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사저가 왜 벌써 여기에 있지? 천오는 내키지 않는 감정을 그다지 감추지 않고 꺼림칙한 눈으로 사영이 들고 있는 수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입만은 학습된 예의를 따라 깍듯이 답하고 있었다.
“……스승님의 욕간을 도와드리기 위해 가져온 물건입니다.”
“청해성에 향석감도 있었어? 잘됐네.”
그러나 사영은 (천오의 입장에선) 뻔뻔스럽게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직 욕탕에 안 들어가신 거지? 그새 물은 받아 놨나 보네. 내가 할 테니까 넌 가서 씻어. 너도 사막 건너랴 눈칫밥 먹으랴 고생했잖아. 이리 줘.”
“…….”
“달라니까?”
스승님께 배운 수많은 사회적 약속 중 가장 성가신 개념은 단연코 예절임이 분명했다. 사영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오는 마지못해 답했다.
“……그다지 힘들지 않았습니다. 사저야말로 쉼 없이 행군하셨을 테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오십시오. 이전부터 스승님의 시중은 줄곧 제가 들고 있었으므로, 본분을 다해 계속하겠습니다.”
“스승님 얼굴 뵙고 몇 마디 말씀 듣는 게 나한테는 더 쉬는 거야. 지금 몇 년 만에 만나 뵀는데 느긋하게 목욕이 되겠냐. 조금만 더 대화 나누다가 자기 전에 제대로 씻든 할래.”
“…….”
“얼른 이리 내, 나 팔 아프다.”
“사저께서는 목욕 시중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뭐?”
목소리만큼은 가능한 한 담백하게 들리도록 노력했으나, 천오의 사저는 눈치가 귀신같았다. 꿋꿋이 버티는 사제의 태도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감지한 사영이 느슨하게 풀려 있던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야, 임사현이 꼬맹이였을 때부터 매번 홀라당 벗겨서 벅벅 닦아 준 게 나야!”
“그건 이미 이십 년 전이고, 사형과 스승님은 같지 않습니다. 어린 친동생을 다루듯 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 내가 스승님 시중을 함부로 들 것 같단 소리야? 하오문 얕보냐? 난 명문세가의 시비로 위장하고 들어간 적도 있어!”
“하지만 위계 높은 사람의 목욕 시중을 들어 보신 적은 없지 않으십니까. 목욕하는 사람을 암해(暗害)하는 일이라면 모를까……. 물론 사저가 스승님을 허투루 대하실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스승님께서 편찮으신 지금은 보다 익숙한 제가 도맡는 편이 여러모로 훨씬 능률적일 겁니다.”
“아니, 여기서 능률을 따질 필요는 없잖아. 그냥 스승님 좀 제대로 뵙고 싶을 뿐이라니까? 정 걱정스러우면 물 식기 전에 나올 테니 네가 넘겨받아서 더 하든가. 애초에 네가 방해해서 뭐 여쭙지도 못했잖아!”
“스승님은 미지의 주술에 당해 와병하셨고, 지금도 좀처럼 기력을 차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안 그래도 일 년 내내 만년설이 녹지 않는 산봉우리 위에 모셔 둔 점이 마음에 걸리는데 언제까지 야외에서 스승님을 붙잡고 계실 요량이셨습니까?”
“그래서 얌전히 들어온 뒤에 뵈려는 건데 네가 또 끼어들고 있잖아. 나 없는 동안 물심양면으로 스승님 보필한 건 잘 알겠어. 근데 스승님이 네 거냐? 일곱 살 땐 부리지도 않던 생떼를 왜 써?”
“생떼는 사저께서 쓰고 계십니다. 애초에 지금이 아니면 영영 대화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완고하신지요. 스승님의 성정으로 보아선 막 복귀한 사저에게 이런 일까지 부탁하고 싶어 하시진 않을 텐데요.”
사영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그에 맞추어 천오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실렸다. 오가는 어조가 격해지면서 선택하는 단어까지 거칠어지자 천오는 눈을 돌려 닫혀 있는 스승의 방문을 힐긋 보았다. 내공을 쓰지 않고도 산 아래 나와 눈을 마주치고, 몇 층 밑의 대화를 훤히 들으시던 분이었다. 문 앞의 소동을 모르실 리 없으니 서둘러 원만히 해결해야 했다.
인제 와서 차음막을 쳐도 이상하겠지. 속으로 혀를 찬 천오는 손에 든 원첩을 꽉 쥐었다. 사영에게 이 권리를 넘겨줄 생각 따윈 조금도 없었다.
“저 역시도 못다 드린 말씀이 많지만 스승님의 육신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때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설령 사저가 스승님과 비밀리에 나눌 담화가 있어 고집을 부리고 계신다고 하더라도 물러나긴 어렵습니다. 오늘 저녁까지는 조용히 보내시고, 나중에 하십시오. 제대로 씻고 쉬어 청결하실 때.”
“아니…… 이거 또라이네.”
황당하다는 듯 찡그리고 있던 사영이 진심으로 화가 나기 시작했는지 으르렁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면사를 벗은 입술 사이로는 뾰족한 송곳니가 비쳤고, 목덜미를 긁던 손은 주먹이 되어 허리 옆에 척 얹혔다. 경지를 넘은 무인이 분개하자 날것의 위협이 어깨 위로 넘실거렸다. 더군다나 사영은 성격도 생애도 험한 탓에 비슷한 연배의 누구보다도 날카롭고 사나운 기세를 갖추고 있었다.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나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덜컥 주눅이 들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서문천오는 어지간한 무인이 아니었고, 동시에 목숨의 위협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초윤의 부재라는 극심한 공포를 경험한 뒤 더욱 심화하였기에 이제 와 사영에게 겁을 집어먹을 이유가 없었다.
“저는 충분히 합리적인 까닭을 들어 사저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내가 스승님께 피해라도 끼친다는 듯이 말하고 있잖아!”
“…….”
“대답 안 하냐?”
“명확한 형태로 수긍하면 사저는 분명 난동을 피우실 테고, 스승님의 방 앞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은 터라.”
“이게 끝까지 이따위로 말하네. 내가 이렇게 완강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비밀리에 서둘러 전할 첩보가 있다 하더라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이가 없네. 너 그냥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스승님 시중을 드는 게 싫은 것뿐이잖아.”
“그렇긴 합니다.”
“이건 또 대답을 넙죽해?”
사영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토하며 잠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하여간 남동생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누나보다 키가 자라고 몸이 커지면 건방지게 굴어 댔다. 그나마 임사현은 어렸을 때부터 해 온 단도리가 있어 얌전한 편이었지만, 서문천오와는 말싸움으로도 끝까지 부딪치기만 할 뿐 이긴 적은 없어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다.
쥐어 패려면 죽을 각오로 덤벼야 하고, 남의 궁에 마련된 스승님 방 앞에서 이 이상 실랑이를 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저 당당하고 멀뚱한 표정은 볼수록 짜증이 나고, 잡일은 이만 맡기고 쉬라는데 부득불 고집부리는 낌새도 영 이상하고…….
즉 넘어가자니 사안이 중대했고, 뛰어들기엔 상황이 안 좋았다. 급한 일을 일찍 알려 드리지 못하는 것도 싫었으며 저놈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는 것 역시 끔찍했다. 여태껏 멀쩡히 지시를 따르던 천오가 잘 보이기만 해도 모자랄 스승님 앞에서 왜 이런 고집을 부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동안 가끔 미쳐서 잔인하고 집요한 모습을 보일 때도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다, 우리 셋 다 반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살고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온 게 오히려 저 버르장머리를 키웠나 싶었다.
사영은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본디 사영의 성격대로라면 들고 있는 수건이라도 움켜쥐고 덤벼들어 싸웠겠지만 8년 만에 만난 스승님 앞에서 우환거리를 보여 드리고 싶진 않았다. 그것도 본거지가 아닌 남의 궁에서, 방금 한참 운 탓에 멍한 정신으로 일을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쟤보단 나이 먹은 내가 양보해 주는 게 역시 맞나.
그러나 마음을 먹은 사영이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겨우 입을 연 순간, 천오는 사저가 무슨 말을 할지도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던 눈썹을 치켜올렸다. 바로 앞에서 그 태연한 표정을 목도한 사영의 성질이 울컥 터졌다. 단단히 틀어져 버린 심정으로 본래 하려던 말을 내버려 두고 악귀처럼 인상을 쓴 채 삼류 마교도나 할 법한 ‘나중에 두고 보자’식의 으름장을 놓으려는데.
방문이 덜컥 열렸다. 사영은 곧장 입술을 다물고 성난 개처럼 드러내고 있던 이를 감췄다. 어느새 기척도 없이 다가와 와락 문을 열고 긴장감을 깨뜨린 초윤은 천오의 손에서는 원첩을, 사영의 손에서는 수건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걱정까진 기꺼이 받겠으나 퇴물 취급은 필요 없다. 혼자서 할 테니 둘 다 물러가거라.”
“스승님! 그런 게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제자들의 항변을 단호하게 잡아 누른 초윤이 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영, 전하고 싶다 한 말은 한 시진도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시급하더냐.”
“그게…….”
“그렇다면 욕간을 올리기 전에 네 용건부터 듣겠다.”
사영은 사납게 으르렁대던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아랫입술을 씹으며 초윤의 눈을 슬쩍 피했다. 물론 중요한 안건은 맞았지만, 그게 단 한 시진도 지체하지 못할 만큼 급했다면 천오와 실랑이를 하지도 않았다. 벽 너머로 전음을 보내거나 스승님을 만나자마자 말씀드렸겠지. 사영이 첩보라고 으름장을 놓은 이유 중 절반가량은 애매하게 끊겼던 해후에서 비롯된 사심이었다. 사영은 목뒤를 매만지며 잘못을 시인하는 어린아이처럼 우물쭈물 말했다.
“아니요……. 그렇게 시급하진 않아요. 엄청 은밀히 말씀드릴 일도 아니고요.”
“정말?”
“정말로요.”
“사현이는.”
“걘 손이 느려서 아직 씻고 있을 거예요.”
“저녁 식사까진 시간이 남았으니 돌아가서 제대로 목욕을 한 뒤 다시 오거라. 물이 식을 때까진 몸을 푹 담그고 있어야지.”
어렸을 적부터 약욕을 할 때마다 들어온 말이었다. 사영은 고양이 같은 눈을 깜빡이며 스승을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다정하신 분이긴 했는데, 냉갈령한 어조와는 반대로 손끝은 따스하고 행동은 배려 깊으신 분이긴 했는데.
오랜만에 뵈어서 그런가? 아주 어렸을 때만 함께 지내서 유독 딱딱하신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을 뿐인가? 어쩐지 스승의 언행이 훨씬 부드러워진 듯했다. 그다지 변하지 않는 표정은 여전했지만 지그시 내리까는 눈하며 유연한 입술과 말투하며 한꺼풀 벗겨 낸 듯 훨씬 다감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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