감싸 안아 볼까. 힘을 주어 당겨 볼까. 어떻게 해야 이런 자극을 좀 더 받을 수 있을까.

아, 살아 있다는 느낌! 뱃속이 저릿한 고민을 이어 가던 천오는 벽력같은 깨달음에 어깨를 움츠렸다. 호롱불 하나 켜지 않은 흐린 낮에, 작은 창문 말고는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실내인데도 머리 뒤에서 햇볕이 내리쬐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환하고 소름은 벅차서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혈관에 피가 흐르고 목 끝까지 숨이 찼다. 다시 만나 마주하자마자 알고 싶은 것이 나타나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부드러운 피부와 닿자마자 감각에 이름이 붙고 감정은 녹아 흘렀다. 한낱 두발짐승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마땅히 지켜야 할 조건이 있다면, 서문천오의 인간성은 오롯이 스승에게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기꺼이 의존하고 고착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천오는 이제 어째서 스승에게 그토록 연연하냐는 질문에 ‘스승이니까’라는 원론 대신 다른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혼을 잃어버리고도 멀쩡히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사라지는 순간 짐승만도 못한 생귀신이 되기에 찾아 헤매는 일밖에 할 수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애초에 잃어버리지 않는 것뿐이다.

말수 적은 제자가 등 뒤에서 기쁨에 겨운 얼굴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들은 말이 속상한 초윤은 덮고 있던 양모 담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기름이 묻어 반들반들한 천오의 손바닥을 쓱쓱 문질러 닦아 주었다. 흙장난을 하다가 돌아온 아이처럼 깨끗이 해 달라 보채는 손을 외면할 순 없었다. 머리꼭지가 허리까지밖에 올라오지 않았을 적보다 훨씬 커진 손에, 가끔 두렵게 느껴질 정도로 낯선 모습이라 해도 초윤에겐 결국 애틋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교화는 오로지 악인에게 쓰는 말이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씩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행위를 뜻할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가르치는 것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교화의 축에 든다.”

“…….”

“오래전에 말했지. 네게 근본적인 문제는 없다고. 네가 사저와 사형이 앉아 있는 나무에 도끼질을 했던 날이다.”

“예, 기억합니다.”

“사영의 성격상 그날로 네게 큰 경계심을 품었을 게 분명했다. 내 앞에선 얼추 잘 지내는 척을 해도 미처 풀지 못한 응어리가 있었을 것이다. 일찍이 알았다면 네가 다치는 일도 없었을 터인데 기어코 사달이 났지.”

“담아 두지 않았습니다.”

“아니, 나는 지금도 후회한다. 내가 저지른 모든 오판이 치가 떨리도록 후회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초윤은 담요를 놓은 뒤 한결 부드러워진 천오의 손바닥 위에 가볍게 제 손을 얹었다. 내공을 쓰지 못하게 되었으나 명색이 무림인인데, 피를 많이 흘렸으나 명색이 현경인데 어째서 누워만 있어도 기력을 잃고 지쳤다는 듯 잠자리에 들까. 이는 오로지 정신적인 문제였다.

눈 한 번 깜빡이자 십 년에 달하는 시간이 사라졌다. 궁지에 몰려 순응한 선택의 결과는 바로 앞에 나타났다. 마땅히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위험한 천릿길을 건너왔다. 믿고 있던 능력을 잃고 무능해졌다.

당장 중요한 일에 집중하자고 다독였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의 무게가 지겹게도 심장을 갉아 먹었다. 고개를 돌려도 시야의 끄트머리에 드리운 그림자를 완벽히 가릴 순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매번 생각하듯 지금 곱씹을 문제는 아니었다. 좀 더 나중에, 내 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고 돌아간 뒤 나 홀로 남았을 적에 감당해야 하는 회한이었다. 초윤은 잠시 입을 다물고 혀끝을 깨물며 시선을 내렸다. 흉터와 상처도, 검을 오래 쥐어 박인 굳은살도 하나 없었으나 웬만한 도검은 생채기도 내지 못할 무인의 손이 보였다. 초윤은 그 위에 조금 남아 반질거리는 기름기를 제 손으로 하염없이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없어도 너희들의 연은 흔들리지 않았더구나.”

“…….”

“잘했다, 천오야. 물어볼 사람이 없어 이해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배운 대로 잘했어. 너는 좋은 방향으로 훌륭히 잘 자란 사람이다. 지금껏 내가 네게 실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픽 기절해 버리긴 했지만 사막에서 사영이와 천오가 나눈 짤막한 대화는 기억했다. 당시엔 달랑 셋이서 이런 위험한 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울분이 치밀어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생각을 거듭하며 문득 깨달았다.

사영이와 천오가…… 절연을 하지 않았다!

콩깍지를 내려놓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건 굉장히 대단한 업적이었다. 사영이는 자라면서 천오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긴 했으나, 초윤이 없는 사이에 천오가 뭔가 지극히 ‘염라군 주천오’ 같은 언행을 했다면 칼같이 연을 끊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스승을 구하기 위해 억지로 협력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짧게 나눈 대화에서 그토록 친근하고 익숙한 느낌이 날 리가 없었다. 이는 즉 천오가 사회생활을 그렇게까지 말아먹진 않았다는 뜻이었고, 그동안 최소한이나마 타인을 배려하며 살아왔다는 증거였다. 도끼질부터 하고 보던 어릴 적과 비교해 보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래, 막막하긴 해도 절망적이진 않다. 하염없이 불안하고 불길한 와중에도 노력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좋은 점들이 속속들이 눈에 띈다.

초윤은 한숨을 쉬며 천오의 양손을 모아 꾹 잡아 주었다. 위와 옆으로 한 마디씩은 더 큰 탓에 붙잡기보단 감싸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 상관없었다.

“그리고 평생 속세에서 격리할 작정이었다면 네게 복수를 허락하지도 않았겠지. 무공도 가르치지 않았을 테고, 애초에 데려와 키우는 것보다 쉽고 확실한 방법이 있지 않느냐.”

미래의 모습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아이를, 나아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가차 없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일부러 매정하게 말했다. 정하윤은 몰라도 ‘초윤’은 숙련된 무림인이었다. 이 정도 장담은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야 캐릭터성에 어긋나지 않을 터였다.

천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수 없이 조용한 성정은 변하지 않은 그대로였다. 대신 감싸 쥔 손바닥 아래에서 움찔거리고 머뭇거리는 손끝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초윤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숨을 죽이며 천오를 기다려 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본인에게 좋은 방향으로 잘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었다.

침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천오는 어느 순간 역으로 초윤의 손을 붙잡아 쥐더니, 느슨히 풀어 두었던 양팔로 스승의 허리를 감아 힘을 주었다. 흉통 아래 얇은 선을 꽉 조이고 야위어 보이는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접촉에 익숙하지 않은 초윤의 몸이 삽시간에 뻣뻣이 굳었다가 삐걱삐걱 풀어졌다. 뺨을 간지럽히는 천오의 머리카락을 피해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초윤은 저도 모르게 대놓고 삼킬 뻔한 마른침을 애써 참았다. 억누른 입꼬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입을 열면 볼품없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찰나에 속으로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린 초윤이 고장 난 머리통을 억지로 굴렸다. 사실 아까부터, 그러니까 천오가 은근슬쩍 초윤의 팔 밑으로 제 손을 내밀 때부터, 등에 기댈 때부터, 냅다 품에 뛰어든 채 한참 엎드려 누워 있었을 때부터, 실은 막 깨어난 단상 앞에 무릎 꿇은 모습을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얘…… 조금…… 너무 허물없이 닿지 않나?

이 정도면 평범한 건가? 아무나 끌어안을 애는 아닌데, 오히려 그래서 더욱 지켜야 하는 거리감이나 선을 잘 모르나? 아니면 안심되는 마음에 이럴 수도 있나? 오랜만에 만났지만 여전히 내가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서 계속 응석 부리는 건가?

응석…… 이것도 어리광의 일환인가? 그래……. 이 머나먼 타지까지 와서 8년 만에 겨우 만났는데 엄청 반갑고 서럽겠지? 나도 이 정도인데 8년을 생으로 살아온 얘는 더 하겠지? 얘가 사회생활을 몽땅 말아먹진 않았어도 스킨십의 적정선을 알려 주는 사람까진 없었겠지?

그래서…… 이런 거겠지? 이럴 수 있는 거겠지? 지금부터라도 알려 주면 되는 거겠지? 너는 장성했으니까 이젠 이전처럼 안기고 안아 줄 순 없는 법이라고…….

허둥지둥 마음을 다잡은 초윤은 천오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빼낼 작정으로 손목을 비틀었다. 하지만 빠져나오기도 전에, 그리고 이만하면 됐다고 말하기도 전에 선수를 빼앗겼다. 천오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그자를 따라가시고 몇 달이 지나서야 조화지경에 올랐습니다. 정신에 몸이 따라오면서 해건금침은 자연히 피부를 뚫고 나왔고, 내공을 회복한 뒤 바깥으로 나와 보니 사저와 사형은 저보다 일찍 회복하여 일선에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초윤이 가장 듣고 싶었던 내막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미 운을 뗀 와중에 끊을 수도 없었고, 다른 화제를 꺼낼 수도 없었다.

결국 초윤은 잠시 탈출을 포기하고 손에서 힘을 뺐다. 천오의 어둑한 눈이 잠시 흡족한 듯 가늘어졌으나 미처 보지 못한 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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