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초윤’이 과거에 벌여 놓은 일 때문에 곤란했던 적은 이전에도 있었다. 일곱 살의 천오를 데리고 무심서에 막 도착했을 때 튀어나온 남매도, 쌀 사러 내려갔다가 ‘초윤’ 때문에 봉문한 사천당가와 엮였을 때도 모두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는 초윤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이십 대 중반에 난데없이 생긴 세 아이는 최선을 다해 키워 냈고, ‘초윤’에게 원한과 동경을 함께 품고 있는 자들은 다시 한번 찍어 눌러 주었다. 그리고 ‘초윤’의 과거에서 비롯될 수 있는 불행은 초월량의 등장으로 최악을 찍었다고, 이 이상의 고단한 일은 생길 수 없다고 조금 안심하기까지 했다.
독학으로 독공의 최고봉을 찍은 인간이 이상한 교단에서 자라는 동안 아무것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사람 몸으로 단약을 만들어 애들한테 먹이는 단체에서 이런 두뇌의 인간을 가만히 놀게 놔두었을 리가 없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강시 제조법 개량은 좀 심하지 않나? 이른바 좀비 사태의 원흉 과학자가 됐다는 뜻인데?
이런…… 이런 일을 벌여 놓고 자기는 그냥 뿅 없어졌다고?
남은 나는 어떻게 하라고?
200살은 진즉 넘은 무림인이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죄짓지 않았길 바랐던 적은 없었지만, 하다 하다 전쟁에 쓰이는 생체 병기를 만들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 잘못된 환경에서 어긋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면 그럴 수는 있다고 쳐. 그렇다면 최소한 수습은 다 하고 사라져야 하지 않나?
당황스럽고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더듬더듬 천오를 밀어 내고 몸을 일으키며 개탄의 신음을 흘렸다. 중원의 무림인들이 그 강시들과 맞서 싸웠다. 내 아이들이 그 강시들과 맞닥뜨렸다. 서문천오가 그 강시들과 칼을 맞댔다…….
성마르게 입가를 문지르고 이를 악물었다. 주위의 기운에 녹아든다는 말은 즉 그만큼 주위에 자신의 기운을 항시 퍼뜨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정반경의 공간에 지배력을 행하는 미무일식공을 제어할 이성이 가늘어지자 묶여 있던 힘이 아우성을 쳤다. 감정과 동화된 사위의 공기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 놓인 그릇들은 달그락거리며 모서리부터 금이 갔고, 주전자 안에 들어 있던 찻물이 끓어올라 울컥울컥 넘쳤다. 억지로 틀어막아 둔 내공의 흐름에 실개천이 흐르자 귀신같이 아랫배 근처가 차가워졌다. 아, 곧 아프겠다. 내장에서 얼음 가시가 잘그락거리던 느낌을 떠올린 초윤이 찰나에 몸을 굳혔다. 그러는 와중에도 열불이 나서 씨근거렸다.
그때, 연신 마른세수를 하던 왼손이 얼굴에서 휙 떨어져 나갔다. 품을 빠져나간 등을 가만히 보고 있던 천오가 뒤에서 오른팔을 뻗어 초윤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동시에 한 손은 돌아보는 스승의 요대 앞을 거머쥐고 잡아끌어 야윈 몸이 기어코 뒤를 향해 돌아앉게 했다. 체급 차이가 생겼다 해도 엄연히 훤칠한 성인의 몸뚱이인데 제가 키운 아이의 손에 너무나도 쉽게 다뤄졌다. 인지부조화에 얻어맞은 초윤의 머리통이 아연하게 텅 비는 순간, 천오는 초윤의 단전 위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붙잡힌 손과 아랫배에서 익숙하고 버거운 열기가 흘러들어 왔다. 흰 종이에 떨어트린 먹물처럼 빛없는 두 눈이 가까워졌다. 초윤은 그 안에서 어둡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아무것도 밝히지 못할 화마는 그저 격렬하게 들끓으며 무엇이든 집어삼킬 뿐이었다.
기맥을 타고 들어오는 천오의 진기(眞氣)는 그 불길로 녹여 낸 금속 같았다. 데일 듯 뜨겁고 숨 막히게 무거운 액체가 느릿느릿 몸속을 채우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손끝이 근질거렸다. 괜히 목을 태우는 조바심이 낯설지 않았다. 재회한 천오는 눈을 마주칠 때마다 자꾸만 초윤의 심장을 갉아 먹고 있었다.
톡, 이마가 닿았다. 초윤은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화들짝 놀라 몸을 튕겼다. 천오는 금방 허리를 세우고 얼굴을 물리며 말했다.
“저를 봐 주십시오, 스승님. 제가 곁에 있습니다.”
“…….”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초윤은 입술을 달싹이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한기는 어느새 가라앉아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삽시간에 몸을 데워 준 온기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가볍게 휘둘린 몸이나 들뜬 심장이 무안하고 당혹스러워서 초윤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내리뜬 눈꺼풀을 집요하게 훑는 눈이 느껴졌으나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지했던 사고는 천오가 미적미적 손을 놓아주자 다시 기능을 되찾았다. 초윤은 어쩔 수 없이 천오와 마주 앉은 채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조금씩 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오야, 몇 가지 묻겠다.”
“예, 스승님. 만족하실 답을 드리겠습니다.”
“강시와 자주 마주쳤느냐?”
천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미동도 없이 고요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 달에 적게는 이십, 많게는 오십의 개체를 상대했습니다. 사태 초반에는 일백을 넘는 수를 단신으로 처리하기도 했으나, 마교가 사람의 시신이라면 모조리 회수하여 강시로 재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죽인 인간의 목도 반드시 베어 두었기에 수가 줄어든 편입니다.”
“……수가 많구나.”
“예, 스승님의 거취와 초월량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 마교로 의심되는 중소세력을 모두 찾아다니며 습격을 자주 당했습니다. 하오문의 광범위한 정보망을 접할 수 있는 사저가 주기적으로 후보지를 추려 주었는데, 사형은 마교에 대항하는 정파와 함께 행동했고 저는 소속이 없는 낭인 신분으로 자유롭게 조사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니까 마교의 위장 거점을 도장 깨기하고 다녔단 소리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계속 대화가 다른 길로 빠지고 있으니 지금은 당초의 목적에 집중해야 했다. 초윤은 착잡한 한숨을 삼키고 이어서 물어보았다.
“강시를 만들려면 먼저 전신 십사경 361혈과 임독양맥 52혈에 시침을 하고 약재 우린 물에 담가 사후경직을 유연히 풀어야 한다. 강시의 근골에 스며 있던 약 냄새를 구분할 수 있겠느냐?”
“냄새가…… 모두 같진 않았습니다.”
“한 약재만 모조리 쓸어 담으면 티가 났을 테니 대체재를 구했겠지. 기억나는 대로 말해 보거라.”
천오는 코끝을 살짝 찡그린 채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불쾌한 경험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했지만, 생리적인 거부감보단 골몰하는 얼굴에 가까워서 방해할 수도 없었다.
“상심자(桑椹子)…… 오디 열매의 냄새가 나던 것 같습니다. 우슬(牛膝)의 냄새와도 비슷했고…….”
“구기자와 토사자(菟絲子), 담성(膽星)과 주사(朱砂)는?”
“한꺼번에 섞여 있진 않았지만 그 약재들도 희미하게나마 있었던 듯합니다.”
초윤은 이마를 짚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확인하면 확실했다. 하지만 역시 이상한데.
“강시에게서 장작 탄내는 나지 않았느냐?”
“아, 나무 타는 연기 냄새라면 유명합니다. 강시가 나타나기 전에 그 화독내로 미리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백 년 전 정마대전에서 나타난 강시들도 하나같이 장작 냄새를 묻히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어 다들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냥 나무가 아니라 초령목(招靈木)이다. 무덤가에 심은 목련 나무를 베어 음지에서 말린 뒤 주술을 새기고 태우면 수증기 같은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를 시신에 쐬어 입히는 것이 공정의 마지막 단계니 장작 냄새가 진동할 수밖에 없지.”
“…….”
“귀소목과 초령목 중에 고민하다가 단가를 낮추기 위해 택한 방법이었다. 초령목은 신강의 추운 환경에선 절대 자생할 수 없었지만 형님의 능력으로 태양을 대신할 수 있어서…… 동영에서 뽑아 온 한 그루의 신목(神木)을 일부러 사기(邪氣) 짙은 곳에 심어 번식시켰다.”
담담한 척 읊조린 말끝에 위태로운 한마디가 붙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 손으로 모조리 불태웠는데 어째서.
천오는 스승의 말씀을 흘려들을 이도, 이해하지 못할 이도 아니었다. 강시와 초윤 사이의 상관관계를 곧장 알아차린 천오는 조금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스승이 신강에서 강시를 연구할 만한 시기라면 최소한 정마대전이 벌어지기 전, 이백 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었다. 그 긴 시간을 지나 찬란히 번성하는 중원을 다시 한번 위태롭게 뒤흔드는 지혜가 바로 스승의 것이라니, 그야말로 소름 끼칠 정도의 고강함이 아닌가!
찬사를 듣고 경외를 받아도 모자랄 능력의 결과에 스승은 어째서 저리도 참혹한 낯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강시에게 죽을 뻔했던 경험도, 실제로 죽은 이들도 천오의 감상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서문천오에게는 오래도록 받아 온 교육과 수년간의 경험이 있었다. 떠오르는 대로 입 밖에 내는 대신 차근차근 사건의 인과를 되짚었다. 광천마제 초월량을 마주했을 때의, 그리고 지금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강시가 세상에 풀려나는 것은 스승님께서 바라신 일이 아니다. 제조법이 새어 나가지 않길 바라며 모조리 불태우신 듯한데, 일찍이 폐기한 정보가 공공연히 돌아다니고 있으니 충분히 당황하실 법도 하다.
더 나아가 스승이 가장 걱정할 만한 요소를 추론한 천오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암담한 낯의 초윤에게 말했다.
“스승님, 다치지 않았습니다.”
“…….”
“다치지 않았습니다. 사저는 그 뒤로 활과 암기에 매진하여 움직이는 강시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고, 사형은 모용세가와 하북팽가의 정예 무사들과 함께 행동했습니다. 그리고 스승님께선 저를 그깟 시체에게 당할 이로 키우지 않으셨으니, 저희 중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말을 마친 천오는 입을 다물고 초윤의 안색을 유심히 관찰했다. 자신을 비롯한 제자 셋이 스승의 불안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리라, 어찌 보면 문하생 주제에 오만할 수도 있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역시 틀리지 않았다. 눈에 띄게 안도하는 초윤을 확인한 천오는 무심코 튀어 나가려던 손을 주먹 쥐어 참았다. 그리고 잠시 손바닥을 펴서 내려다보았다.
이런, 큰일이다. 닿아 만족하는 법을 익히게 되자 시도 때도 없이 만지고 싶다. 잡고 싶고, 매만지고 싶다. 문지르고 싶고 쥐어 보고 싶다. 불뚝 솟은 섟 하나를 꺾고 왔더니 여남은 개의 충동이 생겨 버린 꼴이다. 이유 없이 손을 뻗으면 내치는 손길에 고집스럽게 버틸 수 없게 될 텐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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