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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 교주를 애지중지 키웠다-225화 (225/257)

225화

곤륜파의 다른 제자들처럼 우락부락한 덩치의 일행 뒤로 마지막 사람이 봉우리에 올랐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둘둘 가리고 눈만 빼꼼 내놓은 남자는 운궁의 남문에 열린 통곡의 장을 떨떠름하게 잠시 응시하다가 척척 지나쳤다. 나라연은 어느새 바깥으로 나와선 멀찍이 떨어진 곳에 비딱하게 선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장령은 오는 길에 보이는 족족 산 장신구를 주머니째 나라연에게 건네곤 나름 토라진 티를 내려는지 별말 없이 운궁으로 걸어 들어갔다.

까다로운 남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나라연은 스승과 제자의 상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근슬쩍 초윤의 등에 기대앉은 천오가 기민한 감각으로 시선을 느끼곤 얼핏 눈을 마주쳤지만 금방 돌려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잡한 심경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나라연 역시 복귀한 문도들을 통솔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날이 차니 늦지 않게 들어와라. 명령조의 전음만이 천오의 고막을 울렸다. 나라연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이 추운 바닥에 언제까지고 스승님을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초윤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사영의 목이 쉬고 사현의 눈은 붓자 보다 못해 이만 안으로 들어가자고 구슬렸지만, 오랫동안 고인 제자들의 감정은 쉽게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못한 채 차곡차곡 쌓여 굳은 심정에 금이 가니 걷잡을 수 없었다. 말을 할라치면 다시 서러워졌고, 눈물이 그쳤다 싶으면 다시 터졌다. 초윤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도 보지 못했던 모습에 쩔쩔매며 열심히 사과하고 약속의 말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천오가 당장에라도 사형제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켜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운궁은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먼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을 위해 목욕물을 데운다, 식사를 짓는다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예민한 기감에 속속들이 걸려들었다. 개중 목욕물이란 말이 천오의 귀에 콱 박혔다. 그래, 이거다.

“사저, 사형.”

천오는 스르륵 일어나며 초윤의 팔을 잡아 위로 당겼다. 초윤이 그 힘에 기대어 얼떨결에 일어나자 함께 모여 앉아 있던 사영과 사현은 자연스럽게 스승을 뺏긴 꼴이 되었다.

“운궁의 문도들이 돌아온 이들을 위해 목욕물을 데우는 듯합니다. 먼 길을 돌아오시는 동안 여독이 많이 쌓였을 테니 이만 들어가시지요. 회포도 개운한 몸으로 푸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여독이 문제…….”

“스승님, 나라연 궁주가 오늘부터 목욕을 해도 된다고 했으니 저녁에 따로 준비하는 것보단 지금 함께 하시는 편이 여러모로 쾌적하실 듯합니다. 방까지 모셔다드린 뒤 목욕통과 욕간하실 물을 갖고 올라가겠습니다.”

천오는 재회의 기쁨이나 안도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사무적인 어조로 사형제를 정리한 뒤 물끄러미 스승만을 바라보았다. 초윤은 붙잡힌 팔뚝을 빼지 않은 채 엉망인 몰골의 남매를 돌아보며 연신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곧 험준한 산세에 한 줄기의 찬바람이 닥쳐왔고, 소복이 쌓여 있던 눈발이 흩날려 초윤의 뺨에 닿았다. 아, 지금 사저와 사형이 추위를 탈까 고민하신다. 천오는 초윤의 머릿속 단편을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천오의 예상대로 끝내 수긍한 초윤은 몸소 허리를 숙여 남매를 일으켰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무릎에 묻은 눈을 맨손으로 털어 주려 하자 사영이 펄쩍 뛰며 말렸다. 사영은 새빨갛게 핏발이 선 눈으로 방해꾼 천오를 잠시 노려보았지만, 곧 이성을 되찾고 혀를 쯧 찼다. 그리고 천오에게는 삿대질을 하며 너 딱 기다리라는 말을, 초윤에게는 묵례를 하며 금방 가겠다는 공손한 인사를 남긴 뒤 동생의 손목을 붙잡고 운궁의 한편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천오는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들의 등을 바라보는 스승을 보필해 계단을 올라갔다. 불편할 정도로 겹겹이 걸쳐 드린 옷을 다시 벗긴 뒤 침상까지 모셔 앉혔다. 그러고선 환기를 시켜 둔 창문을 닫고, 목욕통을 놓을 방 가운데를 정리하고, 스승님께서 벗으신 겉옷과 갈아입으실 옷을 개어 두고, 공기를 데워 줄 화로를 확인하고, 기다리실 스승님의 몸에 한기가 들지 않도록 새 담요를 둘러 드렸다. 극진하게 보살피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재빠르고 능숙했다. 재회의 여운에 잠겨 잠시 정신이 없는 사이 휘말린 초윤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분주한 천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준비를 마친 천오는 초윤에게 포권을 취하고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스승님께 내어 드렸던 피풍의와 입고 있던 장포를 휙 벗어 옆에 있는 제 방에 던져두곤 겅중겅중 계단을 내려갔다. 활기가 도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소매를 걷어 팔뚝에서 동여맸다. 목욕, 그래. 이것부터 시급히 도와드려야 한다. 쉽게 불결해지지 않는 선인(仙人)의 육신을 지니고도 매일 저녁 사형제와 자신의 목욕이 끝나면 이를 정리하며 꼬박꼬박 욕간을 하시던 분이었다. 세목 자체를 즐겨 하시던 분이 고작해야 몸닷기로 만족하실 리가 없지 않은가.

실상은 사형제에게 옮겨 간 관심이 못마땅해 조금이라도 빨리 초윤의 신경을 돌리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평생 이토록 치졸한 마음을 먹어 본 적이 없다 보니 스스로 깨닫기는 어려웠다. 천오는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뜬금없는 행동에 나름의 이유를 붙여 가며 납득했다. 그래, 맞다. 울창한 숲 사이 강이 흐르고 비가 잦던 두망산과 비교하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곤륜산이다. 운궁의 사람들도 물이 부족해 만년설을 퍼 와서 녹이고 있지 않은가. 지금이 아니면 스승님의 욕간이 더욱 번잡스럽고 늦어질 게 분명하다. 사형제와의 대화는 그 후에, 다들 진정하여 자리에 앉았을 때 해도 늦지 않다.

천오는 민첩하게 목욕통을 하나 빌려 위층에 갖다 놓고 내려와선 깨끗한 구리 물병에 끓인 물을 가득 담았다. 뜨거운 물을 담으라고 만든 병이 아닌지라 순식간에 겉면이 화끈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양손에 들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양어깨에 두 병을 얹고, 머리에도 한 병을 인 채 가볍게 뛰어 올라갔다.

평생 물 긷는 일만 해 온 사람 같은 모습으로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계단을 오르내리자 사람들의 주목이 한 몸에 쏟아졌다. 하지만 천오는 늘 그랬듯 주위의 시선에는 털끝만큼의 신경도 하지 않은 채 스승을 생각했다.

수많은 기억 중에서도 왜 하필 최근 몸을 닦아 드리던 때가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천오는 요 며칠간 꼬박꼬박 초윤의 몸단장을 도왔다. 홀로 할 수 있다며 극구 거부하는 스승을 설득해 상체만이라도 벗게 했고, 손을 뻗기에 번거로울 등을 물수건으로 조심히 문질러 드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어깨와 팔에도 손이 갔고, 행여나 사지의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손바닥과 종아리까지 씻겨 드리게 되었다.

천오는 목욕통 안으로 끓인 물을 쏟아 넣고 빈 물병 다섯 개를 안은 채 한 번 더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당시에는 머릿속에 담아 두기만 했을 뿐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장면이 왜 지금 눈앞에 아른거리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뿐일까.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괜히 조급증이 들고 손끝이 떨리는 것 같았다. 펄펄 끓는 물을 퍼담느라 온 얼굴에 수증기를 쐬고 있는데도 입술이 바짝 말라 혀끝으로 적셨다.

그 와중에도 희게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스승의 머리칼 끄트머리가 어른거렸다. 등을 닦느라 앞으로 넘긴 머리카락 때문에 언뜻 비친 목덜미나 곧게 뻗은 척주, 등허리 양쪽으로 옴폭 팬 보조개와 날개뼈 위 옅은 점. 천오는 그 연한 흔적을 보고 스승의 몸에서 가장 인간다운 부분이라 생각했다. 들어 올린 팔에 맵시 좋게 조여든 어깨 근육과 자뼈 끄트머리가 톡 도드라진 얇은 손목, 서늘하고 창백한 손등 끝에 석죽색 손톱. 단정하게 유지하시던 평소와는 달리 조금 자라 있었다. 침수 드시기 전에 교도를 가지고 올라가 잘라 드려야겠다.

담아 두었던 기억이 멋대로 솟아오를 뿐인데도 어쩐지 침상에 앉아 계시는 스승님과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정확히는 그 발치까진 당연한 듯 눈길이 갔으나 복부와 허벅지가 뻣뻣이 당기는 느낌에 지레 놀라 시선을 피했다. 마지막으로 목욕통을 채우고 욕간에 필요한 물건을 챙겨 오기 위해 다시 방을 나온 천오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과 함께 도리질을 한 뒤 걸음을 옮겼다. 열화, 이 이유 모를 불길이 문제다. 끓인 물을 옮기는 동시에 가슴에는 찬물을 붓느라 바쁘다니 우스운 일이었다.

청해성은 물이 귀한 지역이라 목욕이 드물었다. 일 년에 한 번, 일주일가량 단체로 강과 호수에서 몸을 씻는 전통 명절을 제외하곤 추운 기후와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욕간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많은 환자를 봐 온 나라연천금강은 청결과 건강의 연관성을 알고 있었고, 적어도 자신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은 온몸을 씻는 버릇을 들이길 바랐다.

그렇게 몇십 년을 노력한 결과 운궁에서는 어렵지 않게 목욕을 접할 수 있었다. 빈번하지는 않아도 보름에 한 번은 머리와 몸을 청결히 하려고 했고, 한 사람씩 물을 데우기엔 드는 품이 만만치 않으니 조를 짜서 단체로 욕탕을 꾸렸다. 목욕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자 행상인에게서 사들이는 물품도 조금씩 늘어갔으며 종국에는 아예 세목용 비품을 모아 두는 창고까지 생겼다.

천오는 나무 원첩 하나를 들고 그 창고를 찾아 들어갔다. 먼저 와서 비품을 챙기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자루나 궤짝 따위를 뒤져 괜찮은 물건을 찾아냈다. 짚을 태워 만든 잿물에 여뀌즙과 밀가루, 석회와 향유를 섞어 뭉친 석감(石鹼)과 바짝 말려 곱게 갈아 둔 팥가루,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수건과 소금 한 주머니 등 처한 상황에 비해 호화스러운 것들이 원첩 위에 척척 쌓여 갔다.

이윽고 완벽한 준비를 마친 천오는 다시 겅중겅중 계단을 올라갔다. 까닭을 짐작하기 어려운 신체의 이상과는 별개로 기이한 고양감이 심장을 휘감았다.

스승님의 성격상 먼 길을 거쳐 돌아온 사저와 사형을 등한시하진 않으실 터. 적어도 몇 주에서 몇 달은 꾸준히 그들을 곁에 두고 지내실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적어도 머리를 빗을 때에는, 복장을 갖추실 때에는, 그리고 욕간을 하실 때만큼은 방 안에 나만을 들이지 않으실까. 셋 중에 나만이 스승님과 가장 오래 살았으니, 사저와 사형과는 다르게 스승님께 맞추어 능수능란하게 시중을 들 수 있으니.

어렴풋한 기대를 품고 마지막 계단에 당도했다. 스승을 다시 안으로 모셔 왔을 때부터 대략 일 다경이 지났고, 천오는 그 안에 모든 준비물을 마련했다. 희미한 즐거움에 손끝을 가만두지 못하고 들고 있던 원첩을 조금씩 긁었다.

씻겨 드리고 싶다. 그래, 스승님께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나 역시도 그리해 드리고 싶다. 물이 아직 너무 뜨겁지는 않은지 온도를 확인하고, 젖은 손으로 요대를 풀어 홑겹의 옷을 벗겨 드리고 싶다. 기력을 잃은 몸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손을 잡아 드리고 싶다. 수면 위로 빼꼼히 나올 어깨에 더운물을 흘려 드리고 싶다. 몸을 숙이신다면 날개뼈의 흐린 점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겠지…….

그러나 한껏 가벼워졌던 천오의 발걸음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우뚝 멈춰 서게 되었다.

“뭐냐?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대충 물만 끼얹고 온 듯 짧은 머리카락이 채 마르지 않은 사영이 초윤의 방문 앞에서 마른 수건 두 장을 든 채 비딱하게 천오를 흘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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