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새벽까지 이어지고도 남았을 대화는 갑작스레 등장한 나라연의 난입으로 무산되었다. 불안정하게 진동하는 기운을 느끼고 한달음에 달려온 나라연은 곧장 문을 박차고 들어와 제정신이냐고 일갈했다. 그리고 막 손바닥에서 눈을 뗀 천오를 잡아끌어 바깥으로 쫓아내고 초윤에겐 절대안정을 강조했다. 찔리는 구석이 많은 초윤은 별다른 변명도 없이 수긍한 뒤 문틀 너머 천오에게 조용히 눈인사만 했다. 천오는 잠시 초윤을 바라보다가 묵례를 남기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한나절이 더 지날 동안 상태를 묻는 말 외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천오는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았고, 초윤은 들은 말도 미처 소화하지 못해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 날에는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산책을 시작했다.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몸에 양모 담요를 돌돌 두르고 천오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내려왔다. 꽤 오래 걷지 않은 탓에 처음에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무인의 육신은 금세 감각을 되찾았다.
초월량이 ‘초윤’에게 한 짓은 채혈과 음기 박아 넣기밖에 없는 걸까. 초윤은 안쪽에 털가죽을 덧댄 신으로 눈 쌓인 바닥을 꾹 밟으며 생각했다. 체력과 기력이 현저히 낮아졌고, 내공을 아예 쓰지 못해 무인으로서의 능력이 7할 이상 떨어져 버렸지만 겉보기에 멀쩡하단 점만큼은 신기했다. 그렇다면 8년간 월량과 ‘초윤’이 나름 화기애애하게 지냈거나, 아니면 지금은 알 수 없는 조치가 되어 있다는 뜻인데.
차라리 전자면 좋겠다. 떨떠름한 불안감을 억누르며 뽀득뽀득 한 걸음을 더 내딛자 옆에서 따라오던 천오가 네 번째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 바람이 냉초(冷峭)합니다.”
“춥지 않다고 반각 전에도 말했다.”
“하지만 나라연 궁주가 과한 거동은 피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과하다 싶으면 말리러 오지 않겠느냐.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타박하듯 투덜거리며 조금 더 빨리 걸어갔다. 천오는 속도를 맞추어 나란히 곁을 지켰다. 물론 자신의 건강 때문에 신강에서부터 전전긍긍하며 고생해 온 천오에게 못할 짓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꾸만 미련이 싹텄다. 진령산맥 같은 풀 냄새와 흙냄새는 없어도 탁 트여 시원한 시야 때문인지, 폐를 씻어 낼 듯 차고 깨끗한 공기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더 바깥에 머무르고 싶었다. 겸사겸사 운궁의 경관도 퍽 근사해서 연신 위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중원과는 다르게 두껍고 높게 흙을 발라 세운 백색 벽과 좁고 빽빽한 창문은 궁보단 요새에 가까운 모습이라 웅장하게 다가왔다.
걸음을 멈추고 또 가만히 고개를 들고 있자 어깨에 무언가 묵직한 무게가 툭 얹혔다. 곧장 돌아보니 천오가 입고 있던 털 망토를 벗어다가 초윤의 어깨에 기어코 걸쳐 주곤 목 앞에서 여미고 있었다. 문제는 초윤이 이 망토 밑에 이미 어깨걸이와 담요, 장포, 외의, 중의, 내의를 겹겹이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답답했지만 한숨을 삼켰다. 천오가 갑자기 훌쩍 커진 탓인가, 어린 애한테는 생전 부리지도 않던 투정이 자꾸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다.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수발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꿋꿋이 망토의 매듭을 묶던 천오가 어느 순간 번쩍 고개를 돌려 남쪽을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따라 시선을 옮겼지만 초윤의 눈에는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감에 뭔가 걸렸나. 한차례 깜빡인 초윤이 무엇을 느꼈느냐 묻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천오가 중얼거렸다.
“……왔군요.”
누가?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래서 내가 유독 들어가기 싫었구나. 어렴풋한 깨달음만이 뇌리에 문득 번졌다.
초윤은 덜컥 숨을 삼키고 천오의 시선이 향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비탈에 깔린 높은 계단 앞에 다다라선 가파른 경사를 내려다보았다. 안력(眼力)에 집중해 초점을 맞추자 저 아래서 올라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 맨 앞에 있는 사람은 등 뒤에 커다란 활을 메고 있었는데, 이 험준한 산을 오르면서도 힘들지 않은지 연신 옆과 뒤의 다른 사람들과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콧잔등 밑으론 검은 면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 쾌활한 표정을 짐작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계단의 끝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든 사영의 두 눈동자가 초윤에게 직격으로 꽂혔다. 고양이 같은 눈이 놀란 듯 커지고, 쉼 없이 올라오던 두 발은 딱 멈추어 선 채 뒤따르던 사람을 가로막았다. 누나의 이변에 함께 위를 올려다본 사현 역시도 만년설이 나부끼는 산령에 우뚝 서 있는 이를 보았다. 녹아 사라질 듯한 머리카락 끝과 눈발처럼 흩날리는 입김, 그 위로 설움이 선명한 호박색 눈을 보았다.
남매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계단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사현은 발을 헛디뎌 무릎을 찧고 손으로 짚어 오르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다치진 않았지만, 덕분에 사영이 첫 번째로 꼭대기에 도달했다. 정확히는 열댓 계단쯤 남았을 때 스승의 품을 향해 냅다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내공을 쓸 수 없는 자신의 몸 상태도 잊어버린 초윤은 기꺼이 양팔을 벌렸다. 못 본 사이 신장도 체격도 더욱 자란 사영이 그대로 초윤의 품에 틀어박혔다. 천오가 한 손으로 슬쩍 등을 받쳐 준 덕분에 뒤로 쭉 밀려 나진 않았지만 풀썩 주저앉을 정도의 충격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사영은 신경 쓸 정신이 없었고, 초윤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파고드는 아이의 등을 한껏 끌어안았다.
사영은 초윤의 품 안에 엎드리듯 주저앉은 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제 인생 유일한 보호자의 등을 움켜쥐고 양팔 가득 부둥켰다. 오래 지나지 않아 허겁지겁 뒤따라 올라온 사현이 기골장대한 몸으로 누나와 스승을 한꺼번에 와락 껴안았다.
초윤의 몸에 남매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재회의 기쁨 이전에, 아이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8년이 지나고 온전한 스승을 다시 만나서야 무작정 집어삼켜 왔던 겁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었다. 더 이상 어렸을 적 선망했던 무적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유약한 일면을 가감 없이 보여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스승이었다.
이제는 좁아진 슬하에 웅크린 채 한참 목메는 마음을 삼키던 사영이 입을 열었다. 명랑하던 겉껍질을 벗어던지고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의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다시는…….”
“…….”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그래.”
“하나도 안 기뻤어요.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스승님이 그렇게 가 버리신 게 생각나서 분통이 터졌어요. 제가 이 정도인데 사현이는 어땠겠어요. 저는 입을 열 때나 쓰이는 혓바닥이라지만 얘는 눈이란 말이에요. 정말, 정말 하나도 안 기뻤어요. 감사한 일이지만 감사하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기껏 낫게 해 주셨는데 불경하고 무례해서 괘씸하신가요?”
“아니, 너희들을 낫게 한 이유는 내 이기심이었다. 그리 떠난 것은 내 오판이었고.”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그래, 알았다.”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중얼거린 사영이 입을 다물었다. 묵묵하던 사현에게선 훌쩍이며 코 먹는 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거의 울고 있는 두 아이에겐 미안하게도, 초윤의 가슴엔 저릿한 안도감이 번졌다.
무사히 자란 남매를 온몸으로 실감하는 느낌은 멀리서 보고 몇 마디 들어 얼핏 안심하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초윤의 기억 속에 이렇게 두 아이를 안았던 경험은 하오문으로 마지막이었다. 그때 사현이는 중상을 입어 의식이 없었고, 오열하던 사영이는 억지로 재운 탓에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긴 시간을 눈 깜짝할 사이에 뛰어넘어 버린 초윤에게 이 일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었다. 몸과 정신이 너덜너덜하던 아이들을 양손으로 잡은 채 느꼈던 통심(痛心)이 아직까지도 가슴에 선연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신강이 어딘 줄 알고 찾아오냐고, 마교가 어떤 곳인 줄 알고 건드리냐고, 초월량이 어떤 이인 줄 알고 이리 도발을 했냐고 야단을 치려던 각오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저 그렇게라도 낫게 하길 잘했다는 심정으로만 가득했다. 저절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려는 입가를 억지로 막아야만 했다.
초윤은 흐느끼기 시작한 아이들의 뺨을 감싸 하나하나 마주 보았다. 제 목구멍으로도 뜨겁고 따가운 응어리가 올라왔으나 어렵지 않게 삼켰다. 사영이의 뒤통수에 매달린 매듭을 풀어 면사를 벗겼고, 자신과 똑 닮은 눈을 가진 사현이와 시선을 마주쳤다. 둘 다 긴 여정으로 낯이 좀 상했을지언정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그래, 천오의 말이 맞았다. 다치지 않았다…….
스승의 손에 얼굴을 기댄 남매가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아예 소리 내어 통곡을 하며 초윤의 어깨와 가슴에 이마를 박았다. 어느새 아이들과 함께 온 곤륜파의 사람들이 계단을 다 올라와선 어색한 눈빛으로 이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초윤은 낯설고 고마운 이들에게 눈짓으로 양해를 부탁하며 아이들을 하염없이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오래 지나지 않아 초윤의 등에도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럴 때는 절대 빠지지 않던 막내 또한 여전했다.
초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희미하게 웃어 버렸다. 다시 눈을 뜬 이래로 가장 편하고 기쁜 모습이었다.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